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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어 있는 친일파 집과 송병준의 별서 저택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19. 20:54

     

    독립운동가의 집은 보기 힘들어도 친일파가 살던 집들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유명 친일파의 경우는 대부분 대궐 같은 집에 살아 그것들이 문화재적 가치로서 보전됐기 때문이다. 다만 문패를 자랑할 수는 없는 까닭에 쉬쉬하거나 다른 사람의 집인양 위장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옛 필동 수도방위사령부 터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복원된 민영휘의 집이다. 현재 '관훈동 민씨 가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민영휘 집의 안채
    민영휘 집의 안채는 과거 종로 경인미술관으로도 쓰였다.

     

    1998년 4월 18일  남산골 한옥마을이 개관을 했을 때 민영휘의 집은 엉뚱하게도 박영효의 집으로 소개되었다. (박영효도 친일파이긴 하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써 각인된 탓에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 이후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었음에도 그저 안내문의 '박영효의 집' 문구만을 제거하고 뭉개다가 결국 '관훈동 민씨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집도 처음에는 순종황제의 부인 순정효황후의 본가라고 소개했다가 지적을 받고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두루뭉술하게 고쳐졌다.

     

     

    윤덕영의 첩이 살던 옥인동 윤씨 가옥

     

    이완용의 조카로서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한상룡의 집도 '가회동 한씨 가옥'으로 두루뭉술 위장되었다. 서울 99칸 집의 대명사 같은 종로구 북촌로 46-3의 '가회동 한씨 가옥'은 본채 이름을 따라 '휘겸재(撝謙齋)'로 불리기도 하는데, 1928년 한상룡이 왕족이던 이규용으로부터 2만8000원에 구입해 그해 7월 16일 입주했다. 민영휘 아들들과 더불어 재계의 거물이었던 한상룡은 동양척식회사 이사, 한성은행 전무, 조선식산은행 창립위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 7길 16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 역시 한상룡의 집이었다. 그는 1913년 옆집 열두 채를 사들여 땅을 넓힌 후 이 집을 건축했는데,(대지 907평에 건평 110평)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집이다. 한상룡은 준공 후 일왕의 간나메사이(神嘗祭,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맞추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초청해 집들이 연회를 가졌지만, 이후 한성은행이 자본금 고갈에 봉착하자 집을 팔아 5만원을 출연하고 길 건너로 이사했다. 그 집이 바로 위에서 말한 '가회동 한씨 가옥'이다 

     

     

    백인제 가옥 솟을 대문
    백인제 가옥 사랑채 / 1977년 민속자료(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등재될 때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가 소유하고 있어 백인제 가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회동 한씨가옥 휘겸재 / 서울 뷰티 트러블 행사 때 찍은 서울시 자료 사진이다. 가회동 한씨가옥이라는 이름으로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됐다.
    2023년 9월 영국 럭셔리 브랜드 멀버리와 프리즈가 '멀버리 X 프리즈 91 서울 파티'를 가졌다. 사진은 이 행사에 참석한 배우 최수영이다.

     

    친일파를 말할 때 송병준이 빠진다면 지하에서 서러워할 것인즉 이제부터는 송병준의 집을 말하려 한다. 워낙에 유명한 놈이지만 짚고 가자. 송병준은 1857년 함경남도 장진에서 기생의 몸에서 태어났다. 아비는 지역의 향리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는 어미로부터 아비가 송씨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은진 송씨를 제 본으로 삼았다. 그것이 양반가라는 말을 들었기에.*

     

    * 그는 훗날 세력가가 된 후 자신이 송시열의 후예라고 주장했는데, 그러자 오히려 진짜 은진 송씨 송시열의 후예들이 한 자리 얻을까 해서 몰려들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매천야록>에 전한다.

     

    송병준은 8살 때 상경해 서울 종로 기생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그러다 기방에 출입하던 순조의 장인 민태호의 눈에 들어 민태호 애첩의 머슴으로 들어갔고 13세 때인 1871년 무과에 급제했다. 민태호가 뒤를 봐주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이후 송병준은 민씨 척족의 따까리 노릇을 하며 승승장구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자연히 타깃이 되었다. 이때 그의 집이 처음 불탔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더욱 위험했으니, 민태호는 왕명에 호출돼 계동 경우궁에 갔다가 개화파에 척살당하고, 송병준은 멀리 도망쳤다가 청군(淸軍)에 의해 쿠데타가 평정된 후 돌아왔다. 이때 그의 집이 두 번째로 불탔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으니 그간 뒤를 봐주던 민태호가 사라지며 출세길도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으로 도망간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처단해 주면 앞날을 보장하겠다는 민씨 일가의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다.

     

    송병준은 김옥균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1886년 7월 관직에 복직되어 중추부 도사, 양지현감 등을 지냈는데, 이듬해인 1897년 일본인과 함께 상관(商館)을 차려 개성인삼을 밀무역한 혐의로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郎) 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사실상의 일본인이 되어 일본 각지를 주유하며 살았다. 그러던 송병준에게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송병준이 양지현감 시절을 추억하며 1920년대 용인 내사면 추계리에 조성한 별서 앞 영화지(映華池) 모습
    1990년대 찍은 송병준 별서의 사랑채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으로 이전됐다.

     

    그는 이때 그는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육군소장의 군사 통역을 맡아 귀국했다. 그리고 전쟁 이후로는 친일파로서 입신했으니 일본 통감부의 후원 아래 일진회(一進會)를 창립,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돌입했다.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의 전성기 때 회원은 14만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 <대한매일신보> 자료) 이어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으로 입각해 내부대신 등을 지냈고 일진회에게 한·일 양국의 합병을 청원하는 '한일합방 상주문'을 수차례 제출토록 하는 등 매국의 첨병 노릇을 했다.*

     

    *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황제 앞에서 칼을 빼어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폐하께 사죄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하세가와 장군(당시 임시 통감대리 / 훗날의 제2대 조선총독)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송병준(宋秉畯, 1857~1925)

     

    송병준은 초특급 매국노로서 여러모로 이완용을 능가했다. 창씨개명도 첫 번째로 했다. 이에 이완용도 위협(?)을 느꼈으니, 1910년 서둘러 한일합방문서를 작성한 것이 송병준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송병준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기는 을사늑약 때는 자격이 없어 끼지 못했지만, 이때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집을 빼앗는 데는 성공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송병준은 민영환 부인을 협박해 종로 집을 빼앗고 재산을 횡령했는데, 그 집은 다름 아닌 자신이 식객으로 있던 민태호의 집이었다. (민영환은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송병준은 민영환과는 호형호제하며 지낸 적도 있었으나, 그 은혜와 의리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채 민영환의 집과 재산을 빼앗은 것이다. 송병준은 이 집을 매물로 내놨고 조선불교계가 매입해 1910년 현재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라는 절이 세워졌다.  

     

     

    공평동 종로경찰서 앞 민영환 자결터 모뉴먼트 / 민충정공은 노모가 계신 집(지금의 조계사 경내)을 나와 300여 미터쯤 떨어진 청지기 이완식의 집에서 1905년 11월 30일 군도(軍刀)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조계사 앞 민영환 집터 표석
    민영환의 집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조계사 입구의 석물
    조계사 대웅전 / 1910년 전북 정읍의 신흥종교 보천교 본당 십일전(十一殿)을 이축했다.

     

    송병준은 1905년의 을사5적에는 끼지 못했지만,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조약인 1907년의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찬성한 정미7적에는 농상공부대신으로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908년 단재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송병준, 조중응, 신기선을 일본에 충성하는 3대 노예로 지목했다.

     

    송병준은 일제강점기 중추원 고문을 지냈고 노다 헤이슌(野田秉畯) 혹은 노다 헤이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첩을 끼고 살며 (그래서 '노다 대감'이라 불렸다) 호의호식하다 1925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야스쿠니신사에서는 노다 백작의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던 바, 친일의 정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구한말의 친일파들 /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 앉아 있는 순종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재각, 민병석, 이재구,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다. 뒷줄은 윤덕영과 이병무다.

     

    송병준은 총독부로부터 받은 한일합방 은사금에 1910년 일진회 해산 후 그 재산을 사유화하여 조선 갑부 10위 안에 드는 거부로서 죽었다. 그리고 그 재산과 백작 지위는 오롯이 아들 송종헌(1876~1949, 창씨명 노다 소노리)에게 물려졌고 다시 송재구와 송돈호에게 이어졌다. 그런데 지난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며 후손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이제 친일파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재산들이 장물로써 국고로 환수될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이에 대항해 송재구의 아들 송돈호(당시 62세)가 이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송돈호는 소장에서 "특별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재판받을 권리, 재산권 등을 침해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관심을 모았던 송병준이 지은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대저택은 오래전 처분되어 그 99칸 집의 일부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에 이전·복원돼 있음이 확인됐다. (궁집은 현재 보수공사 중으로 2025년 5월 개장 예정이다) 

     

     

    남양주 궁집 / 1765년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자 왕이 그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궁집 내 송병준의 집

     

    당시의 <시사저널>에 따르면 송돈호의 땅찾기 놀음은 크고 작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토지 브로커들과의 알력 끝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가 하면 송병준 명의로 남은 땅문서를 매개로 각종 사기극이 판을 쳤다. 

     

    송병준 땅찾기에 조직적으로 뛰어든 토지사기단은 약 100명. 이들은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와 짜고 사회단체에 기증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가 등을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했지만 사실은 조직적 사기극이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자 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는 한때 특별팀을 운영해 송병준 토지사기단에 대한 전담 검거 작전을 펴기도 했다.

     

    이들은 서울 상암동 일대 60여만 평,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 30만 평, 강원도 금화군 금란면 갈현리 일대 임야 200여만 평, 경남 밀양군 초동면 임야 79만여 평 등이 송병준 땅이라며 후손과 위장 기증동의서를 써서 소송놀음을 벌여나갔다. 송돈호는 토지 브로커에게 위임장을 써주고 그 대가로 건마다 수천 만원에서 수억원대 착수금을 받았다.

     

    브로커들은 별도로 변호사를 선임해 토지를 위장 기증받을 단체로 하여금 송돈호를 상대로 '위장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이 과정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위장 기증 단체가 승소한 다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 찾아가는 수법을 쓴 것이다. 후손과 땅을 반반 나눠 가지는 조건이었다.

     

    당시 전국에 송병준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는 수천만 평으로, 일제강점기 국유재산조사국 운영위원장을 지낼 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송돈호는 조상의 땅을 어렵지 않게 되찾을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국유지 상대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가 사기극을 벌인 땅은 부평 주한 미군기지 13만 평이었다. 그는 이곳이 증조부 송병준의 땅인데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자기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속여 그중 약 5000㎡에 대해 건설업자 두 명과 아파트 부지로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2억2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검찰 수배를 받았다.

     

    그 뒤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냈다가 패소하자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체포, 구속되었다. 송돈호는 이후 이재훈 변호사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는데, 그 두 사람은 친일재산 환수관련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앞서 민영휘 후손의 땅찾기 놀음에 대해 포스팅한 적도 있거니와, 그들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파재산 환수에 대항해 벌인 소송에서 상당 부분을 승소를 해 재산을 지켜내며 2005년 여야 합의로 이루어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후속 법률이 제정되어야 하건만 이후 이렇다 할 법안은 상정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친일파 청산을 외치며, 때로는 죽창가를 부르며 침을 튀기지만, 실은 자신들의 정쟁의 도구일 뿐 실효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선이 정말로 싫다.  

     

     

    용인 추계리에 있던 송병준 묘는 2008년 갑자기 파묘했다. 유골은 화장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영화 '파묘'의 한 장면)
    현재 남양주 궁집에 이전·복원된 송병준의 용인 별서
    송병준은 구한말 양지현감으로 있던 인연을 계기로 추계리에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짓고 일본낭인들 및 일진회원과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병준의 저택은 의병 토벌에 나선 일본군들의 숙소로 사용된 적이 있고,
    송병준 역시 일진회와 함께 의병 토벌에 앞장 선 경력이 있다. / 사진은 '오마이뉴스' 자료임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에는 영화지 표석이 양지온누리교회 내에 남아 있다. / 용인신문 사진
    영화지 정자 초석 / 용인신문 사진
    송병준의 무덤이 있던 곳 /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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