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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혜옹주와 남편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의 시(詩)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2. 21:41


    약 10년쯤 전에 손예진 박해일 주연의 '덕혜옹주'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당시 550만 관객을 모은 흥행작이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별로 당기지 않는 영화였는데 몸이 좀 불편한 어멍 때문에 함께 영화관을 찾아야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 중의 하나로 배화여고 교사(校舍)가 나온다는 어멍 친구분의 전화에 갑자기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모양이다. 어멍은 일제강점기 그 학교를 졸업했다. 

     
    어멍께서 시종 재미있게 봐 흡족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사실과 너무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었기 때문인데, 역사와는 상이한 그 가짜 스토리로 눈물샘까지 자극하려 드는 감독의 의도에는 은근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영화가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단 것, 실화 2 픽션 8의 배분 구도로 제작되었다는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분노가 덜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소설 덕혜옹주와 영화 덕혜옹주

     
    다큐멘터리 영화도 아닌 픽션 영화에 화까지 낼 필요야 뭐 있느냐,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역사 왜곡이라서가 아니라 덕혜옹주나 영친왕의 민족의식이 영화 속 인물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만 되었어도 대한제국이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흥을 이루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아. 영화 속의 그들은 저토록 장한데 현실 속 인물은 왜 그토록 찌질했을까?


     

    영화 속 고뇌하는 옹주마마는 현실에서는 없었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한 적이 없으며,
    강제징용 당한 동포 앞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연설을 한 적도, 일본 내 조선 아이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세운 적도,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 학생들과의 만남을 가진 적도 없었다. 이 모든 장면은 완전한 허구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1912년이라는 연대가 말해주다시피 당시는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였으며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도 5년이 지난 때로, 당시 그의 나이 62세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무능한 황제 고종은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덕수궁에 살며 일본정부로부터 고쿠다카(石高, 옛 천황이 번국의 번주에게 주던 녹봉) 월 150만엔이라는 일본정부의 넉넉한 지원금을 받았다.

     

     

    덕혜옹주의 돌 사진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고종의 퇴위 후 명칭) 시절 일본의 지원금 속에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삼축당 김씨, 광화당 이씨, 복녕당 양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여럿 생산했는데, 늦은 나이에 낳아서 인지 대부분 영아 사망하고 여아(女兒)인 덕혜옹주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으나 일찍 조현병 증상이 나타났다. 아무튼 고종은 이 늦은 고명딸을 애지중지해 마지않았던 바, 왕공족(王公族)에 속하지 못한 덕혜옹주를 마침내 왕족으로 편입시켰다.

     

     

    남양주 홍유릉 후궁 묘역의 삼축당 김씨 묘
    남양주 홍유릉 후궁 묘역의 광화당 이씨 묘 / 2 기 모두 묘표도 석물도 없다.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의 사가(私家)가 있었다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 법련사 일대

     

    앞서 포스팅한 바 있지만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왕족도 아닌 일본 황실에 속한 공족(公族), 즉 귀족계급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총리대신 이완용이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의 명칭을 사용했고, 중국과 동등하게 조·종(祖·宗)의 시호(태조·태종 등)를 사용해 온 나라에 대한 너무도 모욕적인 처사"라며 항의했다. 그리하여 "적어도 왕족으로의 지위를 보장하고 경제적 안정 또한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켜 황가(皇家)의 귀족계급으로의 전락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완용의 주장의 수용하면서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1대에 국한시켰다. '한일합방 이전에 태어난 황족에 대해서는 왕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나 단 세습할 수는 없다"고 규정을 만들어 <왕공가궤범>에 명문화했던 것이다. 조선 왕족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자자손손 할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자동 탈락이었다. 

     

    그럼에도 고종은 자신의 딸을 위해 온갖 로비를 벌여 '이태왕의 자식으로서 왕가(王家)에 살고 있는 자는 왕족으로 삼는다'는 한 사람만을 위한 규정을 <왕공가궤범>에 올리는 성공하였던 바, 딸의 장래를 염려한 늙은 아비의 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덕혜옹주는 이복 오빠인 의친왕과 영친왕과 달리 왕족도 아니며 까닭에 돌봐 줄 외가도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외할아버지 양언환의 직업이 백정인 마당이니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듯도 하다.

     

    덕혜옹주의 어미 양춘기 역시 천민으로 덕수궁 수라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나인이었으나 어느 날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으며 덕혜옹주를 출산했다. 이후 양춘기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라는 당호가 내려졌고, 1919년까지 덕수궁에서 살다 고종 사후 궁을 나와 종로의 사가(私家)에서 생활하다 덕혜옹주가 일본 유학 중인 1929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덕혜(德惠)'라는 이름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이며 그전에는 복녕당 아기씨로만 기록돼 있다.

     

     

    복녕당 귀인 양씨(1882~1929)
    13세 때인 1925년 당의를 입고 찍은 덕혜옹주의 사진

     

    고종의 고명딸 복녕당 아기씨는 왕가의 일원으로 귀하디 귀하게 자랐다. (고종에게는 상궁 염씨에게 얻은 이문용이라는 딸이 또 있었으나 일단 예외로 하겠다) 1916년 4월에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에 다섯 살 난 딸을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으며 그가 외롭지 않게 동급생 약 10명을 함께 다니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덕혜옹주는 덕수궁 함녕전에서 생활하며 사인교 가마를 타고 유현문을 너머 유치원에 다녔다.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사용됐던 덕수궁 중명전
    유현문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 (가운데)
    유치원 다닐 무렵 당의를 입고 찍은 사진

     

    복녕당 아기씨의 행복했던 시절은 1919년 고종이 죽으며 거의 끝이 난다. 그녀의 나이 8세 때였다. 고종 사후 덕수궁에서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긴 아기씨는 1921년 순종으로부터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이듬해 일본인 거류민단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설립한 경성일출심상소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한다. (현 서울 소공동 극동빌딩 자리) 그리고 5학년 때인 1925년 3월 28일, 14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창덕궁 관물헌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모습 (가운데) /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유모인 변복동
    마차를 타고 학교에 다닌 옹주 / 하교 후 마차에 오르는 기모노 차림의 덕혜옹주 뒤로 치마 저고리를 입은 변복동이 서 있다.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 송별식 사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사진도 1925년 송별식 때 찍은 것이다.

     

    덕혜는 오빠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 여사가 사는 도쿄 아자부의 대저택에서 생활하며 아오야마에 있는 일본 황족과 화족을 위해 세운 여자 학습원(가큐슈잉)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때부터 약간의 정신병증을 보이며 말이 없어졌고 활동성이 떨어지는 아이가 되었다. 자연히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체육은 항상 꼴찌였다. 그녀의 병증은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인 귀인 양씨 사망 소식을 접하며 더욱 심화되었다. (그녀는 18세인 1929년 불면증과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 후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영친왕 부부가 살던 집 / 지금은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이 됐다.
    여자학습원 1학년 때의 사진
    여자 학습원 4학년 때의 사진
    졸업 무렵의 사진

     

    녀가 결혼할 무렵인 1931년에는 조현병 증상이 더욱 심해졌던 것 같다. 이것은 "자다 일어나 걷기도 했다"거나, "말이나마 조금은 조리 있게 할 수 있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라는 이방자의 언급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결혼 상대는 대마도 번주(藩主) 소오 다케유키(宗武志)로 정해졌다. 이 점에 있어 혹자는 덕혜옹주가 일본의 황족도 아닌 화족에 불과한 대마도주의 아들과 결혼하게 된 것을 분개하고, 혹자는 강제결혼 당했다고 말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당시 덕혜는 정신병자로 소문이 나 황족이나 귀족 계급에서는 아무도 나서려 들지 않았다. 이는 그의 오빠 영친왕의 혼인 상대로 여러 황족과 귀족 가문이 나선 것과 반대되는 현상이었다. 비슷한 시기, 빵빵한 귀족 가문인 이방자의 동생 노리코(規子)가 황족 다카히코 왕(孚彦王)과 혼인하려 했으나 다케히코의 정신병력이 드러나며 약혼이 취소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오 다케유키가 나선 것은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기울어 가는 집안을 살려 보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급이 낮은 귀족이라는 것 외에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전혀 꿀리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헌칠한 외모에 명문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결혼 당시 3학년 재학 중)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에 천착하여 라틴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에 정통한 문학가였다. 아울러 시인으로도 유명했으니, 대마도주(主)로서의 자부심과 야망이 실린 아래의 시가 대마도 어느 공원 시비에 새겨 있다고 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낚기 위해 바다를 훑으나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으나

    깊은 밤 컴퍼스를 잡고

    대마도를 축으로 크게 돌린다.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 덕혜옹주의 수줍은 미소가 강제 결혼과는 거리를 느끼게 한다.
    결혼식 사진

    혹자는 또 소오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상습적으로 구타했다거나 원하지 않은 동침으로, 말하자면 강간하여 딸을 낳았다고도 말하지만 역시 어색하다. 그들 부부가 영친왕 부부처럼 사이가 원만했다면 좋았겠지만 행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우선은 덕혜옹주는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터인데, 유일한 딸 마사에(宗正惠)가 자살을 예고하는 유서만 남기고 행방불명된 후부터는 두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마사에는 23살에 가출을 한 후 종적이 묘연하다 34년 뒤인 1990년 유해가 발견되었다. 다케유키는 그보다 앞선 1985년 사망했는데, 그때까지 딸이 살아 있을 것이라 믿어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더욱 깊어져 1946년 도쿄도립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이후 일본에서의 나머지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두 사람은 1947년 이후 귀족가문에 대한 정부지원이 끊기며 생활마저 어려웠는데, 1955년에 결국 이혼이 이루어졌다. 그해 남편 다케유키는 재혼하였고, 레이타쿠대학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다케유키는 아내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보살폈고 한국에 대해서는 여타의 악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또 나쁜 말을 한 적도 없어 평이 나쁘지 않다. 덕혜옹주는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한 후 창덕궁에서 생활하다 1989년 낙선재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케유키는 그보다 앞선 1985년 사망했는데, 죽기 몇 해 전 한국에 와 옛 아내를 만나보려 했지만 이방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에게 거절당했다. 아래의 제목 모를 시는 다케유키가 아내 덕혜에게 쓴 시이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 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 바랠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 없는 사람이여.

     

    (중략)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 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 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중략)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 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시의 출처 : 딴지일보

     

     

    도청 부근 이즈하라 옛 성터의 덕혜옹주·다케유키 결혼기념비
    한국어와 일본어로 쓰인 안내문
    1962년 박정희 의장이 보낸 준 전용기로 귀국한 덕혜옹주 / 38년만의 귀환이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왼쪽은 유모였던 변복동 할망
    덕혜옹주가 살다 간 낙선재
    남양주 덕혜옹주의 묘
    안내문
    덕혜옹주 묘 부근 동네 경춘주택 앞의 하천
    덕혜옹주에 대해서는 과포장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그저 불우한 시기에 태어나 불우하게 살다 간 여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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