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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ㅡ민영휘 저택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 29. 23:59
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구한말의 문신으로 대표적 친일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친일파 중에서도 그가 두드러지는 것은 그로 인해 거부(巨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재에 밝았던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수탈한 재물과 친일의 대가로 획득한 재물들을 잘 불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친일파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의 변신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권력형 부정축재자 + 재테크의 달인'이지만, 근자에 주목을 받고 있는 미얀마 군부 기업에 가까운 형태로서 재산을 불렸다. 즉 권력을 기업 운용에 이용한 것인데, 나아가 그는 은행을 소유한(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 부동산 재벌이기도 했으며,(농지만 5만석) 한편으로는 사학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다.(휘문고보) 가족들도 그러했으니 아들과 손자들도 은행을 소유했거나(동일은행) 은행장을 지냈으며,(제일은행, 한국은행) 사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풍문여고)
그가 득세를 한 이유는 명성황후의 혈족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니(15촌 조카) 민왕후는 촌수가 멀 건 가깝건 친족들은 다 끌어모아 흥선대원군에 대항했다. 민영휘는 주어진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해냄으로써 민왕후를 기쁘게 했는데, 그의 공로(?) 중 가장 큰 것은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잡아가게 한 일이었다. 동학농민 봉기 때의 활약도 버금갔으니, 그는 이때 민왕후에게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라는 진언을 했고, 청나라의 출병에 따라 일본군대도 들어옴으로써 이 땅은 전쟁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승자인 일본에게 나라가 넘어가게 만들었다.
~ 앞서도 말했지만 이때 청나라 리훙장(이홍장)이 쾌재를 부른 사실이 <청광서 조중일 외교사료>에 전한다. 「갑오농민 반란은 조선 내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민란임에도 바보 같은 조선 정부가 청병(請兵)을 해 우리에게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내색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리훙장뿐 아니라 일본에게도 찬스를 제공하였던 바, 「조선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쪽이 군대를 파병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상대방 국가에게 통고해야 한다」는 톈진조약에 의거, 일본군대도 상륙하게 된 것이었다.
민영휘는 갑신정변 이후로는 친청파의 앞잡이가 됐다. 그리하여 1884년 이후, 이 땅에 눌러앉아 황제 노릇을 한 위안스카이의 오른팔이 되어 조선을 주물렀으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재빨리 일본 편에 섰다. 그리하여 이완용, 민영준, 윤덕영, 윤택영 등과 함께 친일의 선두에 섰던 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퇴위를 압박해 성사시켰다. 이후 시종원경(侍從院卿) 등을 지내며 여러 친일단체에 가담하여 협력하고, 이완용이 만든 한일합방추진단체인 정우회(政友會)의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 민영휘에게 고종의 퇴위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여, 뒷배가 사라졌음을 안 사람들이 그에게 빼앗긴 재산을 되찾겠다며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혹자는 재판소에 호소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의 집으로 달려가 칼을 빼어 들고 되찾아오기도 하였다고 <매천야록>은 적고 있는데, 그는 임오군란 때의 위기를 친청(親淸)으로 극복하였듯 이번에는 강력한 친일로써 극복했다 / 시종원은 황제의 의전과 건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시종원경은 시종원의 최고 책임자이다.
이와 같은 공로로써 합병된 해인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함께 거액의 은사금이 수여됐다. 그리고 1912년에는 한일은행 두취(총재)가 되었고, 조선견직회사 등도 운영하며 1935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했다. 일제시대 이완용의 재산이 300만원이었다고 하는데 민영휘의 재산은 그는 20배인 6000만원(현 시세로 1조원 이상)이었다.
그의 재산은 2007년 국가로 일부 환수되었으며,(257억) 2017년 민영휘의 후손이 제기한 1492㎡(451평)의 강남 세곡동 땅 반환 소송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소송은 2020년 최종적으로 패소했으나, 직계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남이섬은 2019년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친일재산이 아니라는 최종판결을 받았다)
그가 살던 집의 일부가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되어 있다. 일제 때 헌병대 사령부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1979년 전두환·노태우가 쿠데타를 일으킨 12.12사태 때 수방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이곳에서 역도(逆徒)들을 막으려 분투했으나 결국 피체되고 말았다. 수방사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존속하다 1989년 남산골 제모습 찾기 사업으로 한옥 마을이 조성돼 1998년 4월 18일 개관을 했다.
그곳에는 민영휘의 집을 비롯한 친일파의 집들이 다수 복원되었다. 민영휘의 집은 처음에는 박영효의 집이라는 안내문이 붙었으나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있자 그저 그 문구만을 제거하고 뭉개다가 민영휘의 집으로 바로 잡혔다. 그외 윤태영, 윤덕영의 집도 있는데 물론 친일파의 집을 일부러 복원한 것은 아니고 그들이 구한말~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최고의 영화를 누린 까닭에 그들이 살던 집이 당시 한옥의 모델로서 되살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자들의 집이라는 것을 애써 숨겼으나 결국 뽀록나고 말았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 필동 한옥마을에서 조금 내려오면 과거 민영휘가 주름 잡던 장소와 만나게 된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 廣場)라고 부르던 한국은행 앞 사거리다. '센긴마에'는 조선은행(지금의 지금의 한국은행) 앞이라는 뜻이고 '히로바'는 광장이다. 이 거리는 당시 남대문로와 진고개가 만나는 곳으로 경성부청, 조선은행, 경성우편국의 3대 기관시설이 몰려 있는데다 나중에는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지점(현재 신세계 본점)까지 들어서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 1926년 경성부 청사는 현재의 서울 시청 자리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지상 4층 지하 1층의 미츠코시 백화점이 신축되었다. 경성우편국 건물은 비교적 최근인 1981년까지 남아 있다 철거되었으나 미츠코시 백화점은 여러 번의 리모델링을 거치긴 했어도 아직 건재하다. (신세계측이 거절을 해 근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했다)
즉 서울에는 본래의 중심이었던 종각(보신각)과 새로운 중심인 센긴마에 히로바가 양극(兩極)을 형성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였던 것인데, 1910년 합병 후에는 조선시대 육의전부터 이어오던 종로통의 상권은 점차 진고개의 일본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진고개는 당시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그들은 이곳을 혼마치(本町)라고 불렀다. 우리에겐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로 익숙한 지명이다. 조선인과 왜인은 밑바닥 건달패조차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니 1919년 3.1만세운동이 이곳 '센긴마에 히로바'에서 벌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 관심 없이 지나가지만 지금 그 장소에는 3.1독립운동 기념 터 표석이 서 있다.
▼ 북촌에 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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