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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과 고종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25. 23:35
앞서 이근택에 대해 말하며 을사오적에 대해 대충 훑었지만 차제에 좀 더 들여다보려 한다. 우선 을사오적을 다시 거론하자면,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현 행정안전부장관)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현 외교부장관)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현 국방부장관)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현 교육부장관)권중현(權重顯) 농상공부대신(현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산업통상자원부장관)
이상 5명인데, 표면상 반대는 했지만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대신 민영기는 문안 수정 작업에 참여했으니 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법부대신 이하영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본래가 친일파였으니 역시 찬성과 다름없는 반대였다. 말하자면 참정대신(옛 의정부 체계에서의 좌의정) 한규설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조약 체결에 가표(可票)를 던진 셈이었다. 외형적으로도 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했기에 이토는 다수결에 의해 조약안이 가결되었다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다.
한규설은 끝까지 체결을 반대하다 수옥헌(현 중명전) 구석방에 감금당했던 바, 그나마 이 나라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회의가 늦게 시작되기도 했지만(11월 17일 밤 8시) 한규설의 극렬한 반대로 조약 체결이 지연되었고, 문안 수정 작업에도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외부대신 박제순이 고종에게 의결안을 보고해 최종 결재를 맡아야 했던 바,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최종적으로는 문서에 서명 날인한 시간은 자정을 넘긴 18일 새벽 1시였다.
여기서 문안 수정 작업이란 이토가 가져온 원안에 대한제국측의 입장을 첨가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토는 조약 체결 당일 "조약안의 내용은 수정 불가능하나 자구(字句)나 표현 등의 문제는 상의할 수 있다"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어떻게 보면 대한제국측의 체면을 생각해 주는 것 같은 모양새이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것이 들어가지는 않았으니 이완용이 건의한 문안에 대한 일부 자구가 수정됐고, 권중현이 제안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장하는 조항의 신설 요구만이 논의 후 일부 삽입되었다.
그런데 이날 조약에 반대한 사람은 참정대신 한규설만이 아니었으니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했다. (그래서 을사7적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하영은 단지 시늉에 불과했고, 민영기는 한규설처럼 원천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문안 수정 작업에는 참여하였던 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규설처럼 처음부터 반대하고 문안 수정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외부대신 박제순이었다.
그런데 그는 매국노로 취급받으며 을사5적에 포함되었다. 물론 그가 조약 문서에 최종 날인한 것은 사실이니 을사5적은 빼박이다. 다만 그는 비록 일관(一貫)하지는 못했지만 초지(初志, 처음의 뜻)는 반대였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찬성으로 돌아선(그가 정말로 찬성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박제순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추가 기술토록 하겠다.
제2차 한일협약의 일본측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로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일왕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 땅을 밟았다. 제1차 한일협약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 양국간의 조약으로, 일본인 외 외국인 1명을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외교 고문으로 두어 재정·외교 분야를 간섭할 수 있게 만든 조약이었다.
그에 이은 제2차 한일협약은 1차에서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고 조선통감을 파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약으로서, 한마디로 말해 외교권을 빼앗겠다는 것이었다. (※ 제2차 한일협약은 조약안 원본의 제목이 없는 까닭에 공식 명칭이 존재하지 않고, 1905년 을사년에 맺은 조약이라 하여 '을사조약', 을사년에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 하여 '을사늑약', 혹은 일본측의 입장으로써 '을사보호조약', 1차 조약에 이어졌다 하여 '제2차 한일협약', '한일신협약' 등으로 불린다)
즉 외교권을 빼앗으면 대한제국은 외국의 어느 나라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고 외국의 어느 나라도 한반도에 간섭을 할 수 없게 돼 힘이 강한 일본은 언제든지 힘이 약한 조선을 병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위한 선제작업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실은 그 반대였다.
이토는 당장 조선을 침공해 무너뜨리자는 일본내의 군부 강경파와 달리 조선 병합을 시기상조라는 이유로써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군부의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편으로서 일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유명무실한 나라로 만들어놓자는 제안을 하였던 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방한한 것이었다.
11월 9일 정동 손탁호텔에 여장을 푼 이토는 이튿날인 11월 10일 입궐해 고종을 알현하고 일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거기에는 동양의 평화와 장래의 분란 방지를 위해 두 나라가 긴밀히 협력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물론 중요한 내용이었지만 다분히 외교상의 관례적이고 상투적인 내용일 뿐, 그 속내는 조선의 외교권 강탈이었다. 이토는 고종 앞에서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화근이 돼 온 대한제국의 대외 관계를 일본이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나 이토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300만원이라는 거금을 준비해 왔다. 뇌물로 쓸 돈으로서, 이중 고종에게 2만원을 주었고,(2만원은 당시 도시노동자의 100년치 연봉에 해당한다고 한다 / 이토는 황실 재정 담당관인 경리원경 심상훈을 통해 무기명 예금증서로 2만원을 보냈다) 이완용에게 1만원, 이지용과 이근택에게 각각 5000원을 주었다. 이는 당시의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따른 것이며, 나머지 대신들에게도 이에 준하는 뇌물을 줄 예정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뇌물을 뿌린 이토는 이후 거침 없이 행동했다. 그리하여 16일 오후 4시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에 참정대신 한규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법부대신 이하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탁지부대신 민영기, 경리원경 심상훈을 불러내 조약체결의 협조를 요구했다. 거부하면 일본정부가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도 곁들였다. 처음에 난색을 표명했던 고종이 "일본측과 협상하여 처리하라"고 한 발 물러난 데 따른 액션이었다.
고종은 심상훈을 통해 거액을 수뢰하기는 했으되 두 발 다 빼지 않고, "외교권 이양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며 조약문에 어떻게 규정해도 말하지 않겠으나 외교권이 대한제국에게도 있다는 형식만이라도 남겨달라"며 한 발을 걸쳤다. 그러나 일본의 목적과 정면 충돌하는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질 리 없을 터, 이토는 "거절하든 찬성하든 당신 마음이다. 거절해도 좋으나 그럴 경우 조약 성립보다 훨씬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며 고종의 걸쳐진 발을 세게 걷어찼다.
이후 고종은 찍소리도 하지 않았고, 조약 체결 후 이토에게 "새 협약은 두 나라에게 축하할 일이다. 짐은 신병으로 피곤하지만(고종은 병을 핑계로 조약문 체결을 신하들에게 미뤘었다) 이토 특사는 밤늦도록 수고했을 터, 얼마나 피로하겠는가"라는 위로의 칙어를 하사했다. 아울러 조약 체결에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는 죄로 파면하고 그 자리에 박제순을 앉혔다.
흔히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라고 말하지만 이쯤되면 그 을사오적의 우두머리는 바로 아래 사진의 사람이 아닐까 한다. 또 혹자는 이 무능한 자의 독살설을 언급하지만, (이태진의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 <역사학보> / 황태연의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外) 이것은 정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은 이후 덕수궁에서 고쿠다카(石高, 옛 천황이 번국의 번주에게 주던 녹봉) 월 150만엔이라는 일본정부의 넉넉한 지원금을 받으며 편히 살다 죽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퇴위한 고종에게 일본이 붙여준 명칭) 시절 수많은 나인들을 건드려 덕혜옹주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 (늙어 생산한 아이라 그런지 덕혜옹주 외는 대부분 영아사망함) 부패와 무능으로 망국의 길을 제공한 고종은 퇴위 후에도 일말의 반성이나 회한 없이 나인들 품 속에서 희희낙락하며 천수를 누렸던 것인데, 이렇게 무능하고 생각없는 늙은이를 일본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러할만한 하등의 가치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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