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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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임신서기석 이두문과 기독교의 하나님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4. 11. 27. 12:23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1934년 5월 경주 북쪽의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 터 부근 언덕, 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자리에서 발견된 돌로, 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맹서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과거에는 이를 새긴 사람이 신라의 화랑이라고 가르쳤으나 사실 화랑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바, 지금은 신라의 두 젊은이라고 설명된다. 글자는 냇돌의 자연석에 5행으로 74자를 새겼다. 돌의 크기는 작은 편으로 길이는 약 34 cm, 너비는 윗부분이 12.5 cm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두께는 약 2 cm이며, 1행 18자, 2행 16자, 3행 14자, 4행 16자, 5행 10자로 되어 있는데, 맨 처음 임신년(壬申年)이라는 간지가 적혀 있어 '임신년 맹서를 기록한 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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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에서 세상 떠난 이재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4. 11. 25. 22:02
앞서 원태우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양 석수동 현장을 찾아보았다. 언급한 대로 이 일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를 처단하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그런데 안중근에 앞서 이토를 처단하려는 또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던 바, 그가 바로 이재명이다.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날(1910년 9월 30일) 는 '교수대에서 세상 떠난 이재명'이라는 제목으로 아래 사진과 함께 그의 의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실었다. 하지만 이재명 의사가 처형을 당한 것은 이토를 단죄하려는 사건 때문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기 때문으로, 이에 관한 내용을 당시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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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이등박문을 저격한 원태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4. 11. 24. 22:11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문에 서명 날인함으로써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해서는 앞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과 고종'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당시의 분위기만을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7일 밤 8시, 덕수궁 중명전에 는 참정대신 한규설 · 외부대신 박제순 · 내부대신 이지용 · 법부대신 이하영 · 학부대신 이완용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 군부대신 이근택 ·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대한제국의 대표로, 일본국 전권특사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일본국의 대표로 마주 앉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제한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을사조약에 관한 협상을 하기 위함이었다. 협상은 자정을 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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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수 반수교에서 흥덕사 · 증주벽립까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20. 23:07
2020년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성균관과 반촌'이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본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때는 빈촌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음에도 3d로 생동감 있게 재현된 반촌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고 감명 깊었다. 그래서 주체 측에 부탁해 아래의 전시 포스터를 한 장 얻어와 방에 붙여 놓고 감상하기도 했다. 반촌은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지만 한자로 풀면 금방 이해가 간다. 여기서 반은 '학교 반(泮)' 자다. 즉 반촌은 요즘말로 대학촌이며 여기서 말하는 대학은 당연히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조선 건국 후 곧바로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아래 성균관대학교 탕평비각 앞 표석에는 1398년(태조 7)이라는 설립연도를 각자해 놓았다. 그리고 근자에는 설립 600주년 행사를 갖기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실소할 일이다. 지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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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동천 장경교에서 반궁천 서반수 빨래터까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18. 18:40
장경교(長慶橋)는 종로구 연건동과 이화동 사이 대학로를 흘렀던 흥덕동천의 대표적 돌다리로, 정조가 임금이 되던 해인 1776년 여름, 경모궁(景慕宮)에 행차하기 위해 만들었다. 길이는 10.5m, 폭은 6m 정도였다. '장경'(長慶)은 '경사와 상서로움이 천만년 지속된다'는 뜻으로서, 장생전(長生殿) 앞에 있다 하여 장생전교 혹은 장교로 불리기도 했다. 장생전은 왕실의 관짝을 만들어 국상에 대비하던 관청으로 1444년(세종 26) 설치됐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옛 창경궁 원림(園林)인 함춘원 자리에 경모궁을 지었다. 아울러 경모궁으로 가는 첩경을 가로막은 창경궁의 담장을 헐고 월근문(月覲門)을 내었다. 정조는 매월 초하루에는 이 문을 통해 사도세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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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와 가을을 그린 도천 도상봉미학(美學) 2024. 11. 15. 21:40
도천(陶泉) 도상봉(1902~1977)은 1902년 함경남도 홍원군 신익면 남당리(현 홍원군 남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홍원군은 우리에게는 낯선 지명이지만 산과 평야와 바다가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런 환경이 도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그는 1916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으로부터 따로 그림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도천은 학생시절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일어난 독립선언 행사에 참가했고 이어 계속 만세시위에 참가하다 3월 5일에는 남대문 역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 일본에 건너간 그는 메이지대학 법과에 진학했는데, 부모님의 바람도 있었지만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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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빛을 보지 못한 시카고학파의 박인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14. 22:49
1세대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 ~ 1943)은 비교적 알려진 반면 (☞ '종로에 남은 박길룡의 건축물') 박인준(朴仁俊, 1892 ~1974) 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 블로그에서도 '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에서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니, 편의 대로 옮겨 싣자면 다음과 같다. .... 윤치왕은 1982년 말 여의도 수정아파트에 사는 큰아들 윤도선(서울대 산부인과의)의 집에서 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는데,(향년 87세) 이후 그가 살던 가회동 1-10번지 집은 부근 가회동 1-6번지 윤치창의 집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매입되어 대사관 사택으로 이용되었다. 이 두 집은 1927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의 일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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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암 이벽은 정말로 순교했을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1. 13. 01:07
1635년 4월 10일 만주 선양에 도착한 소현세자가 처소인 심관(審館)에만 머물지 않고 북경으로 가 명나라 침입을 참관하고 서역 원정에도 강제 참전한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실권자 도르곤이 유화책으로써 소현세자를 다시 북경으로 불러내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을 소개시켜 준 사실도 더불어 말한 바 있다. 이 사실은 일본인 종교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 1918 ~ 1999)가 아담 샬의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자신의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실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또 남당의 신부 황비묵(黃斐默, 1830~1909)도 자신의 저서 에서 두 사람의 만남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