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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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서대묘 사신도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16. 00:04
7개월 간의 대규모 개편 끝에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과 고구려실이 2월 14일 재개관했다. 기다리던 개관이라 일반개관일인 다음 날 곧바로 찾았다.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고구려실이었다. 위상에 비해 턱없이 작았던 고구려실이 약 2배로 확장되고 한번 도 공개되지 않았던 고구려 유물이 진품으로 전시된다는 사전 보도도 기대가 됐거니와,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강서대묘의 사신도(四神圖)를 다시 보게 되어 기뻤다. 강서대묘 사신도가 전시된 공간에 들어서면 흔히 말하는 '기(氣)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는 1907년 한 프랑스 학자가 중국 집안에 위치한 연화문총 고구려 고분에서 처음 발견한 후 이를 학계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학계에서는 도교의 영향으로 등장한 고급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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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백정의 저울과 레이디 져스티스의 눈가리개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2. 13. 22:33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노예해방 선언문 사본이 뉴욕 경매시장에서 208만5천달러(약 24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보도한 10년 전 기사를 보게 되었다. 노예해방 선언문 사본 중 역대 두 번째로 높게 매겨진 값이라는데, 최고가에 팔린 사본은 고(故)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 소장했던 것으로 380만달러(약 44억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남북전쟁(1861~1865) 당시 수백만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는데 법적 근거를 제공한 노예해방 선언문은 모두 48부의 사본이 제작되어 각지로 배포되었다. 문득 우리나라의 노예 해방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미국처럼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893년(고종 30)까지는 조선에 노예가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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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로 시집간 고구려 여인 문소황태후 고조용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9. 22:49
앞서 북위(北魏, 386∼534)를 3회에 걸쳐 집중 포스팅한 적이 있다. 북위라는 나라가 중국 역사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지만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의 역사·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까닭이다. 이 나라의 이름은 본래 위(魏)였으나 조조의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로 불린다. 하지만 조씨의 위나라는 단명한 반면 북위는 250여 년간이나 장수했다. 조씨의 위나라는 동방의 고구려와 충돌이 잦았지만 북위는 고구려 ·백제와도 친했다. 그렇듯 친밀한 관계가 오히려 문제가 된 적도 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관계가 무난했던 북위는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는 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침공에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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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노동 - 심대윤과 정약용의 경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2. 7. 21:58
안대회 교수(성균관대 한문학과)의 말과 글은 귀와 눈을 청징하게 해 준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지는 무척 오래됐다. 그래서 일찍이 그가 언급한 선비들의 삶을 흉내 내고자 (푸른역사)라는 책을 구입해 읽었다. 하지만 태생이 천격(賤格)이어서 인지 흉내 내지 못할 거리가 느껴졌고 혹간 공감을 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무튼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아주 흉내낼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니 공통분모도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유람' 같은 부분으로, 그에 관한 글귀들은 속속 들어와 박힌다.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하는 것과 같다.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실은 충분히 익히고 또 익히는 데 핵심이 있다. 굽이굽이 환하게 파악하고, 그 자태를 또렷하게 간직하고, 그 정신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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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동 정양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2. 5. 22:22
서울 성동구 금호동은 지금은 유명 연예인이 많이 거주하는 부촌이 됐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서울의 내로라는 빈촌의 하나였다. 특히 인구밀도가 엄청났다. 이유는 분명 있었다. 이른바 문안(사대문 안)이라 불리는 서울의 중심지와 가까웠고 그에 반면 지가는 헐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거주지가 되었고,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맞물리며 필연적으로 판자촌 달동네가 생겨났다. 도심에 가까운 편임에도 지가가 헐한 이유는 주택지의 대부분이 산기슭에 의지해 형성되었던 까닭으로, 금호동에 가기 위해서는 약수동으로부터 가파른 금호동 고개를 넘거나, 왕십리로부터 논골 고개를 넘거나, 한남동 고개를 넘어야 했다. 넓게는 남산 자락, 좁게는 해병대산 · 대현산(수도국산) · 매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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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10성을 설치한 태조왕 고궁(高宮)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3. 20:53
오늘은 5대 모본왕에 뒤 이은 6대 태조왕의 서방 경략(經略)을 이야기를 하려 한다. 태조왕에 관한 기록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3년(AD 55년) 봄 2월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는 의 내용이다. 보통 요서는 랴오허(遼河) 강의 서쪽으로 비정된다. 그 동쪽은 당연히 요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배우기를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했다고 배웠고, 이것은 고구려의 확장에 일획을 긋는 큰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서안평은 내내 지금의 단둥시(丹東市) 일대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이율배반이다. 앞서 말한 대무신왕과 모본왕이 지금의 하북성·산서성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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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서성까지 진출했던 고구려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1. 21:39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의 북경과 천진시, 하북성 일대까지 미쳤다는 앞서의 포스팅에 대해 거의 인격모독적인 댓글로써 저격한 분이 있었다. 필시 중국인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험한 말을 할 턱이 없기에. 까닭에 답글을 생략하고 그냥 댓글을 지워버렸다. 앞으로도 중국인들로 여겨지는 글이 올라온다면 고민 없이 곧바로 삭제시킬 생각이니 애써 댓글을 달지 말길 바란다. 차제에 말이거니와 사실 고구려의 영토는 하북성뿐 아니라 산서성에도 미쳤다. 물론 사료에 기인한 주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말한 유주자사 진(鎭)의 경우처럼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광개토대왕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5대 모본왕(?~53) 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동명성왕의 건국 이후 2대 유리왕부터 정복사업을 시작하였던 바, 유리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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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맞았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불상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31. 18:07
위 황금헬멧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유물이다. 이 유물은 기원전 5세기 후반 루마니아에서 제작된 일렉트럼(금·은·구리 합금) 투구로 1926년 루마니아 코토페네슈티 마을에서 발견돼 지금껏 '코토페네슈티 헬멧'으로 불리고 있다. 그곳 숲 속에서 양치는 농부의 아들에 의해 발견된 이 헬멧은 아이가 2주 동안 쓰고 다니며 놀았는데 이때 일부 부품이 떨어져 나가며 본래의 원형이 상실됐다. 가치를 모르기는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니 헬멧은 뒤집어져 닭의 물통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이 헬멧은 가치를 알아본 골동품상이 30,000레이(농부의 30년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라 함)에 매입했고, 루마니아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재매입한 후 1970년대부터 루마니아 부쿠레시티 국립역사박물관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