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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단(雩祀壇)을 찾아서(II) - 제기동 우사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26. 20:23
다시 우사단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제기동(祭基洞)은 동네 이름 자체가 '제사 터'라는 뜻이니 반드시 뭔가 있을 듯했는데, 방아다리 공원에서 만난 어르신네의 친절한 도움으로 아래의 표석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쓰여 있기를, "제기동은 '하늘과 사람이 제사로써 하나가 되는 신성한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은 동녘 햇살 속에 삼각산과 한강의 기운이 어우어지는 최고 길지인 이곳 '제터마을'에 동적전(東籍田)*을 열어 국가의 토대로 삼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 동적전은 조선 시대, 왕이 농사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서울에 둔 논밭을 말하는데, 아래 '제터마을기념비'에는 한자가 잘못 적혔다. 부근의 마을은 따로 감초마을로도 불리는 듯 '제기동 감초마을 주민협의체'가 설립 주체로 되어 있다. 설립일은 2022년 개천절이다.
'제터마을기념비' 옆에는 찾던 내가 찾던 우사단의 표석이 있었다. 표석에는 "조선왕조 우사단(雩祀壇) 터 / 제기동 성당 자리는 우사단 터입니다. 왕들은 이곳에서 비를 기원하며 백성들을 위해 빌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며 설립 주체는 동일했다. 그러면 이제 제기동 성당을 찾아갈 차례다.
제기동 성당은 표석과 멀지 않은 약령시로 31 고갯길에 위치해 있었는데, 길에서 슬쩍 보아도 무척 고풍스럽다. 연혁을 알아본즉 과연 그럴만했으니 건립연대가 1942년으로 서울에서 일곱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 일제강점기에 늘어난 서울 동쪽의 교인들을 위해 천주교인들을 위해 동대문 밖에 자리했던 초가집 공소(현 제기동 경로당 부근)가 본당으로 승격했다고 한다.그렇지만 이 건물은 그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한국전쟁 후인 1955년 건립됐다. 그런데 하필 건립 위치가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던 곳이었으므로 지역주민과 갈등이 일었다고 한다. 성당 측에서 부지 매입금을 강탈당할 뻔한 적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주민들의 저항이 꽤 심했던 듯하다. 하지만 공사는 강행됐고 착공 4년 만인 1959년 제기동 성당이 완공되었다.
단단한 모양새의 성당 외관은 주민 저항과 관련이 있을 성싶다. 성당보다는 성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이와 같은 생각을 더해주는데, 역시 성당 건축에 있어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건축 주체가 단단한 모양새를 최우선적으로 지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귀의 소굴이던 이 뫼(산)가 거룩하고 웅장한 성전터로 변모됨"을 경하한 황 베네딕다 수녀의 축시 역시 건립과정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듯싶다. '마귀의 소굴이'라는 표현이 지나치달 수 있겠지만 기독교의 시각으로서는 당연한 노릇이다.
앞서 말한 보광동 우사단, 그리고 제기동 우사단이 모두 종교시설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공교로운데, 경위야 어쨌든 여기서도 우사단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대신 지척에서 재궁(齊宮) 터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위 우사단 터 표석 옆 재궁 터 표석에 쓰여 있는 대로 재궁은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기우제를 위해 왕림했을 때 머물던 집으로 순종의 장인인 해풍부원군 윤택영(1876-1935)이 지었다.
이 집은 본래 해평윤씨 일가의 재실(齋室)로 지어졌다. 윤택영은 1900년대 초 자신의 딸(순정효황후)이 동궁(순종)의 계비로 책봉될 즈음에 과시욕으로써 가문의 재실을 거창하게 지었다. 어마어마한 건축비가 들어간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등을 지고 있는 특이한 형태에, 뒤로는 사당을 배치한 元자형의 구조를 이루는데, 1998년 보존을 위해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졌다.
앞서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ㅡ민영휘 저택'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대표적 3대 가옥인 관훈동 민씨가옥, 옥인동 윤씨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재실은 모두 친일파의 집이다. 즉 관훈동 민씨가옥, 옥인동 윤씨가옥은 민영휘와 그의 첩 이성녀가 살던 집이었고, 해풍부원군 재실은 윤택영의 집인데, 윤택영의 형은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파의 쌍벽을 이루던 윤덕영이다.
윤덕영과 그의 집에 대해서는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에서 말한 대로 장안 최고 저택에 살던 최고 친일파였다. 그리고 제기동 재실의 주인 윤택영 역시 내로라는 친일파 갑부였지만 한일합방 은사금으로 받은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 하다 탕진했고 순종의 장인임을 담보로 마구 빚을 얻어 호화생활을 영위하다 조선 최고의 채무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1935년 재차 중국으로 도망 가 죽었다. 1926년 <개벽> 6월호 '경성잡담'에 실린 아래의 글의 윤덕영의 개 같은 인생을 대변한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1926년 순종황제의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 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형(윤덕영) '대갈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위 우사단 터 표석과 재궁 터 표석이 있는 작은 꽃밭의 바로 옆으로는 정릉천이 흐른다. 그리고 정릉천 건너편으로는 마치 에곤 쉴레의 그림 속 풍경으로 착각할 만한 아름다운 집들이 정릉천을 따라 직렬로 끝도 없이 펼쳐진다. 물론 아름답다거나 끝도 없다거나 하는 표현은 주관적 관점이 작용한 것이겠으나, 개관적으로도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일 것임은 분명하다. 우사단을 찾다 얻어걸린 의외의 안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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