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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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이강공 탈출 사건과 대동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21. 20:53
1919년 11월 9일, 한중 국경인 중국 안동(현 단동시)에서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흔히 이강공(李堈公) 사건, 혹은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라 불리는 이 일은 비밀 항일 결사단체인 대동단이 고종의 셋째 아들 이강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붙잡힌 사건을 말한다. 대내외에 큰 충격을 준 이 미증유의 사건을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은데, 그 전에 이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대동단에 대해 알아 보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 같다.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 또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라고도 부르는 대동단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항일 비밀 결사체로서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조직됐다. 대동단은 귀족, 정·관계, 종교계, 상공인, 청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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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동 죽동궁에서 일어난 사건 1.2.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20. 20:24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번지 아미드호텔 일대에 있던 죽동궁(竹洞宮)은 조선 후기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와 부마인 동녕위 김현근(金賢根, 1810~1868)이 살던 집으로, 현재 표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건평 3천 평이 넘았던 죽동궁은 1030년대 필지분할하여 매각된 뒤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아래 1932년 12월 25일자 에 실린 사진은 관훈동 198-1번지에 잔존하던 죽동궁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 집의 원래 이름은 '죽도궁(竹刀宮)'이었다. 김현근이 큰 병에 걸렸을 때 행한 무당굿이 오래 지속되며 무당들의 대나무 칼 춤 소리가 이 집의 별명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현근 사후 집은 양자 김병찬과 손주 김덕규에게 대물림됐으나 김덕규가 후사 없이 요절하자 민왕후가 왕실 재산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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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신화가 없는 백제, 그러나 동명왕 신전은 있었다.초기 백제를 찾아서 2024. 10. 18. 17:41
가야를 포함한 고대 국가 가운데 백제는 건국신화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가야의 천강(天降)신화, 난생(卵生)설화는 모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 신화나 설화들은 '재미'라는 자체 특성으로 인해 언제 들어도 흥미로우며 한편으로는 분석할 필요까지 따른다. 이를 테면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것과 상당 부분 겹치는데, '동명'과 '주몽'을 정확히 구별하기 힘든 서사다. 참고로 부여의 건국신화는 아래와 같으며, 이 내용은 우리나라 사서가 아닌 AD 60년 후한 왕충(王充)이 쓴 에 기록되어 있다. 북이(北夷, 북쪽 오랑캐)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비(노비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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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구려의 국경선이기도 했던 안성 도기동초기 백제를 찾아서 2024. 10. 16. 00:23
경기도 안성시 미양로 866에 위치한 도기동 목책지(木柵址) 유적이 한때 백제와 마한의 국경선이었다는 사실을 앞서 밝힌 바 있다.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온조왕은 BC 5년(온조왕 14) 정월 하남 위례성에 정도한 이래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갔던 바, AD 19년 가을에는 웅천(熊川)을 넘어 목책을 설치했다가 마한 왕의 따끔한 질책을 받는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의 기록을 다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온조왕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책을 만들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넌 후 발을 디딜 곳이 없었을 때, 우리가 동북 1백리의 땅을 갈라 주어 편안하게 하였으니 왕을 대함에 후하지 않았다 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마땅히 갚음이 있어야 옳겠거늘, 지금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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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마한의 국경선을 가다.초기 백제를 찾아서 2024. 10. 13. 23:07
백제의 첫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가는 우리 역사의 오랜 수수께끼로, 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위치가 갑론을박되다 지금은 서울 풍납토성으로 거의 굳어졌다. 기원전 18년 고구려로부터 남하한 백제 유민의 영도자 온조는 처음에는 하북(河北)에 정도하였다가 기원전 5년(온조왕 14) 정월에 하남(河南)으로 천도를 하였던 바, 이것이 하남 위례성이다. 하남 위례성은 이후 480년 동안(BC5~AD475) 수도로서의 역할을 굳건히 하였으나 475년 음력 9월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함락돼 버리니 는 그 마지막 날을 백제의 기록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니, 백제는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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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이태원 참사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4. 10. 9. 22:54
이태원 할로윈데이의 비극이 발생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불과 2년 전의 일이니 그 비극이 무엇인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2022년 10월 29일 그날 밤의 최종 사상자는 사망 159명, 부상자는 195명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20대 청춘이었으며 외국인도 26명 있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그 좁은 장소(18.24㎡)에서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좁은 장소라는 말은 어폐가 있을 수 있겠다. 장소가 좁고 비탈졌던 까닭에 밀림(PUSH)이 일어나 사람들이 쓰러졌고, 이후 계속 포개지는 '연쇄 깔림'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장기 파손과 질식사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래서 골목 입구, 위 푯말 있는 쪽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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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에 있던 관상감과 남이 장군의 사(死)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0. 8. 00:17
조선후기의 지리지 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계동의 유래는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이던 제생원(濟生院)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훗날 음이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 되었다가 1914년 동명 제정 때 계동으로 등록된 것이다. 제생원은 세조 때 혜민서와 통합되었다. 또 계동에는 국초(國初)에 설치한 천문·지리·기후 등을 관찰하는 서운관이 있었다가 마찬가지로 세조 때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대 계동사옥 마당에 있는 관천대(觀天臺)는 조선시대 관상감의 흔적이다. 관천대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는 높은 장소'로서 관상감 근무자가 천문을 살피던 곳이다. 과거 이 위에는 간의대(簡儀臺)가 놓여 있었고 소간의(小簡儀)라고 하는 관측기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간의대를 오르기 위한 계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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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과 필적했던 고미술품 애호가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0. 6. 01:16
앞서 강화도 고려산 최우 무덤에서 나온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고려청자의 최고봉', '청자의 왕중왕'으로 불리는 이 매명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 넘어갔고 다시 간송 전형필이 거금 2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쌀 1가마가 16원,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천원이던 시절이었다. (☞ '최충헌, 최우,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 아파트 2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이 매병은 2013년 500억원의 보험료가 책정됐다) 1940년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할 때 지불한 1만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자세히 보면 이 매병에는 도굴꾼의 탐침봉(도굴꾼들이 땅을 짤러보는 데 쓰는 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