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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이근택의 99칸 별서 저택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9. 23. 19:22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산34-3 양지바른 곳에 1912년 죽은 정헌대부 의정부찬성 이민승의 묘가 있다. 이 사람은 필시 구한말의 벼슬아치겠지만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다섯 아들인 근호·근택·근홍·근상·근목은 친일파로서 모두 유명하니 세인들이 '5귀'(五鬼)라 부르며 경원했다. 그중에서도 둘째 아들이 가장 발군이었으니 그가 바로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근택이다.
그 형제 중에서 근호·근택·근상, 그리고 그 아들들인 동훈·창훈·장훈은 작위를 받아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되었는데, 이근택의 아들 이창훈은 부친의 자작 지위를 승계받았으며 1928년 쇼와 일왕의 즉위식에 조선귀족 총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는 한일합방시 조선총독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과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아들 이동훈에게 승계되었다.
이러니 일제강점기 그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웠을지는 보지 않았어도 알 일이다. 그중 이근택이 살던 99칸 저택은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 흔히 대궐 같은 규모의 대저택을 '99칸집'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민가는 궁궐의 규모인 100칸을 넘지 못하게 제한한 까닭에 '99칸집'이라는 말이 생겼다. 99칸을 가옥이 99채라고 오해하기도 하나 1칸(間)은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작은 가옥은 대개 3칸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근택의 집은 99칸이 넘는 130칸의 집이었다. 본래 이 집은 1861년(철종 12) 유학자이자 토호(土豪)인 이병진이 수원 팔달산 기슭에 건립했다.(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이것을 이근택이 한일합방 무렵 구입하여 1919년 죽을 때까지 살았는데, 이때 증축을 해 1600평 대지에 130칸 집이 되었다. 이 집을 1922년 수원 갑부 양성환이 구입해 이후 양성관 가옥으로 불렸는데,('성관'은 양성환의 자·字) 양성관 가옥의 사랑채는 한국전쟁 당시 수원지방검찰청의 임시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것이 1973년 한국민속촌에 이축돼 지금은 '중부지방 양반가'(일련번호 22호 집)로 전시돼 있다. 하지만 이근택이 살던 집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어 관람객에게는 그저 중부지방의 대저택으로 인식된다. 사실 이 집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많이 보아왔으니 <설중매> <한명회> <여인천하> <대장금> <다모> 등 역사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리오너라"를 외치는 솟을대문이 바로 이 집 대문이고, 그가 안내받아 들어가 정좌하던 곳이 이 집의 사랑채다.
이근택의 아비 이민승의 묘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관계로 언뜻 이근택을 서울 양반가 출신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민승의 감투와 묘지는 순전히 아들들 덕분으로 사후 서울 보문동 보문사 부근에 묻혔다가 1913년 현 장소로 이장되었다. 본래 이근택의 집안은 충청도 충주의 토호로서,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왕후(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꾸준히 진상함으로써 출세길이 트이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가회동에 살았는데,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이근택이 을사조약 문서에 도장을 찍은 후 귀가해 "우리 집안은 지금부터 부귀영화가 시작될 터이니 장차 무궁한 복락(福樂)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자 집안 식구들이 기뻐 날뛰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이어서 가히 놀랄 만한 대목이 등장한다. 부엌에서 그 말을 들은 여종이 고기 썰던 칼을 도마에 내리꽂은 후 나와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어찌 그 같은 짓을 하였소? 당신은 참으로 개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오. 비록 천한 종이라 하나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겠소? 내가 힘이 약해서 당신을 요절낼 수 없는 것이 한스럽소. 나는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오."
이 기개 충천의 여인은 본래 한규설 집안의 여종으로 한규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올 때 따라온 교전비(시집갈 때에 신부가 데리고 가는 여자 종)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은 이 부당한 조약에 확실한 반대의사를 표명한 유일 인물이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한규설을 수옥헌(중명전) 구석 방에 감금하고 늑약을 체결해 통과시켰다. (고종은 이 중요한 조약을 회피하여 대신들에게 일임시켰다)
이근택은 당시 군부대신이었지만 이 기개 높은 여종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을 듯싶다. 이근택은 이듬해인 1906년 2월 16일 새벽 분노한 민중의 칼을 맞고 중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를 암살하려 한 열사의 이름의 기산도(奇山度)였다. 기산도는 붙잡혀 고문을 당한 후 투옥되었다.
이근택은 한성병원에서 한 달간 입원했을 정도로 자상(刺傷)이 심했으나 회복해 고종으로부터(오기 아님!) 을사조약의 공로로 훈1등(勳一等) 태극장이 수여됐고, 그를 치료한 의사는 2등 태극장을 받았다. 죽을 놈을 살려냈으니 훈장을 받을만했지만 좀 떨떠름하다. 천벌로 갈음될 놈을 살려냈으니 말이다. 그래도 환자를 거부하는 요즘의 의새보다는 의사로서의 본문을 다한 사람이다.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는 죄로 파면당했다. 이는 <고종실록>에 실려있는 사실이며, <매천야록>에는 '이토는 조약의 성사를 위해 엄청난 뇌물을 정부 인사들에게 고루 뿌렸는데, 이 돈으로 탐욕한 대신들이 많은 전답을 마련하여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쓰여 있다. 수원의 99칸 집도 필시 이 돈으로 마련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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