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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전도비를 쓴 이경석 무덤가의 시(詩) 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12. 19:30

     
    백헌(白軒) 이경석(1595∼1671)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16-18번지에 있다. 가다 보면 묘소 주변에 신종군 이효백(1433~1487) 등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어 일대가 전주이씨의 묘역임을 짐작케 한다. 이효백은 조선 2대 왕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의 아들이다. 활의 명인으로 불린 인물로서, 이시애의 난 때는 선봉장으로 나서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일화를 소개하자면, 1459년 세조가 참석한 모화관 시사(試射)에서 30개의 화살 중 29개 중 명중시켜 크게 감탄한 세조에 의해 당상관에 특채되었다고 한다. 이효숙·이효생·이효창 4형제가 모두 활을 잘 쏘았는데, 그중에서도 효백이 가장 뛰어나 세조·예종·성종의 3대에 걸쳐 이름을 떨쳤다고 하는 바, 국궁이나 양궁대회에 이효백 배(盃)나 이효백 상을 제정해도 괜찮을 듯싶다. 
     
     

    신종군 이효백과 부인 예안최씨의 묘
    이효백 묘의 문인석 / 조선 전기 세장(細長)한 문인석의 특징을 보인다.
    이효백 묘 안내문


    이경석의 묘는 부인 전주유씨와 합장된 단독분으로 남향한 높다란 언덕에 조성돼 있어 보기가 좋다. 묘표는 백색의 대리석으로 4면 모두에 비문을 새겼다. 전면에는'有明朝鮮國領議政文忠公白軒李先生景奭墓(유명조선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 貞敬夫人全州柳氏祔左(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의 비문이 있는데, 글은 현손인 이광회의 것이며 글씨는 유명한 원교 이광사가 썼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글씨가 확실히 명필로 느껴진다)  
     
     

    이경석 묘의 원경
    이경석과 부인의 합장묘
    묘표 전면
    묘표 후면
    묘표의 동쪽 측면
    묘표의 서쪽 측면

     
    건립연대는 崇禎甲申後再辛未(숭정갑신후재신미 / 1691년 / 숙종 17년)이다. 따라서 묘표는 이경석의 사망 20년 뒤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삼전도의 비문을 찬술한 데 대한 논란이 향후 20년 간이나 지속되었음이 더불어 짐작 간다. 묘표와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망주석, 문인석 등의 옛 석물이 좌우에 한쌍 씩 세워져 있는데, 사실미가 드러나는 수작(秀作)이다.
     
    금관조복형의 문인석은 작고 사실적이며, 다른 문인석에서는 보기 드문 온화한 표정이 마치 생전의 고인을 표현한 것만 같다. 8각형의 망주석은 상대적으로 화려하게 조각돼 있고, 기둥에 들러 붙은 석수의 머리가 약간 비틀어져 있어 사실감을 더한다. 흔히 '세호'로 불려지는 이 동물은 좌측의 것은 기어오르고 우측의 것은 내려가는 모양새를 취하는 데 유독 생동감이 느껴진다. 문인석과 망주석을 제작한 석수장이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한 듯싶다.
     
     

    문인석
    망주석 / 세호가 기어오르고 있다.

      
    봉분 중앙의 혼유석, 고복석, 상석, 계체석,(편평하게 다듬어 무덤 앞에 길게 놓는 돌) 6각의 향로석은 후손들이 새로 만든 것으로, 입구의 신도비를 조성한 1975년경 장명등과 함께 조성된 듯싶다. 아울러 묘소 왼쪽에 과거의 파손된 혼유석과 상석이 보존돼 있어 옛 모습을 더듬을 수 있다.
     
     

    봉분 왼쪽의 상석과 혼유석 흔적

     
    묘소 입구에는 문제의 신도비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경석의 신도비문은 1703년(숙종 29년)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 후손의 부탁을 받고 작문했다. 위 묘표가 세워지고도 다시 12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래서 이경석의 후손은 이 정도면 신도비가 세워지는 것이 시기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누차 말한 대로 그 비문의 내용이 문제였으니 결국 신도비는 세워지지 못하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스승 송시열을 욕보인 비문의 내용에 문하들이 들고 일어나 이경석 묘소의 신도비문을 훼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 묘소에 가서 살펴보니 비문은 훼철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듯싶다. 비문을 새길 돌은 마련해 놨으나 비문을 본 후손들이 질겁을 해 차마 새기지 못했던 듯하니, 그럴 경우 묘소와 묘표마저 훼철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비문은 그렇게 백비(白碑)로서 땅에 묻혔다. 이후 근자인 1975년 후손들이 새로운 신도비를 세웠다. 그런데 1979년 10월 10일 종손 이훈상 씨의 꿈에 선조 이경석이 현몽해 "원한 서린 옛 비석도 귀중하다"고 일갈하자 이에 놀란 후손들이 땅에 묻힌 옛 비석을 꺼내 1979년 11월 26일 삿갓과 대석을 새로 제작해 세웠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신도비 옆 재정비 건립비에 새겨져 있다.

     

     

    위 내용이 쓰여 있는 재정비 건립비


    1975년 세워진 새 신도비는 상부에 전서로 4면에 걸쳐 '領議政謚文忠公神道碑銘(영의정익문충공신도비명)'이라 쓰여 있고, 비제(碑題)는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贈謚文忠公李公神道碑銘 幷序(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증익문충공이공신도비명 병서)'이라 한 후 이경석의 행적을 적었는데,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의 문구는 유감이다. 이광사가 쓴 묘표야 당대의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명나라에 속한 조선국'이라는 사대주의자들의 글귀를 후손들까지 차용할 필요는 없을 진대.  
     
     

    이경석의 옛 신도비(왼쪽)과 새 신도비 / 오른쪽 비석은 '백헌 이경석 선생 문학비'
    조탁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구 신도비 / 처음부터 글자가 새겨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신도비와 묘소의 중간쯤에 이경석의 시 3수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신도비에 쓰여 있는 내용을 따르자면 이경석은 1650년의 이른바 경인년 사건을 비롯해 수차례 외교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다. 경인년 사건은 효종 1년 청 사신 6명이 조선에 파견돼 조선이 성곽수리나 병력증강 등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위배했다며 문책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이경석이 대표로 나서 이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일일 뿐 약속 불이행이 아니라며 사신들을 무마해 돌려보낸 적이 있다.
     
    이후로도 청나라에서는 툭하면 조선에 사신을 보내 감시하고 시비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사신들이 국경을 넘을 때부터 이경석을 파견하여 무마에 나섰다. 청나라 사신들은 여러 가지로 트집잡기에 나섰지만 그럴 때마다 이경석은 논리 있는 답변으로 상대를 녹아웃시켰다. 하지만 체면 상한 사신의 심기를 달라줄 필요성에 효종은 태도의 불경함을 문제 삼아 이경석을 평안도 의주의 백마산성에 위리안치하겠다 하고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물론 귀양은 보내지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인조 19년(1641)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명나라 선박이 평안도 선천에 정박한 일에 대해 청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강하게 항의한 것이었다. 이때 대표로 나선 이경석은 청천강을 건너 의주로 가 청나라 사신을 만난 후 "이는 명나라 장사배들이 잠상(潛商)을 위해 정박한 것일 뿐 조선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무마시켰는데, 이때도 청나라는 이경석의 태도를 문제 삼아 만주 봉황성에 유폐시킨 적이 있었다. 이경석은 8개월 후 풀려났다.   
     
    이상의 일화는 당대의 외교를 짊어진 이경석의 고군분투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묘소에 새겨진 아래의 시에는 당시가 얼마나 위험하고 급한 상황이었는지, 이경석이 얼마나 고국과 자신의 안위에 대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가 문장 속에 다빈치 코드처럼 숨겨져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청천탄야도(晴川灘夜渡)
     
    장강의 밤은 칠흑 같고 비는 쉼 없이 내리는데,

    민심이 흉흉하니 물소리도 요란하다.

    구국일념으로 야반에 이 강을 건너가네.
    이 마음 오로지 천지신명만이 알 것이니 굽어 살펴주소서
     
    長河月黑絲絲
    人語灘聲共漑時
    半夜直將忠信涉
    此心誰直鬼神知
     

     

    위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

     
    이 시는 당연히 '장하월흑우사사(長河月黑雨絲絲 / 청천강의 밤은 칠흑 같고 비는 쉼 없이 내리는데)'로 시작됨이 원칙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비 우(雨)' 자가 빠져 있다. 그래서 무덤 아래 백헌시비에도 '우' 자가 빠진 그대로 새겨졌다. 이경석이 '우' 자를 빼먹은 이유에 대해서는 의도적인 생략이라는 말도 있으나 의도적으로 생략돼야 할 연유를 딱히 찾기 힘드니 창졸간에 누락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듯하다. (후손들이 발행한 <백헌집>에는 '우' 자가 삽입됐다) 

     

     

    종중에서 세운 시에 관한 주서(註書)


    다시 말하지만 '청천탄야도(청천강 여울을 밤에 건너다)'라는 이 시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정신 사나웠는지가 증명된다. 하지만 백헌시비에 적힌 또 다른 시 '금강예찬'과 '지리산'은 여느 시인의 시처럼 그저 시적이다.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강예찬(金剛禮讚)
     
    꿈에 그려온 금강산에 올라 소원을 풀었으나
    풍진세상 헛되이 보내니 어느 덧 백발노인
    이제야 참 경치를 찾았으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꿈 깰까 두렵구나.
                        
                      夢想平生在嶺東                   
    紅塵空作白頭翁
    於今始得尋眞景
    還恐慈行是夢中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봉우리 가을잎 붉게 물들고
    산 정상 천봉이 누아래 보인다.
    이번엔 말을 타고 왔으니 청학동 길이 미심쩍고
    흰 구름이 떠나듯이 옛 친구는 없구나.
     
    鳳城秋葉落紛緽
    方丈千峯入眼斥
    驛騎未尋靑鶴路
    白雲如挽舊遊人

     

    '청학동'이 새겨진 시비의 뒷면
    삼전도비 전면
    전면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쓰여졌다.
    비는 돌아 돌아 2000년 제자리 비슷한 위치로 옮겨졌다. 이곳 석촌호수변이 옛 한강 삼전나루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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