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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원릉 ㅡ 본부인이 아닌 후처와 함께 묻힌 까닭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21. 22:55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영조는 본처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영조가 일방적으로 싫어한 경우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었고 대신 후궁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효장세자를 비롯한 1남 1녀를, 영빈 이씨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비롯한 1남 3녀를 얻었다. 하지만 인자하고 따뜻한 성품의 정성왕후는 정빈 이씨 소생의 효장세자와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를 비롯한 후궁의 자식들을 제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이는 타고난 성품이 아니고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녀를 싫어했던 영조도 정성왕후 사후 행장에 "궁궐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육상궁 제사에 기울인 정성을 감사히 생각한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데 영조는 이와 같이 착한 정성왕후를 왜 싫어했을까?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야사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인 15살 때 경기도 양주의 출신의 2살 연하 서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 첫날밤, 연잉군이 색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손이 참 곱구려."
서씨가 수줍어하며 답했다.
"고생을 안 해 그렇습니다."
그 말에 영조는 기분이 확 상했다. 서씨가 무수리 출신인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했다고 여긴 것이었다. 서씨가 그럴 리는 전혀 없었겠건만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이 평생의 콤플렉스였던 영조였기에 그렇게 들릴 법도 했다. 이후 영조는 서씨와는 합방은 물론 상종조차 안 했다.
숙종의 아들 연잉군은 왕비나 후궁의 소생이 아니라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다. 무수리는 궁에서 가장 천한 계급으로 나인들의 허드렛일을 도맡던 궁비(宮婢)와 같은 존재이니 그 현격한 신분차이로서 왕과는 엮일 일이 없었다. 노비와 왕과의 동침이라니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무수리 최씨는 승은을 입었다.
그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야사에 따르면, 숙종은 어느 야심한 밤, 궁중을 거닐다 불이 밝혀져 있는 곳을 발견하고 궁금증에 가본다. 낮은 궁인(宮人)들이 사는 처소였는데, 그곳에서 한 무수리가 촛불을 켜놓고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왕이 연유를 물으니 사색이 되어 하는 말이 자신은 왕비 인현왕후를 모시던 몸종이었는데, 오늘이 마침 그분의 생신이라 만수무강을 비는 치성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이에 감동했다. 자신도 잊고 있던 인현왕후의 생일을 한낱 무수리가 챙겨준 것인데, 게다가 왕은 이제는 희빈 장씨(장희빈)가 지겨워지고 희빈 장씨에 의해 쫓겨난 본처 인현왕후를 다시 그리워하던 참이었다. 그러니 이 무수리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영조는 그렇게 태어났다. 숙종은 정비인 인경왕후나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 하지만, 후궁인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경종이 되고, 또 연잉군이 왕이 되었으니 후궁 두 사람이 사직을 이은 셈이다. 무수리의 자식인 연잉군이 왕이 된 데는 다분히 운이 따랐다. 경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상태에서 일찍 훙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결국 이복동생 연잉군이 1721년 왕세제(王世弟, 동생으로서 후계자가 된 까닭에)에 책봉되었다.
영조는 사후 동구릉 원릉에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혔다. 정순왕후는 영조 64세 때 정비인 정성왕후가 죽자 3년상을 마친 후 새로 맞은 부인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14세. 그래서 흔히 정력팔팔했던 영조가 영계를 부인으로 삼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사실 영조는 기존의 후궁 중에서 계비를 맞을 생각이었으나 국법에 가로막혔다. 장희빈에게 질린 숙종이 향후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령을 만들어 못박은 까닭이었다.
이에 영조는 별 수 없이 간택의 절차를 마련하였고, 1759년 6월9일 창경궁 통명전에서의 삼간택 끝에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한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 선택되었다. 이 소녀가 정순왕후 김씨이다.
반면 왕비였던 정성왕후는 서오릉 홍릉에 홀로 묻혔다. 그래서 생전에 불편했던 영조와 정성왕후의 관계를 사후까지 이어가려는 시각이 있지만 이것은 전혀 옳지 않다. 영조는 살아생전 자신의 아버지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 원했다. 그래서 숙종의 능인 서오릉 명릉 가까이에 정성왕후의 무덤을 조성하며 바로 옆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비워 두었다. 하지만 영조의 뜻과 달리 영조의 능은 동구릉 내에 조성되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
당연히 여러 설이 분분한데, 나의 뇌피셜로는 영조의 능침이 동구릉에 마련된 것은 오로지 정조의 정치 감각의 산물이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할머니인(정조보다 겨우 7세 연상이지만)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향후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이 될 것임을 감지하였고 실제로도 정국이 그렇게 전개됐다. 이에 정조는 선제공격을 감행하니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에 대해 혜경궁(정조의 모친)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김귀주는 1786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정조는 그보다 먼저 다른 외척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정리하였으니, 1776년 즉위하자마자 홍인한과 정후겸을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 보낸 후 곧 처형시켰다. 정조는 이 숙청작업에 왕대비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김문의 힘을 빌렸는데, 먼저 그에 대한 당근책으로써 동구릉 원릉에 영조의 능침을 마련했다. 즉 왕대비 정순왕후께서는 사후 원릉의 남편 곁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유화술로써 경주김문의 힘을 어렵지 않게 빌렸던 것이니, 말하자면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같은 고도의 정치력이 구사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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