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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이 제3국행 배를 기다리며 술 마시던 인천 북성포구의 마지막 풍경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15. 15:32
명준이 뉘기....? 하는 분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이명준은 우리 시대의 문제작 최인훈(1934~2018)의 중편소설 '광장(廣場)'의 주인공이다. 우리 시대란 50~60대의 나이쯤이 되겠다. '광장'은 1960년 11월 <새벽>이란 잡지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까닭에 그 소설을 가장 많이 읽은 세대는 적어도 1940년대 생으로, 그러니까 지금은 80살에 이른 할아버지들이었겠지만, 정작 반향이 가장 컸던 세대는 지금의 50~60대였다.
아마도 당시 강화되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反動)이 아니었을까 한다. 여기서 반동은 "동무는 반동이요", 혹은 "반동분자"라고 하는 북한 단골 언어 속의 그 반동이다. 아무튼 '광장'은 대단한 문제작이었으니,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그만한 울림을 준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광장'은 지금껏 학력고사와 수능에 지문으로써 중복 출제되고 있는 유일한 소설이라고도 한다. 바꿔 말하자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는 소리가 되겠다.
줄거리를 초 축약하자면, 명준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인 아버지 이형도를 따라 월북해 노동신문의 기자가 되지만 사회주의 북한은 기대하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이에 명준은 큰 내적 혼란을 겪다 6.25전쟁에 투입되고 군관 신분으로 서울에 내려와 우익 사상범들을 다룬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겠다는 양 사상범들을 강하게 처벌하고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오는데 유엔군의 폭격에 그만 사로잡혀 포로가 된다.
포로수용소에서 어떤 성찰이 있었을까? 종전 후 그는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 인도를 택해 인도행 배 타고르 호를 탄다. 아마도 그가 남과 북을 모두 거부하고 제3국행을 택한 것은 이념적으로는 전쟁이 없고 좌우 이념대립이 없는 세상을 택한 것일 테고, 내면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회색인이 살 곳은 인도와 같은 중립국이 적당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만, 어느 순간 배 위에서 이 또한 부정하고 남지나해 바닷속에 몸을 던진다. 그곳 바다만이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초월할 수 있는 넓고 푸른 광장이라 여겼던 것이다.
위 사진은 1954년 2월 16일 판문점에서 북한 측 대표(왼쪽)가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제3국행을 고집하는 인민군 포로를 설득하는 장면이다. 소설과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필시 최인훈은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을 터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도 위 사진의 주인공처럼 의지가 완강했다. 예전에 가끔 패러디되기도 했던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웃몸을 테이블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동무의 부모는 어디 살고 있소?"
"중립국."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장교가 나앉는다.
"동무, 지금 인민공화국에서는 참전용사들을 위한 연금 법령을 냈소. 동무는 누구보다도 먼저 일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인민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것이오. 전체 인민은 동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고향의 초목도 동무의 개선을 반길 거요."
"중립국."
그리고 당시 제3국을 선택한 포로는 생각보다 많아서 인민군 74명, 국군 2명, 중공군 12명으로 총 88명이나 됐다. 이중 중공군 12명은 자유중국을 택해 갔는데, 처음에는 모두 인도로 갔다. 포로 송환을 담당한 중립국 인도 관리단에서 제3국을 선택한 자들을 일단 본국행 배에 태운 것이었다. 소설과 달리 그들 중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힘든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우선 그 포로들이 대부분 가기를 희망했던 미국은 수용을 거부했다.
차선으로 택한 멕시코에서는 처음에는 받는다고 했다가 다시 안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변덕이 수차례 되풀이됐다. 스위스·스웨덴 같은 진짜 중립국들은 처음부터 거부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다만 인도는 그들을 데려온 입장이라 수용을 표명했지만 정작 희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기다림에 지친 포로 중 일부는 인도 잔류를 선택했으며 이중 6명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고국인 북한을 택해 돌아갔다. 이들은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다)
얼마 후 당시에는 제법 부국(富國)이던 브라질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포로 모두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경쟁국이자 브라질보다 잘 살았던 아르헨티나도 15명에 한해 받아주겠다고 나섰고, 이에 인도에 잔류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남미로 떠나게 됐다. 최종적으로는 76명의 포로 중 48명은 브라질, 11명은 아르헨티나, 6명은 인도 잔류, 6명은 북한, 5명은 남한을 선택해 떠났다. (남미로 갔던 사람 중에는 훗날 다시 미국으로 가 정착한 사람도 여럿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은 인도행 배 아스토리아 호(소설 속에는 타고르 호)가 출항했던 인천항 북성포구이다. 이 사진은 '인천북성포구살리기 시민모임'이 제공한 사진인데, 대성목재 공장과 창고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리 옛날은 아니다. 아무튼 이곳에서 인도행 배가 출행했기에 이곳에 즐비한 횟집은 소설 속 이명준이 자신을 데려다줄 배를 기다리며 술을 마시던 곳으로 곧잘 회자된다.
하지만 포구에 즐비한 횟집들은 이달 말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북성포구 준설토 투기장 조성사업에 따라 횟집들이 보상 계약을 맺고 영업을 종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북성포구 준설토 투기장 조성사업은 2010년 오염된 갯벌 악취로 환경개선 및 친수공간 조성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에 따라 2015년 인천시와 중구·동구·인천해양수산청이 협약을 체결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에 2022년 1월 전체 사업구간 7만5554㎡ 중 매립공사가 85%(6만4646㎡) 완료됐으나, 횟집 보상 방안에 대한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서 잔여 구간 매립과 상부 시설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그것이 일괄 타결되어, 지연된 8천429㎡ 규모의 공유수면 매립이 연말까지 완료된다고 한다. 조감도를 보자면 꽤 넓은 녹지공간의 탄생이 예견된다.
이에 지금은 위의 볼음도 횟집을 비롯한 거의 모든 횟집이 문을 닫았는데, 미소 횟집과 여우네 횟집은 아직 버티고 있다. 이달 말까지 끝까지 영업할 태세다. 아무튼 송순희 사장님은 참 억척이다. 여우네 송 사장님이나 미소 횟집 김 사장님이나 지금은 모두 70세가 넘었을 것이다. 오늘은 혼자 간 까닭에 아무 데도 들리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예전에 나와 친구들은 이 골목 단골 취객이었다.
주로 생물 모듬회와 5공 정권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던 것 같다. 문청(文靑, 문학청년) 계열 친구들은 최인훈 '광장'의 등장인물들처럼 사회주의에 경도돼 북으로 갔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해방 정국의 선 지식인들도 자주 화제 올렸다. 그렇게 진탕 술을 마시고 갯벌에서 망둥어 낚시를 했는데, 그야말로 던지면 물렸다.
그러면 또 그놈들을 회 떠서 2차를 벌였는데, 진짜 술판은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어 새벽차를 타고 돌아오기를 수십 번, 그러던 어느 날 온몸에 돋은 두드러기로 고생을 한 후 인천행을 마감했던 듯하다. 아무튼 당시는 5공 정권을 욕하면서도 체제의 우위만큼은 확신해던지라 종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과거의 NL(National Liberty·민족해방)계보다 더 극렬한 좌파들이 설치니 이해하기 힘든 노릇이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들이 노골적인 선전선동을 해도 잡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또한 체제의 우위에서 오는 관용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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