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 왕릉 가운데 하나인 숭릉은 조선 제18대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의 무덤이다. 특이하게도 이 무덤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한 팔작지붕 건물로서, 그로 인해 보물(제1742호)로 지정됐다. 그 외 다른 정자각은 모두 맞배지붕이다. 전통가옥에서 일반적으로 팔작지붕은 맞배지붕보다 격이 높은 건물에 적용된다. 까닭에 숭릉의 주인공인 헌종과 왕비 명성왕후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과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 제18대 현종(1641~1674)의 어릴 때 이름은 이원(李遠)이다. 원이 출생한 곳은 청나라 심양으로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부친인 봉림대군(효종)이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대 국왕 중 왕비 외에 후궁을 단 한 명도 두지 않은 유일한 왕이기도 하다. 그건 또 어째서일까? 부인을 유독 사랑했기 때문일까?
반대로 가장 후궁을 많이 둔 왕은 누굴까? 최고는 2대 왕 태종으로 무려 19명을 두었고, 다음은 광해군(14명), 성종(13명), 고종(12명), 연산군과 중종(각 11명)이 뒤를 잇는다. 평균은 6.4명이라 한다. 이런 예를 보면 후궁을 두지 않은 현종은 정말로 특별한 경우였으니 '아내 사랑' 외에는 답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던 듯, 현종은 다른 여자들도 찝적거렸으니 김상업이라는 궁녀가 현종의 아기를 임신한 적도 있다. 승은을 입은 궁녀는 후궁이 되는 것이 법도인지라 법도 대로라면 김상업은 후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궐 밖으로 내쫓겼고, 훗날 '홍수(紅袖)의 변' 때 유배까지 가야 했다.
'홍수'는 궁녀의 붉은 옷소매를 말하는 것으로, '홍수의 변'은인평대군(봉림대군의 동생)의 아들인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 김상업과 김귀례를 건드려 임신시켰다 하여 유배에 처해진 사건을 말한다. 원래 궁녀를 건드린 자는 짤없이 사형이었으나 (궁녀는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물이므로) 감형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야료가 있었다.
실상인즉, 현종의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혹시라도 어린 숙종의 왕위를 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일타쌍피로 김상업과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김상업이 임신하여 난 자식은 현종의 핏줄이었다.(게다가 아들이었다 함) 현종은 공교롭게도 그 무렵 앓다 죽어 끝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 한다.(알았다면 그렇게 놔둘 리 없었을 터) 그 팔자 사나운 가엾은 아기는 또 어찌 되었을지....?
현종의 무서운 아내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이고, 할아버지는 광해군·인조·효종 때의 명재상 김육이다. (☞ '조선 최고의 경제 총리 김육과 대동법') 청풍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핏줄을 이어받아 총명했으며 스스로 왕가에서 살아남는 법도 익혔다. 네가 죽으면 내가 평안하다는.... 이와 같은 지독함은 사관(史官)들에 의해 죽은 문정왕후가 소환되기도 했으나 앞날의 문정왕후도, 훗날의 명성황후도 따라오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녀는 후궁이 들어와 아들을 생산하면 분란은 필연이라는 것을 진즉에 깨달은 듯, 남편인 현종을 닦아세워 후궁을 한 명도 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현명한 여자이고, 또 어찌 보면 독선적이며 표독한 성품인데, 아들 또한 어미의 '한 성깔'에 대해서는 질린 바가 있는 듯, 명성왕후의 수렴청정을 한사코 마다하고 14세의 어린 나이로 친청을 시작했다. (숙종은 현종의 이른 승하로 1675년 1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숙종이 즉위하자 집권 세력인 서인에 대한 남인의 반격이 꿈틀대었다. 요즘도 그러하거니와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의 비리를 파고드는 것이 상례이다. 이에 남인은 곧바로 '홍수의 변'을 들고 나왔다. 워낙에 증거도 없이 조져댄 엉터리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홍수의 변' 때 활약이 컸던 서인과김우명(명성왕후의 아버지)이 궁지에 몰렸는데, 괄괄하고 급한 성격의 김우명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급서했다.
이후 화살은 거침없이 명성왕후를 향했다. 위기를 느낀 명성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언문(한글) 교지를 내려 자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관들은 그녀의 지랄맞은 성격과 위선을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을 터, 간과해도 되었겠지만 훗날의 증거로 삼으려 했는지 굳이 실록에 실었다. <숙종실록> 4권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아서 쓸모가 없고 죽어야 할 사람이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이 고통스럽다. 이제 나라의 일을 돌아보라고 말들 하지마는, 내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나라에 유익함이 있다면 어찌 한갓 애통한 것만을 생각하여 이렇게 하겠는가? 차마 들을 수 없는 욕(辱)이 선왕(先王)에게 미치었고, 나로 말미암아 주상의 성덕(聖德)에 해로움이 많구나. 이제까지 살아 있는 탓으로 차마 이와 같은 말을 들은지라 오직 속히 죽기로 정하였는데, 또 망극한 변을 만났으니 어떻게 마음을 정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정신이 혼미하여 오직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서 죽기로 정하였다.
그녀는 당연히 자살하지 않았다. 다만 엉뚱하게 죽었다. 훗날의 명성황후처럼명성왕후도 무속에 심취했다. 그래서 무당의말을 신명(神命)처럼 받들었는데,1683년(숙종 9년) 아들 숙종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굿을 하고 계시를 받아왔다. 내용인즉, 왕에게 삼재(三災)가 내렸으므로 왕의 어머니가 홑치마에 삿갓을 쓰고 물매를 맞아 아들의 고통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일지 우매한 맹신일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한겨울에 그 같은 복장으로써 지속적인 물벼락을 맞았다.
결국 그녀는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며칠 신열에 시달리다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세상을 떴다. 나이 42세 때였다. 명성왕후가 훙서(薨逝)한 저승전은 창덕궁 낙선재 맞은 편에 있었으나 지금은 조경시설이 들어서 흔적도 찾기 힘들다. 당시에는 낙선재와 저승전이 모두 창경궁 영역에 속했다. 저승전은 사도세자 시절 불이 나 전소됐는데, 화재 후 재건하려 했으나 영조가 허락하지 않아 터만 남게 되었다.
순전한 뇌피셜이지만, 나는 숭릉의 정자각이 유독 팔작지붕인 것이 살아생전 엄청났던 명성왕후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정왕후의 태릉 봉분이 왕릉보다 장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글을 그렇게 시작했는데, 어제 일요일 오후 글을 맺기 전, 운동도 할 겸, 사진도 찍을 겸, 천천히 걸어 동구릉 숭릉에 가보니 나의 뇌피셜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
정자각 안내문을 읽어보니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팔작지붕(한문 여덟팔 자·八 모양으로 생긴 지붕의 형태)이나, <산릉도감의궤> 등의 기록에 따르면 영릉(세종의 능), 강릉(명종의 능), 장릉(인조의 능) 등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이었는데,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한문 사람인·人 자 모양으로 생긴 지붕의 형태)으로 바뀌어 현재는 숭릉만 팔작지붕 형태로 남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