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조선의 문둥이들을 돌본 오웬과 윌슨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12. 15. 21:02

     

    지난 10월 29일 오스트리아 국적의 고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 한국명 백수선) 간호사가 오스트리아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한덕수 총리는 이날 대한간호협회 회관 앞의 고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 분향소를 찾아 방명록에 "고인께서 보여주신 고귀한 사랑과 헌신의 삶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적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한 피사렉 간호사는 동창생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 한국명 고지선) 간호사(89)와 함께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봉사하다 고령에 활동이 여의치 않자 2005년 11월 21일 편지 한 장만을 남김고 소록도를 떠났다. 스퇴거는1962년에, 피사렉은 1966년에 각각 한국땅을 밟은 후 40성상을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한국의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하다 돌아갔다.

     
    이들은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한센병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했다. 소록도에서 스퇴거는 '큰 할매'로, 피사렉은 '작은 할매'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피사렉은 특히 '작은 할매'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들의 삶은 정말이지 고귀하고 거룩하다.  

     
     

    마가렛 피사렉과 마리안느 스퇴거의 젊은 시절
    말년의 마가렛 피사렉

     

    한국의 한센병들을 돌본 외국 의료진의 효시는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1867∼1909)과 로버트 윌슨(한국명 우월순, 1880∼1963)이다. 1867년 7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나 햄든 시드니대학과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오웬은 1896년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 미국 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5일 남장로회 선교사 2진으로서 한국의 목포항에 도착했다.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됨에 따라 1898년 유진 벨이 호남 지역의 개척 선교사로 오게 되었고, 이어 오웬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오웬은 곧 유진 벨과 함께 목포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1899년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식 의료소인 목포 진료소를 세워 병자들을 돌보며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이듬해 12월, 제중원 4대 원장 올리버 어비슨을 돕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 조지아나 휘팅을 만나 결혼하였다. 
     
    오웬의 의료 봉사는 목포 유진 벨의 임시 주택에서 시작되었다. 지역 조선인들은 처음에 배타적이었지만 곧 서양인 명의가 왔다는 입소문이 나며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오웬은 1904년, 보다 큰 도시인 광주로 옮겨 의료 봉사를 시작했는데, 여기서도 목포와 마찬가지로 성황을 이루었던 바, 오웬 선교사의 집이 있던 양림천 부근에는 그의 치료를 받으려는 거지와 환자들이 몰려 들어 생활하며 그의 집까지 장사진을 이루었다.
     

     

    양림동 오웬기념각 / 오웬 사후 미국 친지들이 보낸 기금 4,200 달러로 1914년에 세워졌다.
    양림동 오웬기념각 후면
    오웬기념각 안내문 / 클레멘트 오웬이 존경했던 할아버지 윌리엄이 함께 기념된다.

     
    오웬이 돌본 환자 가운데는 당시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던 나병 환자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문둥이로 불리며 환자들 가운데서도 배척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오웬은 그들 나병 환자들을 격리 치료할 수 있는 전문병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한센인을 위한 병원이 세워지길 늘 소망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랄까, 그가 광주로 온 지 5년만인 1909년 자신의 생명과 소망을 맞바꾸는 일이 발생했다.
     
    늘 감염환자와 접촉 속에 고단한 의료활동을 이어가던 오웬은 1909년 급성폐렴에 걸렸다. 이에 당시 광주 제중원 원장이었던 선교사 윌슨은 전보를 쳐 목포선교병원의 의사였던 포사이트를 광주로 급히 불러올렸다. 포사이트는 광주로 올라오는 길에서 중증의 한 여성 나병환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자신의 옷을 입힌 후 나귀에 태워왔는데, 포사이트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웬은 사망한 후였다. 

     
     

    클레멘트 오웬(Clement C.Owen, 1867~1909)
    오웬이 사진이 걸린 양림동문화거리의 어느 집

     

    이후 포사이트는 목포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이 데려온 나병환자를 벽돌 가마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오웬이 사용하던 침대에 눕혀 제중원의 윌슨과 더불어 정성껏 치료하였다. 이는 곧 소문이 났고 그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받은 광주 건달 최흥종(1880~1966)이 선친에게 물려받은 봉선리 땅 1200평을 기부해 나병원을 짓게 하고 자신도 기독교인이 되어 나환자를 돌보았다. 오웬의 아내 휘팅 역시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가 딸들과 함께 늦게 귀국했는데,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인지 1952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오웬의 무덤은 자신이 살던 낮은 뒷동산에 마련되었고, 이곳은 훗날 양림산 선교사 묘지가 되었다.(현 호남신학대 내 선교사묘원) 이후 호남 선교의 선구자였던 유진 벨이 그곳에 나무를 심어 묘원을 가꾸고, 산자락에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세웠다. 그래서 흔히 '죽음의 산'을 '생명의 산'으로 바꾸었다는 평을 듣는데, 유진 벨 역시 한국을 위해 봉사하다 1925년 양림산에 묻혔다. 유진 벨은 얼마 전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을 맡았던 인요한 교수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며, 인요한의 형인 인세반(스티브 린턴) 前 한양대 교수가 1995년 '유진 벨 재단'을 세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양림산 오르는 길, 광주사직도서관 앞의 선교기념비 / 미국 남장로회가 1992년 세웠다.
    선교기념비 부근의 유진 벨 선교기념관
    호남 선교의 근거지 양림교회
    교회 앞의 양림 역사문화마을을 상징하는 종
    양림동 선교사묘원의 오웬과 유진 벨 무덤 / 한문으로 '오목사'라고 쓴 비석이 오웬의 무덤이다. (오마이뉴스 사진)

     
    양림동에서 양림산을 향하는 길의 명칭은 우월순길이다. 우월순은 로버트 윌슨(1880∼1963) 선교사의 한국명이다. 워싱턴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08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와 광주 제중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909년 최흥종이 지은 시설에서 나병 환자 10여 명을 치료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나병 환자 치료에 뛰어들었다. 이후 영국 에든버러에 있는 영국 한센병자협의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격리 수용소와 교회가 딸린 전문 진료소로의 도약을 마련했다.
     
    그러자 이곳으로 전국의 나병환자가 몰려들어 1924년에는 광주나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나병 환자가 56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광주에서는 혐오시설 기피 현상인 님비현상이 일어났고  조선총독부도 대도시 광주에 전염성이 강한 환자들이 몰리는 것을 기피해 여수의 외진 바닷가로 병원을 강제 이전시켰다. 이에 윌슨도 1928년 나환자 600여 명과 함께 여수로 옮겨 갔는데, 그곳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여수 애양원으로, '사랑으로 양을 기르는 동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광주에서 이전할 때 총독부가 이주 비용 가운데 1만 2500달러를 부담했다고 함)
     
    특이한 것은 윌슨은 매우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나병원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내외국인들은 막론하고 거의가 단명했다. 피고름 속에서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환자들을 매일 접하며, 악취 속에 환자들을 수술하거니 돌보아야 하는 근무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축적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은 삶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윌슨은 1908년 한국에 와 1948년 귀국할 때까지 40년을 무탈하게 근무했으며  1963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83세까지 살았는데, 아마도 사냥을 비롯한 나름대로의 취미 생활이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그는 사냥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까마귀, 노루, 여우 등의 사냥감과 함께 왔다. 그리고 그것을 한센인들과 함께 나눠먹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고된 선교사역을 표현한 글을 쓴 적이 없으며 대신 <한국에서의 사냥의 즐거움>이란 글이 훗날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아래는 그 일부분이다. 
     
    겨울이 되면 수백만 마리의 까마귀들이 한국의 남쪽으로 몰려든다. 이들은 한센 환자들에게 음식도 되고 약재도 된다. 또 잡은 까마귀의 날개를 펼쳐서 밭 언저리에 걸어놓으면 까마귀들을 막을 수 있는 좋은 허수아비 재료도 된다. 출몰한 까마귀 떼는 이제 막 자란 보리의 순들을 뿌리째 파헤쳐버리기 때문에 한센 환자들은 보리를 지켜달라고 간청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짐승의 고기라는 것을 잘 안다.... 한국인들이 우리가 잡은 2마리 노루의 피를 달라고 했고,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김이 나는 피를 마셨다. 그 후 간과 허파를 잘라서 소금에 찍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윌슨은 나환자들의 치료 외에도 그들이 재활할 수 있는 방편을 위해 노력하였던 바, 약 300에이커(36만7252평)를 사들여 자활 농장을 운영하도록 했고, 목공 기술 등을 가르쳤다. 아울러 같은 한센인들끼리 가정을 이루어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합동결혼식은 일 년에 서너 번씩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감염이 우려된다고 판단되면 북장로교 선교사 플레처가 운영하던 대구의 미감아(未感兒·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 시설로 보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가정을 꾸리는 일은 한센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재활의 방편이었다.
     
    한센 마을의 운영비는 본인이 3분의 1, 일본 정부가  3분의 1, 나머지는 뉴욕의 나환자협회와 스코틀랜드 나환자협회가 후원하는 비용으로 충당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 여겨진다. 1945년 광복 후 미 군정청은 윌슨을 소록도, 애양원 등 한센인 시설을 총괄하는 군정 자문관에 임명했고, 그의 아들 존 윌슨도 아버지를 이어 한국 땅에서 봉사했다.  
     

     

    광주 호남신학교 내의 우월순 선교사 사택
    2015년에 찍은 우월순 선교사 사택
    우월순 길의 안내문
    당대의 여수 애양원
    워싱턴대 의대 졸업 무렵의 윌슨(R. M. Wilson, 1880~1963)
    멧돼지를 잡아온 윌슨 원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당시의 여성 나환자
    한센인의 결혼식 광경
    1909년의 광주 봉선리 나환자촌
    1905년의 광주 제중원
    광주기독병원 내의 제중원 굴뚝
    광주기독병원 내의 우월순, 포사이트 의사 기념비
     

    아래는 윌슨이 광주 나병원 원장으로 있을 때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보낸 편지라고 하는데, 여러가지로 눈물 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저는 한센 환자 604명이 수감된 나환자촌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입니다 어느 날 저는 길가에서 한센 환자가 양배추 잎으로 상처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환자는 더러운 신문지에 침을 뱉어서 자기 상처에 드레싱 하듯 붙여 놓더군요. 세상에 누더기 옷감이 넘쳐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09년, 불쌍한 여성 한센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저희를 찾아왔지만 당시에는 한센 환자를 위한 방이 없어 구들장 위에 환자를 눕히고 몇 주 후 숨을 거둘 때까지 먹이고 보살펴주었습니다. 이 환자부터 시작해서 이제 우리 환자촌은 600명을 수용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곳에 온 사람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 환자 중에서 300명 정도는 수술 드레싱을 받아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여러분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싶어 가슴이 철렁하시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나환자들의 상처에 드레싱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천이 많이 필요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낡아서 못 쓸 옷감을 보내주십시오. 이런 낡은 옷감이 훌륭한 드레싱 재료로 둔갑합니다. 저희에게는 이 천들을 소독할 수 있는 증기 소독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주실 일은 낡은 천을 모아서 11파운드 이하의 소포로 묶어 ‘한국 광주 나환자 병원’ 앞으로 보내주시는 겁니다.

     

    한센 환자들 중에 펠라그라(pellagra·비타민결핍증)를 앓는 경우가 몇몇 있는데, 이 문제는 식단을 조절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온갖 끔찍한 사진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펠라그라 병을 앓는 한센 환자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너무나 끔찍해서 묘사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우리같이 건강한 사람들은 매일 잊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 땅 1평방 인치당 5000만 마리 세균이 득실대는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리지 않고 멀쩡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는 갈라진 발을 실과 바늘로 꿰매고 있는 환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환자는 마치 낡은 신발을 수선하듯 자기 발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덕분에 틈이 더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열흘에 한 번 정도는 다시 바느질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실이 닳아서 뜯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센 환자들에게는 이런 게 정말 흔한 일입니다. 낡은 신발을 보내주면 한센 환자들이 발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에서 뉴욕 시장이 조촐한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는데, 그 비용이 2만 5000달러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비용이면 700명의 한센 환자들의 1년 식사비와 치료비, 기타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습니다. 또 이 돈이면 한센 환자들이 스스로 경작해 식량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농장을 살 수도 있습니다. 

     
    ※ 위 편지글의 출처 : 양국주가 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