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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화문과 혜화동 석굴암
    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20. 05:42

     

    「한양 성문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설명은 해야겠으되, 혜화문에 대해서는 앞서 '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I)-동소문'에서 웬만큼 언급이 됐다. 그래서 새삼 부연하기가 좀 멋쩍은데, 마침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혜화문을 충분히 설명해놓은 대목을 발견해 옮겨 적으려 한다. 

     

    동소문(東小門)은 원 이름이 홍화문(弘化門)인데 동관대궐(창경궁) 동편에 홍화문이 있어 이름이 섞이는 까닭으로 중종대왕 당년에 동소문 이름을 혜화문(惠化門)이라고 고치었다. 홍화문이 혜화문으로 변한 지 육칠 년이 지난 때다. 혜화문 문턱 옆에 초가집 몇 집이 있고 그중에 갖바치의 집 한 집이 있었다. 

     

    홍명희는 혜화문 문턱 밑에 사는 갖바치(가죽신 만드는 사람)를 비록 천민이나 매우 똑똑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얼마나 똑똑한지 당대의 석학이자 최고 권력자인 정암 조광조도 그의 지혜를 빌리러 오는데, 그에 대해서는 각설하고 분위기만 빌리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갖바치의 집이 있는 혜화문은 우연찮게도 아래의 사진과 비슷하다.(어쩌면 홍명희도 이 사진을 보았을는지 모르겠다)

     

     

    <조선고적도보>의 혜화문 사진
    비슷한 시기에 찍은 잘 알려지지 않은 혜화문 사진
    1928년 이후의 혜화문

     

    하지만 옛 사진에서 등장하는 가파른 고개는 이제는 사라졌으니, 일제강점기 시절 혜화동이 종점이었던 전차노선을 돈암동까지 연결하며 도로의 레벨(높이)을 7m 정도 낮춰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생겨난 도로가 지금의 동소문로인데, 일제는 이때 혜화문을 헐었다.(1928년) 즉 혜화문은 지금의 동소문로 위에 위치했던 것이니 그것을 복원하기도 어려웠는데, 궁여지책으로 서북쪽 약 30m 지점에 자리를 마련해 복원시켜놓았다.(1994. 10. 15) 

     

     

    복원된 혜화문
    안쪽에서 본 모습
    동소문로에서 본 혜화문

     

    혜화문 역시 다른 문들과 같이 사연이 많아서, 1396년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건립됐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문루가 불타 없어졌다. 이후 영조 때인 1744년에 재건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완전 파괴된 것이 다시 복원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이건 잘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대로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으니 다름 아닌 혜화동 고개에 있었던 '석굴암'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석굴암이 경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 서울 우이동과 양주시 장흥면 사이 고개인 양주 우이령에도 있고,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에도 있으며, 인왕산과 의정부 사패산에도 있다. 공통점은 모두가 부처님을 모신 불도량이라는 것과, 바위를 깎아 만든 돌집인 까닭에 들어가면 겁나게 시원하다는 것이다. 혜화동 석굴암 역시 그러했는데 다른 것은 불도량이 아니라 주점이라는 것이다. 고개에 있었으니 주막(酒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기는 하겠으나 막(幕)이 없는 굴(窟)로 된 곳이었던 지라.....

     

     

    인왕산 석굴암 / 아쉽게도 혜화동 석굴암 사진은 전하는 게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지난 70~80년대 혜화동 고개에 있던 '석굴암'은 화강암 암반을 뚫어 만든 시대불명의 방공호를 개조해 꾸민 선술집이었다. '석굴암'은 그 점을 살려 과거의 흡사 개미집 같던 대피 장소들을 룸으로 이용했다. 당연히 분위기가 별달랐으니 사방이 온통 화강암 벽이었고, 창문은 입구 쪽에 있는 화장실을 가야 볼 수 있었다. 말한 대로 겁나게 시원했던 까닭인지 폭음을 해도 술이 잘 취하지 않았는데, 폭음 후에도 숙취를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희한한 경험을 제공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신라시대 토함산 석굴암의 참배객이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비약과, 이후 알게 된 세도나(Sedona)라는 곳에 이른바 기(氣) 수련자들이 지구의 기운을 받겠다며 몰려드는 것이 일견 타당성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문득문득 그곳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본 블로그에 '혜화동 석굴암'이 검색어로서 심심찮게 올라온다)

     

     

    세도나의 기 수련자 사진을 하나 올려본다.
    단원의 '동소문도'를 다시 올린다. 맥주잔을 그려넣은 데가 '석굴암'이 있던 자리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혜화문에서 이어지는 낙산 구간 성벽을 잘 정비해놔 옛 정취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니, 이 길을 걷다 보면 분위기도 만점이거니와 가끔 옛날로 들어가기도 한다. 혜화문 고개에서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낙산 성벽 구간은 정말이지 타임머신을 타지 않고도 과거로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간여행길이다. 그 길에서는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며, 과거와 그 이전이 교차한다. 

     

     

    복원된 혜화문 육축부와 옛 성벽
    세종 때의 성벽과 숙종 때의 성벽이 만나는 곳들
    단원의 '필부상도' 속의 성벽
    낙산 구간의 각자성석
    낙산 구간,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들
    시간이 머문 동네 이화동 (이화동 골목길에 조성한 벽화는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한 소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지워져버렸다) / '메트로신문' 사진
    그리고 지금은 이처럼 깨끗히 지워졌다. 혜화동은 언뜻 시간이 머문 곳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빨리 흐르는 듯하다. / 2023년 봄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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