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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소문도 있었다
    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22. 23:58

     

     

    위 사진은 1904년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혜화문의 모습이다. 남소문에 관한 타이틀을 달고 이 사진을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 버티고개(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던 남소문이 이러한 모습이었지 않겠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혜화문이 있던 혜화동 고개에서나 남소문이 있던 버티고개에서나 이와 같은 비탈은 찾을 수 없다.

     

    앞서도 설명했거니와 혜화동 고개는 1928년 일제가 레벨을 낮추기 위해 7m 정도를 밀어내 혜화문과 함께 고개마루가 사라졌다. 버티고개는 이 보다 앞선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며 5m 정도를 깎아내는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때 일대의 성곽이 헐리며 남소문도 사라졌는데, 혜화문과 달리 남소문은 사진조차 없어 복원은 꿈도 꾸지 못한 듯하다. 

     

     

    남소문의 위치
    반얀트리 호텔(구 타워호텔) 앞 사거리 / 남소문은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었다. (승용차 올라가는 길)
    버티고개 마루 / 중구 장충동 쪽에서 찍은 모습으로, 서울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남소문터 표석 / 고개에서 내리 찍은 사진이다. 표석에는 「서울의 소문(小門)으로 세조 때 세우다. 예종원년(1469) 음양설에 따라 철거. 그후 일제시대 주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버티고개 마루 / 용산구 쪽 내리막에서 올려 찍은 사진으로 승용차 있는 곳에 문이 가로질러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른쪽 끝에 표석이 보인다.
    남소문 표석 바로 위쪽에는 반얀트리 호텔이 위치한다. 이 호텔 아래로 한양 성곽이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 예전에는 호텔 입구 도로에 '한양성곽 길'이라는 표시가 있었는데 지금은 안 보임.
    근방에 남은 한양 성곽 / 과거 이 성곽은 남산 구간과 이어져 있었다.
    남소문은 이 같은 비탈에 문루 없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복원되기 전의 문경새재 조령관 모습이다.
    복원된 조령관 / 문루가 있었다면 남소문은 아마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출처: 문화유산신문)

     

    17세기 말에 그려진 아래 도성도(都城圖)를 보면 남소문은 광희문으로 표시돼 있고, 광희문은 수구문으로 표시돼 있다. 그리고 18세기에 그려진 도성도에서도 남소문은 광희문으로, 광희문은 수구문으로 표시돼 있어 헛갈리는데, 아마도 잘못 표시된 전대(前代)의 도성도를 베끼는 과정에서의 중첩된 오류로 여겨진다.  

     

    19세기 초에 작성된 동국여도(東國與圖) 내의 경성도(京城圖)에서는 이 오류가 바로잡혀 남소문으로 표시된다. 하지만 1834년 김정호가 만든 전국지도인 청구요람(靑邱要覽) 속의 도성전도(都城全圖)에서 남소문은 아예 표시되지 않는데, 그가 1840년대의 서울을 집중 고증해 만든 수선전도(首善全圖)에서도 남소문은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관(官)에서 제작한 다른 다른 도성도나 한성부도(漢城府圖)에서도 마찬가지로 남소문은 표시되지 않으니 적어도 19세기 초 이전에 문의 기능을 상실하고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도성도의 남소문(화살표) / 서울대 규장각
    수선전도 속의 도성 문 (화살표 지점에 있어야 할 남소문이 보이지 않는다) / 국립중앙박물관
    확대해 보면 오른쪽으로 흥인문, 오간수문, 이간수문, 광희문이 차례로 보이나 화살표 지점에 있어야 할 남소문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조에도 이처럼 천대(?)를 받았고, 또 우리에게도 생소한 것은 그 문의 기능이 처음부터 오락가락했기 때문이다. 남소문은 다른 성문과 같이 1396년 한양도성의 축조와 더불어 건립된 것이 아니라 1456년(세조 2년) 세조가 명한 남산 청학동에 소문(小門)의 설치를 검토해보라는 지시에 따라 건립된 듯 보인다. 

     

    세조가 남소문의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무엇보다 숭례문과 광희문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니 목멱산(남산) 너머에 문이 하나 있으면 남쪽에서의 도성 진입이 좀 더 수월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문으로부터 이어지는 대로(大路)가 없던 탓에 통행량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풍수음양이 끼어들며 예종 때 폐쇄가 거론됐고, 결국은 막히게 되니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경연이 끝난 후 지경연사(知經筵事) 임원준(任元濬) 및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남아 있도록 명하여, 남소문을 막는 것의 편부(便否)를 물으니 임원준이 대답하기를,

     

    "도읍을 정하던 당초에 어찌 경영(經營)할 때에 잘 헤아리지 않고서 이 문을 설치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이 문을 설치하였으나, 찻길이 통하지 않아서 큰 이익이 없고, 또 음양가(陰陽家)가 손방(巽方)을 매우 꺼리므로 처음에 이 문을 설치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과연 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 세조의 맏아들)께서 서거하셨으니, 음양가의 설은 비록 믿을 것이 못되나, 이 문은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권감도 아뢰기를,

    "막는 것이 온편합니다. 만약에 그대로 둔다면, 문을 굳게 잠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막자면 인력이 얼마나 드는가?"

     

    하니, 권감이 아뢰기를,

    "공력이 많이 들지는 않습니다." (<예종실록> 7권)

     

    이후 명종 때 윤계령 등이 남소문 열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숙종 1년에 이르러 비로소 문이 다시 열리니 연유는 다음과 같았다. 

     

    술사(術士) 김진발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남소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열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숙종 5년, 노론이었던 병조판서 김석주가 상소를 올려 문의 폐쇄를 주청하니, 말은 "소양(少陽)의 방위를 폐색(閉塞)하고...." 어쩌고 따따부따했지만 요지는 "남소문을 열면 남인이 성(盛)한다는 것이었던 바, 다시 닫히게 되었다. (<숙종실록> 8권)

     

    이후로도 남소문의 개폐(開閉) 문제는 계속 설왕설래되었고, 1725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개문(開門)이 재론되었으나 결국 열리지 않았다.  

     

    남소문은 이렇듯 제 구실을 못했으나 근방의 동네는 그로 인해 남소동(南小洞)이 되었고, 이곳에 설치된 어영청의 분영(分營) 역시 남소영(南小營)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남소동의 운명은 1900년(광무 4년) 고종이 옛 남소영 자리에 장충단(奬忠壇)을 지으며 180도 달라지게 된다. 

     

     

    단원의 '남소영'도 / 서울 선비들의 모임을 그린 《사인풍속도권士人風俗圖卷》 내의 그림이다.

     

    장충단은 고종이 폐쇄된 남소영 자리에 1895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 등을 추모해 지은 제단으로, 사전(祀殿)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순직한 이들도 함께 배향됐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렸으니, 말하자면 이곳은 국립묘지 현충원과 같은 장소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제사는 1908년(융희 2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지되고, 대신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제가 마련됐다. 

     

    나아가 일제는 뜻깊고 신성한 장소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까지 세우려 하였으나 아직은 국권이 살아 있었던 바, 조선인의 감정이 그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매천야록>은 적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으니, 1910년 조선이 병탄되자 곧바로 제단과 사전, 기타 부속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장충단 비(碑)마저 뽑혀 버려졌다. (지금의 비석은 버려져 땅에 묻혔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

     

     

    장충단 비 /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썼다.

     

    일제는 국립묘지 현충원과 같은 이곳에 대규모 위락공간을 조성했다. 그러면서 일본 국화(國花)인 벚꽃나무로써 조경을 하고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우는 등 완벽한 일본식 공원으로 전환시켰다. 아울러 일환으로써 길도 닦았던 바, 바로 그때 남소문과 성벽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라는 대규모 사당을 세웠다. (이토 히로부미가 생존에 귀의한 조동종·曹洞宗이라는 일본 불교종파의 절이라고 하나 사당이라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인 바로 그 박문(博文)이었다. 그리고 입구에는 경덕궁(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和門)이 주초 째 뽑혀져 세워지며 경춘문(慶春門)이라 불렸다. 여기서 '춘'은 이토 히로부미의 호(號)인 슌보(春畝)에서 따온 것인데, 경춘문은 해방 이후 한국정부 영빈관의 정문과 호텔신라의 정문이 되었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 공사와 함께 겨우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확히는 비슷한 자리라고 해야겠다. 본래의 문 자리에는 그간 다른 건물이 들어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호텔신라 정문에는 흥화문의 복제품이 세워졌다 / 뭔가 복잡하고 씁쓸하다 --;;)  

     

     

    일제의 장충단공원 엽서 사진
    일제의 박문사 엽서 사진
    일제의 춘묘산 박문사 사진 / 앞의 물은 남소동천(川)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으로 지금 그곳에는 청계천 수표교가 놓여 있다.
    장충단 공원 내의 수표교 / 원래 청계천에 있던 다리였으나 1965년 복개 공사 때 옮겨진 후 아직까지 이곳에 놓여 있다. 복원된 청계천과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까닭이다.
    장충단 비석과 수표교 / 뒤로 호텔신라의 부속 건물이 보인다. 장충단 비는 본래 그 건물 위쪽에 있었다.

     

    해방후 장충단 공원에 남아 있던 일제의 잔재는 거의 지워졌다. 하지만 깨끗이 지워지지는 못했으니 박문사가 있던 자리에는 일본 자본과 일본 기술진에 의해 세워진 신라호텔이 들어서며 박문사의 잔재가 남게 되었는데, 까닭에 신라호텔을 방문한 한 일본 관광객은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과 사진을 올렸다.

     

    (앞서 '장충단과 박문사'에서 말했거니와 삼성은 이 호텔을 건립하며 니쇼이와이, 다이세이 건설, 오쿠라 호텔, 고이즈미 그룹 등 일본의 7개 기업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 설계는 우연찮게도 일본의 다이세이 건설이 맡았다. 박문사를 지은 오쿠라쿠미 토목이 2차대전 후 이름을 바꾼 회사이다)

     

    호텔신라 전경
    旧博文寺の階段です。(예전의 박문사 계단입니다)
    本堂跡の石段の上に、新羅ホテルの迎賓館が建っています。博文寺は、伊藤博文の菩提を弔うために1932年に建立されました。破却された跡地には、今は、新羅ホテルと免税店が建ち、日本人を初め多くの人が訪問しています。(본당 유적의 돌계단 위에는 신라호텔 영빈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또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1932년 건립됐습니다. 철거된 자리에는 지금 신라호텔과 면세점이 세워져 많은 일본인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장충단 비와 호텔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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