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천 갈항사지 석탑 글씨는 김생의 것일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5. 00:17
일차 얘기한 바 있지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 한켠에는 국보·보물 및 이에 준하는 석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이름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으로, 여기에 있는 국가유산은 과거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시절 마당에 놓였던 석물들을 2005년 이관 때 일괄 옮겨온 것이다.
그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시절의 석물들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산물이다. 조선물산공진회는 공산품을 위시한 조선과 일본의 산업생산물들을 전시·소개한 일종의 박람회로서, 조선총독부는 이때 부대(附帶)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탑, 불상, 승탑, 석등 등의 석물들을 전시장인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관람하기 위해 광화문 앞길에 모인 인파들. 당시 경복궁 내로 옮겨진 석탑들 / 가운데 개성 남계원 7층석탑이 보인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의 개성 남계원 7층석탑
그 중에는 국보로 지정된 것도 다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위의 개성 남계원 7층석탑(국보 제100호)과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99호)이다. 오늘 포스팅하려는 것이 바로 김천 갈항사지 석탑으로, 본래는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갈항사지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탑이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그런데 이 탑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때 옮겨진 것이 아니라 그 이듬해인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이 탑이 뒤늦게 옮겨진 것은 뒤늦게 주목을 받은 까닭인데, 그때 주목받은 부분이 다름 아닌 동탑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銘文)이었다. 그리고 그 명문을 주목한 사람은 학자가 아닌 도굴꾼으로, 그로 인해 일본으로 반출되려는 것을 총독부에서 압수해 동탑은 1916년, 서탑은 1921년에 각각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각 아래와 같은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동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병과 사리호 서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병과 사리호 서탑 금동사리병 속에서 발견된 범어 다라니경
이 쌍둥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로서 상륜부는 망실됐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우주)을 본떠 새겼는데, 가운데 기둥(탱주)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의 돌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써 구성했으며, 탑신부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두 탑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비례미가 뛰어나며 상륜부 외에는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는 편이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전면 / 제작 연대가 쓰여 있는 유일한 석탑이다.
왼편 동탑 기단부에는 위에서 언급한 명문이 있다.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이 명문은 탑의 조성기로서,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까닭에 탑의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이 이두문(吏讀文)으로 쓰여 있다는 점이 더욱 눈길을 끈다. 우선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在師旅□□ 姉者照文皇太后君嬭在旅□□妹者敬信大王嬭在也
여기서 '재지(在之)', '재려(在旅)', '재야(在也)' 등은 이두문으로, "이 두 탑은 천보(天寶) 7년 무술년 중간 쯤에 3남매의 업(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세 사람은 동생인 영묘사 언적법사, 큰누이인 왕의 어머니인 조문황태후, 작은 누이인 경신대왕(원성왕)의 이모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동탑 2층 기단의 명문 / 총 57자로 각 글자는 6cm 정도이며 사진으로는 이 정도로밖에 식별이 안 된다. <황악신문>에서 좀 더 뚜렷한 사진을 빌려왔다. / 김천 <황악신문>은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김천 반환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명문 외에도 사천왕상 내지는 팔부중상을 조각했던 흔적 및 여러 장식물을 부착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각 1층 탑신 모서리 기둥에 5개의 정혈(釘穴, 못구멍)이 일렬로 나 있고, 기둥 안쪽에도 각 7개의 정혈이 두 줄로 나 있으며, 상하·좌우로는 각각 4개의 정혈이 보인다. 그 외 2층과 3층에도 기둥 안쪽에 각기 4개씩의 정혈이 있다.
동탑 1층 탑신의 못구멍
각 층 지붕돌 추녀면에서도 다수의 정혈이 발견된다. 이 중 지붕돌 끝에 뚫어진 것은 풍경을 매다는 풍경공으로 이해되나 다른 구멍들은 절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사천왕상 내지는 팔부중상이 돋을새김된 금판(혹은 금동판)이 탑의 표면을 덮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며, 위의 구멍들은 탑신 표면에 그 장식판들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었을 것이다.즉 이 두 탑은 석탑 표면이 금판, 혹은 금동판의 장식물로 치장된 유래 없는 미탑(美塔)이었던 것인데, 1층 탑신부에서 깎아 지워진 사천왕상 내지는 팔부중상이 이러한 추측을 돕는다. 본래 있던 이 부조(浮彫)는 금판, 혹은 금동판의 장식판으로 대체될 때 부착에 방해가 되었던 바, 정으로 모두 쪼아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서탑 1층 탑신의 못구멍과 사천왕상 조각 흔적 신라 풍탁 / 탑의 추녀 끝 풍경공에는 이와 같은 풍경이 매달려 있었을 것이나 장식물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하지만 신라인의 뛰어난 세공 솜씨는 익히 확인된 바 있다. / 사진은 감은사탑 사리장엄구 사천왕상 이 휘황찬란한 탑에 당대의 유명인사가 조성기를 썼다. 그 유명인사로 추정되는 이가 바로 전설의 명필 김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생은 771년(경운 2년) 태어났으며 807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필체가 가장 원숙미에 오른 원성왕(재위 785∼798년) 때 왕실의 부름을 받아 미려한 조성기를 쓰게 된 것이다. 만일 이 추측이 맞다면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는 현존하는 유일한 김생의 친필이 된다.
갈항사지 석탑기는 대부분 해서체지만 간혹 행서체의 글씨도 보인다. 서체가 태자사 낭공대사비와 유사한 북위(北魏)풍의 해서체이나 그보다 훨씬 서품이 높다는 평을 받는다. 이 글씨가 김생의 것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낭공대사비와 매우 유사하기도 하거니와 '십'(十)과 '중'(中) 자 등의 글자에서 세로획이 유난히 짧은 김생 글씨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왕희지 글씨의 집자라고도 하나 석탑 조성기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가난했던 김생은 따로 글씨를 배우지 못했고, 탁발승으로 생활하다 예닐곱 살 때에 불경 두 권을 사경하면서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그러다 스무살 무렵, 신라에 와 있던 일본 승려 혜담(惠曇)으로부터 왕희지가 북위 지방에 있을 때 썼던 글씨를 얻은 뒤 그 글씨를 모본(母本)으로 서체를 배우고 익혔다고 하는 바, 간혹 왕희지체로 오인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무튼 김생은 글씨로써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으니,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에 학이 날아와 부딪혀 죽었다는 솔거의 전설과 유사한 이야기들이 전한다. 이를 테면, 수미산 꼭대기에 사는 제석천왕이 사자를 시켜 김생에게 <제석경(帝釋經)>을 필사해 받아갔다거나, 나주 객사(客舍)에 도깨비가 들끓어 시끄럽자 '유색루(柳色樓)' 현판을 김생의 글씨로 바꿔 달자 그 필력에 눌린 도깨비들이 중행랑을 쳤다거나, 금강산 해금강에 사는 용왕의 아들이 김생에게 글씨를 배웠다는 이야기 등인데,(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한결같이 인간세(人間世)를 벗어난 일화들이다.
앞서 말한 '김정희가 찾아낸 후 기쁨으로 절규한 경주 무장사 비'에서 말한 '무장사 아미타불 조성기'는 발견 이래 지금껏 왕희지 글씨의 집자비인지 김생의 친필인지 갑론을박 중이다. 그 외 현존하는 김생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서첩인 '전유암산 가서(田遊巖山家序)'와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백률사 석당기'가 있으나 이상은 모두 김생의 사후 그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들이다.전유암산가서위 탁본 / 당나라 고종이 숭산을 헤매다 전유암을 만난 <구당서>의 유명한 일화를 조선 중종 19년(1524)에 김생의 글씨를 빌어 모각했다.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있던 비로, 신라 효공·신덕왕 때의 국사인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 832~916)을 기리기 위해 고려 광종 5년(954) 낭공대사의 문인인 석단목이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세웠다. 백률사 석당기 / 신라불교의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여 세운 석당으로, 목이 잘린 후 흰 피를 내뿜는 '이차돈의 사(死)'에 관한 그림과 내용이 쓰여져 있다. 신라 헌덕왕 10년(818) 제작되었으며 '이차돈 순교비'라고도 불린다. 갈항사지 보호각 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 / 보물로 지정된 갈항사의 유물이다. 불상의 뛰어난 조각 솜씨가 갈항사의 위격을 말해준다. (경상북도청 사진) 갈항사지 동 삼층석탑 각자를 다시 찍어 봤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누라 명성왕후에 눌려 후궁을 두지 못했던 유일한 왕 현종 (1) 2024.09.09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김정희와 황초령 비 (3) 2024.09.06 김정희가 찾아낸 후 기쁨으로 절규한 경주 무장사 비 (5) 2024.09.03 삼국통일의 성지 연천 대전리산성 (14) 2024.09.02 삼봉 정도전의 집터와 무덤 터 (3)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