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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신화가 없는 백제, 그러나 동명왕 신전은 있었다.초기 백제를 찾아서 2024. 10. 18. 17:41
가야를 포함한 고대 국가 가운데 백제는 건국신화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가야의 천강(天降)신화, 난생(卵生)설화는 모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 신화나 설화들은 '재미'라는 자체 특성으로 인해 언제 들어도 흥미로우며 한편으로는 분석할 필요까지 따른다. 이를 테면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것과 상당 부분 겹치는데, '동명'과 '주몽'을 정확히 구별하기 힘든 서사다.
참고로 부여의 건국신화는 아래와 같으며, 이 내용은 우리나라 사서가 아닌 AD 60년 후한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기록되어 있다.
북이(北夷, 북쪽 오랑캐)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비(노비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여자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아이의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진수의 <삼국지>, 위나라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서 <위략(魏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쓰여 있는데, 다만 북이의 나라 이름이 고리국(高離國)이라는 것이 다르며, 5세기에 편찬한 범엽의 <후한서(後漢書)>에는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7세기에 편찬한 <북사(北史)>에는 백제국 역시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탁리국 · 고리국 · 색리국 · 북부여가 같은 나라로 여겨지며,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우리나라의 근원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이나, 왕실의 성을 부여씨로 삼은 것, 538년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긴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것이 모두 백제와 북부여와의 연관성을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이를 볼 때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들보다는 부여의 시조 '동명'과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의 추모(혹은 주몽)를 동명왕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중국 사서에서 말하는 동명은 주몽과 다르다. 그럼에도 '광개토대왕비'나 '모두루 묘지명'에 나오는 추모왕의 이야기가 동명왕 설화와 상당 부분 닮은 것은 고대의 영웅 '동명'에 대한 오마주쯤이 될 것 같다.
혹자는 '동명'이 특정 인물을 가리키기보다는 부여족 나라에서 각각의 건국 시조를 모두 '동명'이라 부르는 범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나, 동의하기 힘들다. 냉정히 말하자면 고구려의 건국자 추모(주몽)가 동명왕을 사칭했을 가능성이 더 현실에 가깝다. (해방 후 북한의 김성주가 정권 수립과정에서 낮은 인지도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이름을 빌렸듯)
다시 말하지만 동명은 부여의 시조이고, 추모는 고구려의 시조이다. 백제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으니 남으로 이주한 온조는 자신이 동명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있고(고전기·古典記), <삼국유사/남부여 조>에도 <고전기>를 인용해 "백제의 시조 온조는 동명의 셋째 아들이다(始祖溫祚乃東明三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삼국유사>의 기사는 현재 전하는 온조 전승으로서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따라서 백제는 건국신화가 따로 존재할 수가 없다. 백제의 뿌리가 되는 부여를 세운 이가 동명이고 백제를 세운 온조는 그 아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조는 부여족을 이끌고 남하해 한강 유역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던 바, 천강설화나 난생설화가 구성되기 힘들다. 일본측 사서인 <속일본기>에서도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都慕=동명의 음차로 여겨짐)대왕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적고 있을 뿐 국조(國祖) 온조왕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백제의 선조는 애오라지 동명왕인데, 실제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동명 묘(東明廟)를 설치하고 동명 묘에 제사를 지내는 기사가 수차례 등장한다. 그런데 1999년 서울 풍납토성 경당유적지* 발굴에서 동명 묘, 즉 동명왕의 신전으로 여겨지는 곳이 발견되었다.
* 여기서 경당은 고구려 때 각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으로 평민층의 미혼 남자를 모아 문·무(文·武)를 가르쳤다는 그 경당(扃堂) 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단지 그곳에 존재하던 연립주택(경당연립)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이 건물 터는 발견 당시 '呂'(여)자 형 건물지로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하늘에서 보았을 때 呂자 형태의 특이한 모양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굴 당시 남쪽의 작은 □자만 확인되었고(동서 5.2m, 남북 6.2m) 북쪽의 후실 큰 공간은 동서 18미터, 남북 13미터에서 터파기를 멈춰야 했다. 뒤쪽에 연립주택이 자리하고 있어 더 이상 진행되면 주택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실 공간은 모래 땅을 판 후 1미터 정도의 뻘흙으로써 직사각형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기초 주변에 도랑을 두르고 내부에는 돌을 깨 형태를 갖춘 후 다시 숯으로 채웠다. 이와 같은 기초 공법은 '정결'(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 발굴에서도 이곳에서는 아무 것도 출토되지 않았는데 늘 깨끗이 청소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짐작되었다. 이 건물은 이후 백제 사당지, 혹은 경당지구 44호 건물지로 불려졌다.
반면 44호 건물지 앞 창고지에서는 제사용으로 쓰여진 듯 보이는 말 머리 뼈와 소 머리뼈, 곰의 중수골, 멧돼지의 하악골을 비롯한 22개체의 동물 뼈가 발견됐고 기타 많은 토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즉 이곳은 단순한 쓰레기장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사용한 그릇과 제물 등을 처리한 폐기장으로 분석됐다. 위 지도의 101호와 196호 건물지로서, 특히 101호 건물지에서는 고대 중국 동전인 오수전(五銖錢), '直'(직)이라는 글자를 새긴 전돌(벽돌), 높이 84㎝에 입지름 73.8㎝에 이르는 초대형 항아리가 발견됐다.
이로써 경당지구 44호 건물지는 시조 신의 신전, 즉 동명왕의 사당일 개연성이 더욱 짙어졌는데, 개인적 뇌피셜로는 사당 앞의 작은 건물(呂자 형 건물지의 앞 부분)은 본채의 부속 건물이 아니라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의 사당일 가능성이 짙다. 따라서 44호 呂자 형 건물지는 단독적인 건물이 아니라 두 채의 건물이 다리로써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소서노는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를 이끌어 남하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녀는 고구려 주몽 전승에서 보이는 주모의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柳花)와 그 성격이 유사한 지모 신(地母神)적인 존재로서,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17년 조에는 "묘(廟)를 세워 국모(國母)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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