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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동 죽동궁에서 일어난 사건 1.2.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20. 20:24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번지 아미드호텔 일대에 있던 죽동궁(竹洞宮)은 조선 후기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와 부마인 동녕위 김현근(金賢根, 1810~1868)이 살던 집으로, 현재 표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건평 3천 평이 넘았던 죽동궁은 1030년대 필지분할하여 매각된 뒤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아래 1932년 12월 25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은 관훈동 198-1번지에 잔존하던 죽동궁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 집의 원래 이름은 '죽도궁(竹刀宮)'이었다. 김현근이 큰 병에 걸렸을 때 행한 무당굿이 오래 지속되며 무당들의 대나무 칼 춤 소리가 이 집의 별명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현근 사후 집은 양자 김병찬과 손주 김덕규에게 대물림됐으나 김덕규가 후사 없이 요절하자 민왕후가 왕실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이후 죽동궁은 민왕후의 양오빠 병조판서 민승호(閔升鎬, 1830~1874년)에게 하사되었는데, 1873년 11월 권좌에서 쫓겨난 흥선대원군 축출에 대한 보은일 터였다.
하지만 민승호가 죽동궁에서 복락을 누린 기간은 단 1년으로, 그는 1895년 11월 28일 자택에 인편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에 의해 폭사당했다. 진상품으로 위장한 소포는 고급 나무 함이었는데, 민승호가 뚜껑을 여는 순간 함이 폭발하며 본인은 물론 함께 있던 10살 난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이씨 등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짓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떠돌았다.
민승호가 폭사한 후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이 죽동궁을 상속받았다. 민왕후와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민왕후의 조카 민영익은 고종이 HSBC(홍콩 상하이 은행)에 은닉해 두었던 거액의 비자금을 주무르던 거부의 관리였던 바, 죽동궁 저택은 사실 별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1914년 민영익이 죽은 후에는 민영익의 어린 아들 민정식을 만만히 본 여러 모리배들이 죽동궁 소유권을 놓고 죽자 살자 달려들었는데, 결국 민정식의 소유로 귀결되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1917년 7월 3일부터 7월 25일까지 "의운(疑雲, 의문스런 구름)에 포위된 죽동궁"이라는 제목으로 20회에 걸쳐 민영익 사망 후 벌어진 재산 상속 싸움을 비중있게 연재하였던 바, 이 대저택의 향배에 관한 세간의 관심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무렵 세간의 이목이 쏠렸던 당 17세의 민정식은 민영익과 중국인 소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이후 이쪽 저쪽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주어진 재산을 황음으로 탕진하다 죽었다.
민정식 사후 이 집은 친일파 갑부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의 소유가 되었다가 민대식이 3,168평 땅을 필지분할하여 매각함으로써 죽동궁의 흔적은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 (민대식에 대해서는 ☞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 이야기')
이후 죽동궁의 일부였던 198-1번지만이 죽동궁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는데, 서두에 소개한 <중앙일보>의 사진은 이때의 것이다. 하지만 필지 분할 후에도 198-1번지 집은 영화를 누렸으니, 아래 1932년 <중앙일보> 특집기사에서는 비록 관직은 떠났지만 그대신 사음(사채)을 쥐고 흔드니, 사채를 얻으려는 사람이 예전 벼슬을 구하러 드나들던 사람에 못지않게 많아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썼다. 그런데 그 집 문은 매우 좁다고 꼬집었던 바, 관직 못지않게 사채 얻기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기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대 경성 시내의 건물 로맨스(8)"
사동골목으로 한참 올라오면 동향한 큰 솟을대문은 예전 죽동궁(竹洞宮)이요, 지금은 동일은행(東一銀行) 두취 민대식(閔大植)씨 집인데 예전 이름이 그대로 내려와 주인이 바뀐 후에도 세상 사람들이 죽동궁으로 부른다. 이 죽동궁은 어떠한 역사를 가졌으나 근본은 안동김씨의 집이다. 동녕위(東寧尉) 김현근이란 이가 순조대왕의 따님 명온공주에게 장가를 들어 나라에서 그 집을 지어 부마궁으로 만든 것인데, 골목이름을 따라서 사동궁이라 해야 옳았겠지만 동녕위 김현근이 사동궁의 '사' 자가 '죽을 사'(死)와 음이 같다 하여 죽동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동녕위가 그 집에서 살 때에는 별 조화 별 풍파 없이 호사만 누렸지만 동녕위의 손자 김덕규(金德圭)때에 와서 명성황후께서 그집을 달라고 하여 당신의 친정에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왕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사후 관작으로 민씨 집안을 이른다) 집이 그리로 온 후에는 집이 큰 만큼 모든 풍파도 큼지막하게 일어났다. 민영익이 그 집의 계자(系子)로 들어와 명성황후의 친조카가 된 후 국가 대소사를 모조리 처리하던 집도 이 집이다.
민영익은 세도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부리다가 갑신년에 귀가 떨어져 상해(上海)로 나간 후에는 그집 바깥주인은 없어졌다. 하지만 부인들이 대신 세도를 부려 죽동대방마님이라면 벼슬깨나 한 사람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뻑적지근했다. 그러므로 인해 민씨의 쪼각세도군(※세도를 부리는 떨거지들을 말하는 듯)과 별입시(別入侍)군들의 그림자가 아침저녁으로 그 집에 끊일 세가 없었고, 매관매직하는 거간군들(매관매직의 다리를 놓는 자들)의 어음도 그 집만큼 남발하는 곳이 없었다.
그러한 집이 세월이 변하자 적막을 느끼기 시작하야 민영익의 세도기에는 여러 사람이 들락날락하던 집이 민영익이 상해에서 죽고 민정식이 그리로 온 후에는 소송에 휩싸여 싸움판이 되었다. 이후 숱한 그 재산이 탕패하게 되어 민정식이 상해로 도망간 후에는 민영익이 모아두었던 서화골동품에 대한 경매가 한참 동안 그 집에서 행해져 한때 골동품상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후 그 집은 일본사람 손을거쳐 지금은 주인이 민대식 씨에게로 넘어왔는데 민대식 씨가 그 집을 가질 만큼 된 재력도 사실 그 집으로 인하야 생겼고(※ 그 아비 민영휘가 여흥민씨로서 호가호위했던 것을 말함) 또 지금 그 집에서 살게 되니 그것도 무슨 인연이랄까? 지금은 벼슬이 떠나 관직에 있지는 않지만 그 대신 사채를 쥐고 흔드니, 그 집이 제일 돈이 많은 관계로써 사채를 얻으러 드나드는 사람이 예전 벼슬을 구하러 드나들던 사람에 못지않다. 그 집의 특색은 문전이 무척 좁은 것이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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