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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단(雩祀壇)을 찾아서(I) - 보광동 우사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24. 20:27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예기/禮記》<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이로 인해 한민족 역사 중에서 적어도 조선은 천신(天神)에 제사 지낼 자격이 없었고 오직 땅과 곡식의 신에만 제사 지낼 수 있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제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바, 《예기》에 쓰여 있는 규범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단(天壇)이 없고 종묘와 사직만 있었다. 종묘는 조상신에게,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은 서울 외에도 부산, 동래, 진주, 대구, 남원, 광주, 보은, 산청, 창녕, 고성 등에 세워졌는데, 부산 사직야구장의 이름은 사직단이 있던 사직동의 동명에서 유래되었다.
중국 북경의 천단 서울 종묘 서울 사직단 /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두었다. (나무위키 사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예외적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 있었다. 풍백(風伯), 운사(雲師), 뇌사(雷師), 우사(雨師)에 제사를 지내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및 현명(玄冥)씨에게 제사 지내는 우사단(雩祀壇)과 사한단(司寒壇)이었다. 현명씨는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우리 민족, 즉 동이족과는 불가분의 신이다.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현명씨는 백제(白帝) 소호씨(少皥氏)의 아들이다. 소호씨는 삼황오제의 마지막 인물인 황제(黃帝)의 아들로서 동이족(東夷族)의 시조라고도 전해진다. 즉 현명은 황제의 손자가 되는 셈인데, 인간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하였고(人面鳥身) 머리 두 개 달린 용을 타고 다니며 풍우조화를 일으키는 겨울과 물의 신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식으로 설명하자면 황제는 제우스, 현명은 넵투누스(Neptūnus/ 영어 이름 넵툰)에 비유된다.
넵투누스의 이미지 / 우째 동양의 현명씨하고 비슷하다.
현명씨에게 제사 지내는 사한단은 동호 두모포(옥수동)에 있었다. 사한제는 겨울에 한강의 얼음이 꽁꽁 얼도록 기원하는 제사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경칩 &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설명한 바 있다. <영조실록>에는"우사제(雩祀祭)와 사한제(司寒祭)는 모두 현명씨(玄冥氏)를 제사하는 것임에도 우사제 축문(祝文)에는 '현명씨'라 쓰고 사한제의 축문에는 단지 '현명'이라고만 써서 '씨(氏)'자가 없으므로 한번 규식을 정함이 마땅하다고 앙달하니, '씨'자를 첨가해 써서 그대로 정식을 삼으라고 명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사한단 터 표석 / 조선시대 빙고의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기한제(祈寒祭)를 지낸 곳이다. 1908년 철폐되었다. 성동구 옥수동 현대아파트 앞의 사한단 표석
우사단은 가뭄이 계속될 때 하늘에 비를 빌어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던 제단으로 <서울지명사전>에 의하면 용산구 보광동 인근에 기우제(祈雨祭)와 기설제(祈雪祭)를 지내던 우사단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농업을 근간으로 삼던 나라가 가지는 물의 중요성 때문인지 우사단은 한 곳에 국한되지 않았으니, 용산구 보광동 외에 흔히 남단(南壇)으로 불렸던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의 풍운뇌우단, 제기동 우사단 등에서도 기우제가 행해졌다.
그런데 그 중요한 풍운뇌우단과 우사단의 위치가 오리무중이다. 나아가 크게 헛다리를 짚기도 했으니 2005년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사적분과위원들은 용산미군기지 내에 있는 구 일본군 군마(軍馬) 위령탑인 '애마지비(愛馬之碑)'의 기단을 남단의 흔적이라고 발표했다가 망신을 샀다. 일본군 야포 연대인 제26연대가 포 운반에 징발되었다가 노역(勞役)으로 죽은 말들을 위해 세운 기단을 세조 임금 등이 하늘에 제사 지낸 남단의 흔적이라고 발표했던 것인데, 지금은 어떻게 처리됐나 모르겠다.
국토교통부 산하 용산공원추진기획단 홈페이지는 용산미군기지 캠프 코이너 내에 있는 이 석물을 "조선시대 한양도성 내 종묘 사직단과 더불어 한양도성 밖 성저십리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제례시설로,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던 남단 터"라고 소개하였다. (뉴 데일리 사진) '남단 터'에 대해 설명하는 유홍준 문화재청장 국토교통부는 이 석물을 '용산 10경'으로 지정했다. 2005년 문화재청이 이곳을 '조선왕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남단 흔적'이라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인데, 알고 보니 일본군 군마 위령비가 있던 곳이었다. /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천수님 사진 일본군 군마 위령비의 과거 사진으로, 한 눈으로 보아도 일본식 축성방식의 탑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아래에는 '馬魂碑 朝鮮第26部隊(마혼비 조선 제26부대)'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천수님의 사진으로 이 사실을 밝혀낸 분이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는 1860년대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부속 <경조오부도>와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만든 <경성부사>의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부근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삼광초등학교는 이미 그 자리에 삼판심상소학교라는 일본인 학교가 거쳐갔고 이후 교사도 새로 지어져 옛 자취가 남은 것은 전혀 없으니, 지금 보이는 것은 우뚝한 남산뿐이다.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본 남산
보광동에 있었다는 우사단은 아무래도 지금의 '이슬람 서울 성원', 흔히 말하는 이태원 회교사원 자리에 있었을 것 같다.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캐밥집 케르반을 끼고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곧 '우사단로'인데, 우사단길은 보광초등학교 입구인 '우사단로10길'에서 끝난다. 지금 그 길에서 아랍계 외국인이나 히잡을 쓴 여인을 보는 것은 한국사람을 보는 것보다 쉽다. 그 길은 중앙아시아 및 아랍권 나라들과 관련 있는 음식점, 무역회사, 여행사, 옷가게, 잡화점, 할랄 식재료를 파는 식료품점들이 점유한지 이미 오래다.
우사단로 & 청소년 통행제한 표지판 한국어 간판을 찾아보기 어려운 우사단로 할랄 음식을 파는 마트 터키 홍차나 커피류가 있는 터키식 카페 케르반 'Indonesian Korean Arabic Food'라고 쓰여 있는 가게
그리고 우사단로의 끝에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이 있다. 이 이슬람 사원은 생각보다 연혁이 깊어 1969년 5월 한국정부가 약 5000㎡(1500평)의 성원 건립 용지를 한국 이슬람교 측에 기부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국가가 건립 비용을 지원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착공은 1974년 10월에 했다. 개원은 1976년 5월 21일 완공과 더불어였는데 어찌 보면 역사적인 날이다.
내 생각에는 별다른 흔적도 없이 버려진 우사단 터와 그 주변 땅을 당시 석유 한방울이 아쉬웠던 한국정부에서 중동 산유국들의 환심을 사고자 내주었던 듯하다. 또 당시는 중동 산유국들이 우리나라 외화벌이의 1등 공신이던 시절이기도 하니, 현대그룹 등 국내 유명 대기업들의 성장 과정에는 열사(熱沙)의 나라에서 피와 땀을 흘린 우리나라 건설 노동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제 돈 벌러 간 것이고, 국내 건설사는 오히려 기회를 마련해 준 것 아니냐고 따지면 딱이 할 말이 없겠지만, 분명한 건 너나 나나 모두 오일 머니에 목말랐던 시절이라는 사실이다. 오일 쇼크, 중동붐이라는 단어가 유행가 가사처럼 회자되던 시절로서, 실제로 가수 현숙이 부른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 라는 중동 취업 노동자 가장을 주제로 한 노래가 히트하기도 했다.
비화라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당시 '한남동 회교사원'이라 불렸던 이슬람 서울 성원의 건립을 주도하고 성사시킨 정부 기관은 중앙정보부였다. 한남동 회교사원의 건립 목적에는 중동 이슬람 국가들과의 친교로써 외교의 폭을 넓히겠다는, 그리하여 제3세계 외교에서 북한에 밀렸던 판도를 뒤집어 보겠다는 의도도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의도가 주효했는지 개원식 때는 사우디아라비아 · 리비아 · 쿠웨이트 등 무려 17개국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아무튼 그 서슬 퍼런 기관이 덤벼들었던 만큼, 그 당시 지금보다 훨씬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계에서도 가타부타 입조차 뻥끗 못했다.(훗날 기독자유당이라는 기독교 정당에서는 이슬람 사원 폐쇄를 공약으로 걸기도 했다 / 당시 기독자유당은 국회으의원 수 1석을 가진 원내정당이었다) 그러니 문화재 당국에서 우사단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었을 터이다. 다시 말하지만 '보광동 산4번지에 있었다'라고만 전해지는 우사단은 현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자리였을 가능성이 큰데, 지금은 그저 도로명으로만 남았다.
우사단로 10나길 표지판 & 아라베스크 무늬의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입구 이슬람 서울 성원의 본당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고 쓰여 있는 모스크와 양 옆의 첨탑 미나렛 2024년 7월 중앙성원으로 들어가는 곳 가운데를 뚫고 계단을 새로 만들었다. 모스크의 부속건물
여담을 덧붙이자면 예전 한남동 회교사원으로 불릴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이태원 모스크에서도 무슬림을 별로 만날 수 없었다. 당시는 튀르키예나 아랍계 사람들의 한국 진출이 희소했던 까닭이다. 그리고 교통도 불편해 모스크 구경을 오려고 해도 큰 맘을 먹어야 했다. 굳이 덧붙이자면 당시의 우사단길(물론 이 이름이 붙여지기 전이다)은 게이바나 매춘업소가 많아 별로 찾고 싶은 곳도 아니었다.하지만 지금은 6호선 등이 개통돼 교통천국이 되었고 이슬람계 외국인들이 직접 경영하는 가게들도 즐비한 진짜 이국적인 장소로 변모했는데, 그들 무슬림들이 "우리가 거리를 정화했다"는 자부심을 지난다는 말도 들었다. 대신 요즘에는 트랜스젠더 바가 늘어난 듯 버젓이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가게들이 쉽게 눈에 띈다.(그렇다고 그들을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우사단길 풍경은 지난 20세기와는 크게 달라졌다.
한남동 유엔빌리지 길에서 본 이태원 / 우사단 자리여서 일까, 이태원 모스크 위로 구름이 몰리고 있다. 여긴 웬 공터? 모스크 위에 머문 구름 이 사진은 지나가다 어느 건물 앞에서 찍은 것이다. 이슬람 도안이라 눈 여겨 보았더니 쓰여져 있는 내용은 뜻밖에도 신약성서 갈라디아서 2:20의 구절이다. 심사숙고해 고른 문장인듯 하나 바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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