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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 명당이라 하는 동구릉 헌종 능의 허망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16. 22:19

     
    입추가 지난 지 한 달이 넘었건만 날씨가 연일 무더운 관계로 늘 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이제 일주일 후면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인데, 날씨가 여전히 푹푹 찌니 전래의 '24 절기'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전래 속담 같은 것도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절기 대로라면 한여름에 서리가 내려야 할 판이니 말이다. 초목도 변화된 시절에 적응한 듯 예년 같으면 누리끼리해져야 할 풀이 마냥 푸르다. 이번 주 찾은 경릉(景陵)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경릉의 정자각

     

    동구릉 경릉은 제24대 헌종(1827~1849)과 그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으로 동구릉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무덤이다. 말하자면 동구릉 아홉 개 왕릉 중의 아홉 번째 능인 셈인데, 늦게 선택된 장소답지 않게 풍수가들이 "조선 왕릉 중의 최고 길지", "용세와 혈증이 확실하고 열이면 열이 다 좋다"고 입을 모았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헌종이 1849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창졸간에 죽은 후 조선의 내로라는 지관들이 내놓은 열세 군데의 길지 중의 으뜸이었다는 말도 전한다.

     

     

    경릉 전경
    경릉의 능침

      
    하지만 이것은 모두 헛소리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개소리다. 연유를 설명하자면 이곳 경릉은 과거 선조의 무덤인 목릉이 있던 자리였는데, 지반이 불안정한지 상설(능침의 석물)이 자꾸 쓰러진 바람에 인조 8년(1630) 파묘되어 동구릉 내의 다른 자리로 천장(遷葬)된 바 있다. 이것이 지금의 목릉이고, 본래의 자리는 내내 비어있다가 200년 후인 1843년 헌종의 원비 효현왕후(1828~1843)가 안장됐다.
     
    이것이 현재의 경릉이다. 즉 경릉은 왕의 무덤이 아니라 16세의 나이로 죽은 헌종의 원비 효현왕후가 파묘 자리에 묻힌 왕비의 무덤이다. 이후 6년 뒤에 헌종이 죽자 산릉도감에서는 왕의 장지를 찾는 시늉을 하다가 효현왕후의 경릉 곁에 유택을 지어 안장했다.

     

     

    상식적으로도 파묘 자리가 명당일 리 만무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경릉 자리는 지금도 불안정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사는 토압(土壓)으로 인한 봉분 흙 밀림 현상을 막기 위해 당시의 최신 공법인 콘크리트로 봉분 주위를 타설했는데, 그 콘크리트가 최근인 2018년 봉분 크기 조정 후 제거됐다.
     
     

    제거 전 경릉 봉분 주위의 콘크리트 구조물 / 국가유산청 사진

     
    그리고 능묘의 이름도 따로 제정하지 않고 그냥 경릉을 따랐다. 처음에는 숙릉으로 제정했지만 어느 순간 무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이 먼저 간 왕비 곁에 묻히지 않는 기존의 전통도 깨졌다. 목릉이 파묘해 옮겨 간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상설이 자주 쓰러지는 변고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흉지라서 이장된 것이었지만 신하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효현왕후의 무덤 곁에 무성의한 장지를 꾸렸다. 
     
    왜 그랬을까? 우선은 헌종의 후사가 없던 까닭이었다. 드라마에서 자주 강조되는 대로 헌종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미남 왕이었다고 할 만큼 잘 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궁중의 여인들은 누구나 흠모해 마지않았고 그 또한 호색한으로서 여색을 밝혔다. 정력제인 보약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그것이 탈이었던 듯, 현대의학의 소견으로는 헌종의 사인을 약물 과잉으로 인한 간염이나 간경변 합병증으로 보고 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속의 헌종

     
    헌종은 아버지 효장세자(순조의 아들)가 일찍 죽는 바람에 1834년 7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순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까닭에 왕대비 순원왕후의 오랜 섭정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문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헌종도 15세 때 친정에 임해서는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해 안동김문을 억누르려 들었다.
     
    일례로 삼정의 문란으로 어려워진 백성들을 보살피고자 어사 김정희 등을 지방에 파견하고, 병조판서에 안동김문이 아닌 자를 임명해 군권을 장악한 후 선대왕 정조처럼 친위부대(총위영)를 증강시켜 왕권의 강화를 꾀했다. 죽은 효현왕후를 대신할 계비로도 안동김문의 자식이 아닌 남양홍씨 집안의 딸을 맞았다. 이 자가 효정왕후이다. (반면 죽은 첫 왕비는 안동 김문 김좌근의 딸이었다) 
     
     

    어사 김정희 영세불망비 탁본 / 충남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소제의 공덕비로,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의 선정이 새겨져 있다.

     
    헌종은 제 아버지 효장세자를 닮아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또한 여색 밝힘증도 겸비했는데, 따라서 늘 바빴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독서·휴식 공간과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두는 묘안을 마련했던 바, 그것이 창덕궁 내의 민가 형식의 궁궐 낙선재였다. 그는 자신이 지은 이곳 낙선재에서 치도(治道)에 대해서도 궁구했을 것으로 본다.  
     
     

    헌종의 독서 휴식 공간이던 낙선재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석복헌 / 낙선재의 안채 격으로 후궁 경빈 김씨가 살았으나 불과 1년 뒤 헌종이 승하하며 궁을 나와야 했다.
    석복헌 동쪽의 수강루 / 헌종이 낙선재를 지으면서 낙선재 권역으로 편입시킨 건물로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머물렀고 훗날 덕혜옹주가 서거 때까지 살았다.
    낙선재 뒤 상량정 / 낙선재에 딸린 정자이다. 훗날 당구에 빠진 순종이 옥돌대(당구대)를 놓고 즐겼다.
    낙선재 화계
    헌종이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던 한정당

     

    하지만 생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더욱 불행히도 후사조차 없었다. 헌종이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22세로 승하하자 강화도에서 데려 온 일자무식의 농사꾼 이변이 왕이 되었다. 순조 이후 워낙 씨가 귀했던 탓에 헌종의 주변에서는 왕위를 이을 친족이 없었다. 이에 안동김문에서 1786년(정조 10) 강화도에 유폐됐던 은언군(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의 손자 이변을 데리고 와 왕위에 올리니 이 자가 바로 철종이다.
     
    철종은 농사짓고 땔감용 나무를 벌목하던 나무꾼에서 안동김문에 옹립되어 졸지에 왕이 된 자였다. 이에 힘이 있을 리 없었으니 부인도 안동김문의 여식(철인왕후)을 맞았고, 국정 역시 안동김문이 하라는 대로 따랐다. 반면 허수아비 왕을 세운 안동김문은 바야흐로 60년 세도가 만개하게 되었으니, 그런 그들에 있어 후사 없이 죽은 왕의 능침을 정하는 일 따위가 중요하게 여겨질 리 없었다.

     

     

    철종이 살던 영흥궁 / 본래 초가집이었으나 잠저(潛邸)로써 궁이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살아생전 왕비 곁에 묻히겠다는 전교가 없는 한, 왕이 왕비 무덤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이 조선왕조 전통의 장법이다. 안동김문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장법을 무시하고 겉으로는 길지를 찾는 척하다가 10월 28일 경릉 효현왕후 곁에 묻었다. 이미 안동김문이 된 세상이니 뭐라고 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계비인 효정왕후는 건강체여서 73세까지 장수하다 20세기인 1904년 죽었다. 그리고 역시 경릉에 묻혔던 바, 동구릉 경릉은 조선왕릉에서 유래 없는 삼연릉으로 조성되었다. 능묘 3개가 연이어 있는 유일한 왕릉인 것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문제를 하나 내볼까 한다. 이 3개의 무덤 중 헌종의 능은 어디일까?

     

     

    경릉의 부감 / 국가유산청 사진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가운데 무덤을 찍었을 것이다. 그래야 정상이니까. 하지만 헌종의 능은 위 사진으로 볼 때 오른쪽 무덤으로, 왼쪽부터 계비 효정왕후, 정비 효현왕후, 헌종의 순이다. 왕임에도 구석으로 밀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헌종의 국상 중에도, 이후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능침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우위(優位)라는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이 그대로 지켜진 까닭이다. (※ 당시는 계비 효정왕후가 묻히기 전이었다) 

     

     

    이 사진에서는 헌종 · 효현왕후 · 효정왕후 순이다.

     

    경릉의 삼연릉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해 보이고 또 이색적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사실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석양과도 다름없는 풍경이다. 기울 대로 기운 조선 왕실에서 광무 8년(1904) 73세로 승하한 헌종의 계비에 대한 국장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었을 리 없을 터, 헌종이 묻힌 경릉에 대충 묻혔다. 다만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은 지켜진 채. 

     

    조선 왕릉 최초이자 마지막인 삼연릉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래서 경릉의 삼연릉은 왠지 떳떳지 못한 구석에 이색적임에도 별다른 언급 없이 지나가고 (아니 오히려 언급을 회피하고) 그저 '경릉은 조선왕릉 최고 명당'이라는 헛소리만이 강조된다. 

     

     

    헌종은 10자라는 왕릉의 장법이 무시된 채 백성들 묘 깊이에 불과한 약 5자(1.5m)만 파서 묻혔다.
    경릉은 홍살문·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도 않다. 무성의의 완결판이다. 그래서 신권이 제왕을 능멸한 왕릉이라고도 불린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헌종 사후 조선왕조는 망한 셈이나 다름없다. 헌종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나라 경제의 핵심 삼정(三政)은 철종 때 그 문란이 극에 달했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안동김문의 부패에 대항해 흥선대원군이 역시 후사가 없었던 철종의 대안으로 세운 아들 고종은 조선 망국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솔선수범해 매관매직을 하던 정신 나간 왕이었는데, 그 다음 왕이자 조선왕조 500년의 대미를 장식했던 순종은 황위를 앗아가고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감사하던 정말로 정신병증이 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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