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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김정희와 황초령 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6. 20:55

     
    추사 김정희는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때, 혹은 조용진, 조인영 등의 지인이 갔을 때 옹방강이나 유희해 등의 중국 고증학자에게 조선 금석문 탁본 및 금석문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전해주었다. 이는 표면상 학문교류의 성격을 띠고 있었나 내면으로는 은근히 조선의 우수한 문장을 자랑하고 있음이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꿀리지는 않다는 자긍심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학자들도 조선 금석문의 수준에 놀라 마지않았던 바, 이후로는 오히려 조선 사신들에게 조선 금석문의 탁본을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중국 학자가 유희해 가 쓴 금석학의 명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에는 조선인 김정희와 조인영이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사말로써 밝히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아래의 행서는 김정희가 25살 때인 1811년, 동지사(冬止使) 조윤대의 자제군관으로 친구인 조용진이 뽑혀 가게 되었을 때 이를 축하하며 쓴 칠언절구의 송별시이다. 내용은 '청나라에 가거든 소재(蘇齋) 옹방강 선생을 만나 인사드리고 내가 과거 옹방강에게 가르침을 받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바란다'는 뜻으로서, 젊은 김정희의 우정과 학구열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김정희의 7언절구의 송별시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유희해의 <해동금석존고>
    위에는 경주 태종무열왕비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옹방강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담계수찰첩> / 오른쪽 옹방강의 '고고증금 산해숭심' 글씨는 일본의 추사 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가 영인한 것으로 아래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의 모본이다.
    리움미술관의 가짜 김정희 글씨 / '산은 드높고 바다는 깊으니, 하늘에서 즐기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의미의 이 글은 207x 42cm의 대작이다. 미술사학자 강우방과 유홍준의 진위 논쟁'이 진행 중인데 가품이라고 하는 강우방의 주장에 한 표를 얹고 싶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조용진, 조인영 등도 보통이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인영은 추사가 32세 때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순수비를 재차 고증할 때 동행했던 인물이다. 이때 추사는 비의 옆면에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확인하였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라고 명기했는데,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추사가 아닌 조인영의 글씨로 보인다. 그 역시 금석학에 밝은 자였던 것이다.
     
     

    진흥왕순수비 북한산비 옆면의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진흥왕순수비 북한산비

     
    차제에 조인영에 말하면, 그는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할 정도의 영재였다. 게다가 그의 형 조만영의 딸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었던 바, 미래가 보장돼 있었다. 실제로는 조금 더 나아갔으니 1834년 순조의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이조판서, 대제학, 호조·형조판서를 역임하며 군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막을 열었다. 이후 우의정과 영의정이 되어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했으나 1849년 철종 즉위 후 몰아친 안동김문의 역풍 속에 죽었다.
     
     

    한옥션에 나온 조인영의 간찰 / 그 역시 추사 못지 않은 명필이었으며 문장과 그림에도 모두 능했다.
    추사가 조인영에게 보낸 편지 / 진흥왕비에 대해 논문 같은 편지를 썼다.

     
    앞서 말한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할 뻔한 김정희를 구해낸 것도 우의정 조인영의 탄원이었다. 이에 김정희는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었는데, 그의 고증학과 금석문에 대한 학구열은 9년간의 제주 정배에서 풀려나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갔을 때까지도 이어졌다. 그가 북청으로 유배 간 해는 1851년으로 당시 나이 예순일곱 살이었다.

     

    김정희가 2차 귀양을 가게 된 이유는 헌종의 묘천(廟遷)에 관한 문제, 이른바 진종조례론(眞宗祧禮論)에서 친구이자 영의정인 권돈인을 편들다 안동김문에 밉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종조례론은 1851년(철종 2) 진종(眞宗,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신주를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기는 문제를 두고 김흥근·홍직필 일파와 권돈인·김정희 일파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으로, 근본적으로는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듣보잡 왕족 이원범(철종의 아명)의 근본을 마련해 주기 위한 안동김문의 무리수에 영의정 권돈인이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이에 김정희는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를 살려 북방지역의 역사·지리·금석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으니 그 일환으로 지었던 아래의 <석노시(石砮詩)>는 북청시절의 역작(力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청 곳곳에서 발견된 석노(石砮, 돌화살촉)를 숙신(肅愼, 고 여진족)의 유물로 판정하여 이에 관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아래는 시의 앞부분으로 "돌도끼(石斧)와 돌화살촉(石砮)이 청해(북청) 토성에서 자주 나오는데, 이곳 사람들이 토성을 숙신의 옛 자취라 부르기에 이에 관한 시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석노시> / 북청에서 발굴된 석기를 주제로 쓴 256자에 달하는 장문의 시로, 사진은 첫 부분이다. 오세창의 표제와 권인돈, 정인보 등의 발문과 시가 붙은 명문이다.
    권돈인이 유배 기간 중 그린 <세한도> / 위의 사건으로 인해 김정희는 북청으로, 권돈인은 소백산맥 골짜기인 순흥으로 유배되었는데. 이후 다시 충청도 연산으로 이배되었다가 그곳에서 76세로 생을 마감했다.
    <세한도> 제목 옆에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 서로 오래 잊지 말자)이란 인장에서 추사와의 우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말미에는 추사의 화제도 붙었는데, 두 사람이 얼마나 기품 있는 삶을 살았는가가 이 한 폭의 그림으로 증명된다.


    북청 유배 시절의 최대 성과는 역시 신라 진흥왕이 황초령에 세운 황초령비를 고증하고 보전한 일이다. 추사는 북청 일대를 답사하며 신라의 고경(古境, 옛 국경)을 추정하고 마침 함경감사로 부임해 온 후배 윤정현(1793~1874)과 함께 과거 권돈인이 함경감사 시절 찾아낸 진흥왕순수비를 안전한 진흥리로 옮겨 놓았다.(진흥리는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리고 윤정현의 부탁을 받아 '진흥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옛 지경'이라는 뜻의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의 현판을 써 걸었다.

     

    황초령 / 함경남도 함주군과 장진군 경계에 있는 높이 1,200m의 고개다.
    진흥리 진흥왕순수비 보호각
    위보다 앞선 것으로 여겨지는 사진 / 밖에 걸린 현판이 보인다.
    이후로는 현판이 안으로 들어왔다.
    비각 안의 황초령비
    코베이 옥션에 나온 황초령비 탁본 / 지금까지 것 중 최상이다.

     

    진흥왕의 북방 순수비 가운데의 하나인 황초령비는 높이 151.5cm, 너비 약 48cm, 두께 약 21cm로 화강석이다. 전체 글자는 300자가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상부가 망실되어 240자 정도만 판독 가능하다. 지금은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순수비는 1931년 발견된 나머지 한 조각이 합쳐진 것으로 권돈인이 발견했을 때는 위의 상태보다 나빴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은 '태창 원년(568년/태창은 진흥왕 때의 연호) 8월 21일 계미일에 진흥태왕이 영토를 순수하고 돌에 새겨 기록한 글'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즉 신라 진흥왕이 과거 자신이 개척한 영토를 568년 친히 돌아본 후 이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 것인데, 황초령비의 발견으로 건립일이 지워지고 없는 북한산비의 건립연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이 무리 없이 비정되어진 것이다.

     

    비문에서는 '태왕(太王)'이나 '짐(朕)', '제왕건호(帝王建號, 황제로써 연호를 세움)' 등의 문자로써 황제국의 위상을 드러내며, 이후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였다'는 제왕의 치도(治道)를 적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토를 순행하면서 민심을 살펴 위로하고,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 및 새로 확보한 지역의 백성 중 왕국을 위해 충성하고 공헌하는 무리에게는 관직과 물질적 보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고 있다. 

     

    김정희는 앞서 진흥왕의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를 연구해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예당금석과안록)>라는 연구 논문을 펴낸 바 있다. 그는 지난날 절친 돈인이 함경감사로 갈 때 황초령비를 꼭 찾아보라 부탁했고 그로부터 두동강 난 황초령 비석의 탁본을 얻었는데, 그 탁본으로부터 지명·관명 및 글자 자체에 관한 세세한 고증을 행하다 보니 한 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후 유배길에서 그 비석을 친견했던 것이니 그 기쁨이 오죽했으랴. 

     

    그와 같은 기쁨에 충만해 쓴 글이 바로 '진흥북수고경' 현판이다. 이 글은 많은 추사체 중에서도 완성기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 고증학자로서 일생에 걸쳐 연구한 진흥왕순수비가 예술로 녹아들어 학예일치로 승화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특이하게도 왼쪽부터 2자씩 붙여 쓴 이 현판 글씨는 일견 묵직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학이 날아가는 듯 가볍고 경쾌하게도 보인다. 

     

    '진흥북수고경'의 탑본

     

    북한에 도유호(1905~1982)라는 고고학자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유럽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해 프랑크푸르트대학 수학 후 비엔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리나라 1세대 고고학자이다. (그는 해방 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북한의 고고학을 정립했으나 1960년대 후반 숙청되어 함경북도 회령 탄광으로 보내졌다. ☞ '제주도의 고인돌') 도유호는 일찌기 추사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고고학자로 칭했는데, 김정희의 행적과 연구 자세로 볼 때 절대 지나친 평가가 아니다. 

     

    김정희의 행적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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