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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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방 인물사 II - 류성용 · 이항복 · 이덕형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9. 23:14
이제 깡패 얘기는 좀 건너뛰고 명례방 남산 기슭에 살던 선비들을 살펴보자. 앞서 남산골 샌님(생원님)을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남산 인근에 생원들만 살았을 리 없다. 아니 오히려 정승 판서가 수두룩했으니 대표적인 인물로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들 수 있다. 그가 살던 시절은 요즘과 매우 비슷해 정치가들이 좌우 붕당을 이루어 서로 잡아먹을 방법만 골몰해 대었던 바, 1592년 봄 왜군의 배가 부산 앞바다에 새까맣게 밀려들 때까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부산 초량왜관에 살던 왜인들은 히데요시가 전쟁 준비하고 있는 것을 당연히 알았다. 만일 전쟁이 나면 자신들의 생업이 끊길 터, 그들은 조선 관가에 일본의 침략 의지를 지속적으로 알려 대비할 것을 권했다.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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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방(명동) 인물사(史) I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6. 23:16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명동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명례방(明禮坊)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조선시대 명례방은 절대 비싼 땅이 아니었고 오히려 값이 헐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첫 거처가 되었다. 명례방 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은 진고개로 현재 명동성당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진고개에 사람이 몰렸던 것은 남산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남산동천 (南山洞川)이 있어 물을 구하기 용이했던 까닭이리라. 반면 남산동천은 비가 오면 자주 범람하였던 바, 길을 질퍽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진고개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바로 그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지가(地價)를 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그 진 땅에서 짚신으로 생활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터이다. 그래서 조금 형편이 나은 자들은 나막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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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과 영희전(永禧殿)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4. 19:43
명동에 일을 보러 갔다가 생각나는 것들을 두서 없이 적어본다. 명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명동성당일 터, 그것이 이곳에 세워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재론하자면,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인 명동성당은 1785년 을사 추초 적발사건 때 붙잡혀 순교한 이 땅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를 기려 1892년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그의 집 부근인 종현(鐘峴) 언덕에 세웠다. 1898년 완공한 고딕양식의 이 성당 지하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의 유해가 안치됐다. 을사 추초 적발사건은 을사년(1785년)에 추조(秋曹, 형조의 다른 이름으로 형벌이 가을 서리처럼 매섭다 하여 붙여진 이칭)에서 명례동 종현(鐘峴)에 있는 김범우의 집을 급습해 다수의 천주교도를 붙잡아 간 사건이다. 계획된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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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엘레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3. 00:27
'제9회 서울 우수한옥'으로 지정된 가회동 수경재를 찾아가다 계동길 100-8 일대의 한옥에 들렀다. 북촌 답사꾼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곳 한옥들은 사실 '계동 48-12번지 건물군'이라는 타이틀로 이미 오래전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됐다. 가회동 상업가로 막다른 골목에 있는 이 건물군은 주거용 한옥으로는 드물게 2층으로 건축되어 있는데, 필시 그것이 미래유산 등록 사유일 것이다. 대지면적 82.6㎡에 연면적 36.36㎡의 2층 목조 한옥을 중심으로 한 몇 채의 기와집 스카이 라인은 언뜻 지나치기 쉬우나 한 번 발견한 사람에게는 내내 안복(眼福)을 선사한다. 이 건물군은 지금은 상업시설로 변모한 가로변의 한옥들과는 다른 입지와 구조를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평가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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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란 갑신정변 비상계엄 & 탄핵-또 다시 격랑의 장소가 된 재동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2. 21. 21:52
서울 종로구 재동이 또다시 격랑의 장소가 되었다. 재론하자면, 피비린내 진동하던 서울 재동의 역사는 조선초 계유정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냈다. 이에 그는 한명회, 권람, 홍윤성, 양정 등의 심복들과 1453년 계유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의 권신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유명한 계유정난이다. 이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왕명을 빙자해 권신들을 입궐시켜 살해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살생부(殺生簿)로 여기 이름이 적힌 자는 다 죽었다. 일환으로써 한명회는 자객을 보내 재동과 그 인근에 살던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허후, 이우직 등의 문무대신을 살해했는데, 재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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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의 건축과 주한 프랑스 대사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8. 23:24
건축가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건축에 눈을 뜬 것은 1939년 요코하마(橫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하면서부터로서, 그의 지도교수가 에콜 데 보자르(cole des Beaux-Arts, 파리미술학교)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라는 사실은 주목할 부분이다.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중업은 마츠다 히라다(松田平田)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건축실무를 익혔는데, 그가 최초로 참여한 조선 건축은 1944년 노동자들의 합숙소 및 집단 서민 주택단지로 조성된 인천과 서울 등지의 조선영단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김중업은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쳤는데, 특이한 것은 당시 그가 시 쓰기를 즐겼다는 점이다. 훗날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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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의 큰도둑과 작은도둑 / 연희동 오장경 사당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7. 01:31
1882년 구식 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막을 힘이 없었다. 이에 고종의 별다른 고민 없이 다급히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청국은 이에 응하여 그해 7월 광동수사제독 오장경이 인솔하는 4,50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소공동의 남별궁(지금의 조선호텔 자리)·동묘·용산 등지에 주둔하고 곧 폭동을 진압했다. (이때 오장경이 청군의 보급책으로 데려온 65명의 중국 민간인이 우리나라 화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오장경은 1884년 5월,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에게 일부 병력을 맡긴 뒤 귀국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만주 금주(金州) 사령으로 부임하였으나 심한 여독 때문이었는지 금주 도착 후 곧 사망했다. 오장경의 사망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조선에서는 사대주의자들이 사당 건립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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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리화력발전소와 부군당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4. 23:49
서울 영등포구 당인동 동명은 '당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당말'은 당나라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이여송 군대가 서울발전소(옛 당인리 발전소) 일대에 진을 친 데서 유래되었다. 주둔한 군대는 명나라 군대지만 중국을 상징하여 부르는 당(唐)이 명(明)을 대신한 것이다. 위 이야기의 업그레이드 버전도 있다. 이때 온 명나라 군사 중의 한 명이 이곳에 살던 조선 처녀에게 반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 처녀는 그 중국인을 마땅치 않아 했으니, 오히려 한양에 과거를 보러 왔던 어떤 부유한 경상도 선비에 넘어가 경상도로 이사 가고 말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비는 유부남이었던 바, 처녀는 별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