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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마한의 국경선을 가다.
    초기 백제를 찾아서 2024. 10. 13. 23:07

     
    백제의 첫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가는 우리 역사의 오랜 수수께끼로, 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위치가 갑론을박되다 지금은 서울 풍납토성으로 거의 굳어졌다. 기원전 18년 고구려로부터 남하한 백제 유민의 영도자 온조는 처음에는 하북(河北)에 정도하였다가 기원전 5년(온조왕 14) 정월에 하남(河南)으로 천도를 하였던 바, 이것이 하남 위례성이다.
     
    하남 위례성은 이후 480년 동안(BC5~AD475) 수도로서의 역할을 굳건히 하였으나 475년 음력 9월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함락돼 버리니 <일본서기/웅략천황 20년조>는 그 마지막 날을 백제의 기록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니, 백제는 결국 위례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百濟記傳 蓋鹵王 乙卯年冬 貃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그리고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조>는 하남 위례성의 마지막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ㆍ재증걸루(再曾桀婁)ㆍ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고이는 두 글자로 된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탈출해 도망가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뒤쫓아 체포해 말에서 내려 절을 하게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었으며,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이상을 보면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은 북성과 남성의 이성(二城) 체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또한 이와 같은 이성 체제로 도성을 운영했다) 즉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두 성으로, 개로왕은 고구려군에게 풍납토성 함락 후 몽촌토성으로 옮겨 저항했으나 결국 성을 버리고 도망치다 붙잡혀 장수왕의 본진이 있는 광장동 아차산성에서 참수되고 만다. 

     

     

    풍납토성 북 성벽
    풍납토성은 총 둘레 3.5킬로미터, 최대 너비 60미터, 최대 높이 13.3미터, 면적 약 24만 평의 방대한 규모의 도성이었다. 현재는 2.1킬로미터의 성벽만 남아 있다.
    풍납토성 북문지
    몽촌토성 동북 성벽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본 몽촌토성 / 몽촌토성은 총 둘레 2.7킬로미터, 높이 12~17미터, 내부 면적 67,400평의 규모였으며 2천 호 정도의 가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 뒤로 아차산이 보인다.
    몽촌토성 서문지 / 개로왕이 달아나다 붙잡힌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서북쪽으로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로왕이 참수된 아차산성
    몽촌토성 서쪽 해자 /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사진
    몽촌토성 북문지 /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한 너비 290~310센티미터, 길이 8미터 정도의 백제시대 도로 흔적이 발견됐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궁'(宮) 자 토기 / 2016년 토성 북문 터 안쪽의 구덩이에서 발견됐다. 몽촌토성에 백제 왕궁이 존재했음을 실증하는 유물로 손꼽힌다.
    몽촌토성 부근에서 발견된 4세기 백제 우물 / 올 봄(2024. 2. 26) 방이동 52번지 공사현장에서 발견됐다. 한 면의 길이 95~110센티미터 정도이다.
    발견 당시의 사진
    우물에서 수습된 백제토기
    백제 우물이 발견된 방이중학교 옆 공사현장

     
    이상을 볼 때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했던 이른바 한성백제는 지금의 서울 동부를 수도로 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뿌리도 깊어서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서 언급한 이래 한치윤의 <해동역사>, 그의 조카 한진서의 <해동역사속(續)>에서도 위례성의 위치로 비정됐고, 이후 고산자 김정호,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 천관우, 이병도, 윤병무 교수 등의 꾸준한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일대가 하남 위례 신도시라고 불린다.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하남시 이성산성
    이성산성 내의 대규모 장방형 건물지
    제천의식지로 추정되는 이성산성 9각 건물지

     
    그외 충남 천안 직산지역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충남 직산은 백제의 수도를 찾으라는 세종대왕의 지시에 당대의 학자들이 백제의 수도로 지명한 곳이기도 한 바, 역사상으로는 가장 유서 깊은 주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충남 직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나, 어쩌면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의 기록에 가장 부합되는 장소일는지도 모른다.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온조왕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책을 만들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넌 후 발을 디딜 곳이 없었을 때, 우리가 동북 1백리의 땅을 갈라 주어 편안하게 하였으니 왕을 대함에 후하지 않았다 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마땅히 갚음이 있어야 옳겠거늘, 지금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함이 없다 말하면도 크게 성과 해자를 만들고 우리의 경계를 침범하니 이에 무슨 짓인가?" 했다.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그 책을 허물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한성백제박물관의 연표 / 온조왕 24년 남하하여 웅천책을 설치했다 철수했다는 기록을 넣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하남 위례성=천안 직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웅천을 지금의 공주로 보면 '동북 1백리의 땅을 갈라 주어 살게 했다는 곳'은 현재의 직산일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반문한다. 따라서 백제의 첫 도읍인 하남 위례성은 천안 직산이라는 주장인데, 공교롭게도 이곳을 그린 옛 지도에는 위례성이 떡하니 표시돼 있다. 그리고 그 위례성은 지금도 존재하며 삼족토기 등의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었다고도 한다.   
     
     

    <조선팔도지도>에 표시된 직산 위례고성
    서울대 규장각 고지도 속의 직산현 위례성
    백제 삼족토기 / 몽촌토성 출토품

     
    여기서 웅천책이라 하는 것은 웅천이라고 하는 곳에 친 목책(木柵)을 말한다. <삼국사기> 등의 고문헌에는 백제 관련 성책(城柵)과 목책에 관한 기록이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많이 출현하는 바, 백제군의 중요한 진법(陳法)이나 전법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백제가 웅천 변에 쳤다는 목책은 필시 아래와 같은 모양새였을 것이다. 
     
     

    몽촌토성에 재현된 백제 목책

     
    또 웅천은 공주의 옛 이름이므로 위의 주장은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위 주장은 마한의 수도가 공주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바, 이를 증명할 만한 무엇이 필요할 듯하나 아직 그런 것은 없는 듯하다. 아래 지도들을 보면 마한의 대표국가였다는 목지국은 오히려 직산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지도상에서 마한이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광활한 땅으로 표시되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이 없어졌다. 그리고 내용도 변했으니 교과서 기술에 부합된, 따라서 가장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우리역사넷>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삼한(三韓)은 여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한에는 50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국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크고 대표적인 소국들만 가리키는 것이며, 실제로는 이보다 많은 소국들이 존재했다고 여겨진다. 삼한의 소국들은 자치적인 정치 집단이었지만, 각각 마한⋅진한⋅변한 중 한 곳에 소속되어 느슨한 연맹을 구성하고 있었다. 목지국(目支國)은 마한 50여 소국 중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던 나라이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인천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천안시, 예산군, 아산만 일대, 전라북도 익산시, 금강 유역, 영산강 유역 등 여러 설이 제기되어 왔다. 이 가운데 천안 일대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3세기 중반 이후 백제가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목지국은 마한 맹주국의 지위를 상실해 갔다. 이후 근초고왕(재위 346~375) 대에 이르면 백제가 마한 지역 대부분을 통합하는데, 이 사이 어느 시점에 목지국도 백제에 병합되었다.
     
     

    한성백제박물관의 연표 / 마한 목지국이 천안이나 직산 쯤에 표시돼 있다.
    고고학 자료로 비정한 당대의 강국들 / 무등일보

     
    이렇게 볼 때 <삼국사기> 온조왕 24년에 나오는 웅천책은 백제가 마한과의 경계를 삼고자 설치한 안성천변의 목책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2000년 전 백제가 설치했던 그 목책의 흔적이 2015년 9월 안성시 도기동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에 위치한 공장에서 인근 언덕에 창고를 짓다 구릉지 지형을 따라 잇달아 발견되는 구덩이에 놀라 신고를 한 것인데, 이것이 삼국시대의 목책성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안성 도기동 목책성 흔적 / 나무위키 사진
    안성 도기동 목책성 흔적의 세부 / 나무위키 사진

     
    이 목책성 유적은 긴급 보호를 위한 중요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그해 12월 2일 사적으로 가지정되었고 발굴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사적 제536호로 정식 지정됐다) 발굴 조사 결과 목책성은 흙을 쌓아 토루를 조성하고 주위에 나무울타리인 목책을 세운 구조로 밝혀졌다. 이후 안성시에서는 이곳 도기동 관방유적과 인근의 도기동 고분군을 묶어 역사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공사에 착수했으나 아직은 원활치 않아 보인다.  

     

     

    목책성이 설치됐던 곳
    목책성 터를 올려 찍은 사진
    목책성 터 꼭대기에서 보이는 안성천


    위 <삼국사기> 기사를 보면 백제 온조왕은 일단은 부끄러운 마음에 목책을 헐고 철군했으나 훗날 백제군이 이곳을 다시 점령했음은 불문가지일 터인데, 근방의 도기동 고분군과 그곳에서 출토된 아래의 백제 환두대도는 백제가 이곳을 꽤 중요한 요새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다시 이곳을 점령한 후에도 석성이나 토성을 쌓지 않고 목책성을 유지했는데 아마도 목책 위에 진흙을 발라 화공 등에 대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목책성 터 꼭대기에서 보이는 백제고분군
    도기동 백제고분군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백제 목책성 상상도 / <시사안성> DB
    목책성 터 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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