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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를 쓴 이경석 무덤가의 시(詩) 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11. 18:14
이경석(1595~1671)은 1639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흔히 말하는 삼전도비의 비문을 쓴 사람이다. 청나라 황제의 공덕비가 삼전도에 세워진 것은 조선 왕 인조가 송파 삼전나루에서 청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누차에 걸쳐 설명했기에 그 날짜만을 상기하려 한다.
때는 1637년정축년 음력 1월 30일. 혹한의 겨울철에 강바람마저 매서웠을 터, 거기에 얼어붙은 땅바닥에 엎드려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왕을 생각하면 이 무더위가 조금은 상쇄될까?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태종은 다행히도 군사를 물려 제 나라로 돌아갔고, 조선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워야 했다. 문제는 만대(萬代)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치욕적인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으니, 정축년 3월 20일에 당대의 문장가 4명이 추려졌다.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이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후보 사퇴의 상소를 올렸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 4명은 꼼짝없이 비문을 찬출(撰出)해야 했으나, 이경전은 병을 구실로 차일피일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조희일은 일부러 개판으로 써 제출해 고역을 모면했다. 이에 장유와 이경석의 글이 청나라로 보내졌는데, 장유는 내용 중의 인용문이 마뜩지 않다 하여 탈락되고 이경석의 글을 보완해 새기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예문관 부제학 이경석은 자신이 비문을 짓게 된 일을 한탄하여 "글 쓰는 법을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有悔學文字之語)"고 했지만 결국은 악역을 담당해야 했다. 비석은 1639년 11월에 완성해 12월 8일 삼전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에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 식량이 떨어졌을 때 청태종이 공격하지 않고 항복하기까지 기다려준 일, 항복을 받아주고 예물을 하사한 일, 지난 날 광해군 때 후금(청나라의 전신)군을 치러 온 강홍립의 군대를 다치지 않고 돌려보내준 일이 기록됐다.
더불어 정묘호란 때 까불고 세폐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청태종이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말미를 준 일, 강화도를 도망갔던 빈궁과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았으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여 돌려보내 준 일, 나라가 멸망할 수 있었음에도 종묘사직을 보존케 해 준 일 등을 칭송해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찬(讚)했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익게 하고 키우시는데, 황제께서 그걸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함께 베푸셨도다. 황제께서 조선을 정벌할 때 십만 대군으로써 맹호출림의 기세로 오셨도다. 참전 군사들은 서역 사막의 군사들로부터 북방민족들까지 망라되어 창을 들고 덤비니 그 기세가 매서웠도다.
그러나 황제는 매우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렸으니 그 열 줄의 글은 준엄하고도 자애로웠다. 처음에는 어리석어 알지 못해서 근심을 끼쳐드렸으나 황제께서 명철하신 명을 내리시니 마치 잠 속에서 깨어난 듯하도다. 우리 임금께서 삼가 승복하여 신하를 거느리고 항복하니 이는 황제의 위력이 무서워서만이 아니라 큰 덕에 귀의하였음이리라....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 했던 이경석의 고역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었다. 이경석은 조선 사람이 모두 하기 꺼려하는 일을 맡아 처리한, 쉽게 말해 모두가 피해 가려고만 했던 한 무더기의 더러운 똥을 치운 의인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그 노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욕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졸렬한 그 자가 오랑캐 세력을 옹위하여 일신을 보전했던 바, 개도 그가 먹던 음식은 먹지 않을 것이다(則狗不食其餘)"라는, 차마 혼자 해서도 아니 될 말을 좌중에 내뱉었다. 이후 송시열과 그 일당들은 이경석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이경석은 그 모욕을 묵묵히 견디다 2년 뒤인 1671년 문득 졸하였다. 이후 1703년(숙종 29년)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 후손의 부탁을 받고 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나는 그 당시 살지 않았음에도 당대에 붓을 잡을 이, 서계 외에는 없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서계는 비문에 다음과 같이 위험한 글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경서에 이르기를, '노성(老成, 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함)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던 바, 노성한 사람은 중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노성한 자를 업신여기는 일인즉 천하의 일 가운데 가장 상서롭지 못한 짓이다.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함에 과감한 자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업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즉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손가.
비문은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긴 자들을 꾸짖으며 시작했다. 윗글의 노성한 사람은 이경석이고, 업신여기는 자는 송시열을 지칭하는 것임은 누가보아도 알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싯귀와 같은 문장으로써 글을 맺었다. 아랫글에서 세 임금을 모신 원로 · 봉황· 군자는 이경석이고, 올빼미 · 방자함으로 소문 난 자 · 착하지 않은 자는 송시열을 지칭함은 누가 봐도 알 일이었지만 서계는 개의치 않고 비유로 삼았다.
세 임금을 모신 나라의 원로이며 / 三朝元老
일세의 지극한 신하였으니 / 一代忱臣
나라 생각에 집안일은 잊었고 / 國忘其家
임금을 위해 일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 主不顧身
붉은 정성은 하늘의 해처럼 빛나고 / 丹誠炳日
깨끗한 절개는 서릿발처럼 매서웠나니 / 素節凌霜
험하고 지난한 일들을 / 險阻艱難
익히 겪으며 맛보았노라 / 亦旣備嘗
지극한 신뢰는 미쁨을 주었으니 / 至信所孚
미물들마저 감동시켜 마지않았고 / 能感豚魚
덕이 가득차고 행실이 높아 / 德全行高
붉은 붓으로 여러 번 기록되었도다 / 彤管屢書
위선과 방자함으로 소문 난 자는 / 恣僞肆誕
세상 어디에나 있는 법 / 世有聞人
올빼미와 봉황은 애초 다른 종자이거늘 / 梟鳳殊性
화를 내며 찢고까불도다 /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증오할 뿐 /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상관하랴 / 君子何病
다만 나는 명문을 새겼나니 /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이경석을) 공경할지어다 / 人其來敬
이러니 비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송시열의 추종자들은 당연히 들끓었으니 박세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더불어 박세당이 저서 <사변록>에서 기존의 성리학과 다른 주장을 하며 주자를 비판한 일까지 소환되었다."박세당이 주자(朱子)를 꾸짖어 헐뜯고 경전을 헐뜯어 어지럽게 한 죄는 이미 성균관 유생의 상소와 해조(該曹)의 계사(啓辭)에 자세히 말하였고..... 삼전도의 비문은 진실로 보기 어려운 사리(事理)가 아닙니다. 그것이 공의(公議)에 불만족한 것은 비록 삼척 동자라도 쉽게 알 수 있는데, 나아가 박세당은 이경석의 비문을 지으면서 문정공 송시열을 무욕(誣辱)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聖人)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욕하는 죄에 처할 만합니다. 원컨대, 좋아하고 미워함을 명백하게 보여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가 끝내 다행하게 하소서."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숙종도 이에 동조하여 박세당이 지은 모든 비문을 훼철하고 그의 저서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과 더불어 유배를 명했다. 하지만 그 아들 박태보가 유배길에서 먼저 죽은 일, 그리고 고령인 점이 참작돼 유배만큼은 면했다. 박세당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지만 그가 지은 비문은 용서 없이 훼철되었다.
대표적으로는 포천시 영중면에 위치한 선조의 아들 인흥군 신도비와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있는 이경석 묘소의 신도비가 작살났다. 그래서 그 두 기 무덤에는 훼철된 신도비와 훗날 새로 만들어진 신·구 두 개의 신도비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경석 묘소의 훼철된 옛 신도비는 너무도 깨끗하게 지워져 흡사 백비(白碑)처럼도 보인다. 멀리 포천과 이곳 석운동까지 발품을 팔며 그 짓거리를 행한 송시열 패거리들이 한편으로는 대단하게도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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