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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일하게 없어진 서대문(돈의문)
    한양 성문 이야기 2021. 12. 31. 00:37

     

    한양 도성의 동서남북 사대문 중 서대문은 유일하게 사라진 도성 문이다. 서대문은 1915년 일제가 도로를 넓힌다며 철거한 것인데, 한때 서울시가 복원시켰다는 의지를 보인 적이 있었으나 결국 복원되지 못했다. (2019년 AR 앱을 다운로드하여 보는 디지털 복원인가 하는 애매한 무엇이 생겨나 자화자찬식으로 복작댔는데 정작 이용하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일제시대의 서대문
    일제가 발행한 엽서 속의 서대문 / 1899년 5월 개통된 전차가 서대문(돈의문)을 지나고 있다. 이 선로의 확장을 위해 서대문이 헐린다.
    비슷한 시기의 서대문 사진
    비슷한 시기의 동대문 사진 / 오른쪽 시커먼 연기가 나오는 굴뚝은 동대문 화력 발전소의 굴뚝이다;
    증강현실로 복원된 서대문
    정동 사거리에 있었던 서대문 / 가운데 오토바이가 서 있는 곳에 성문이 가로질러 있었다.

     

    인터넷 백과사전의 돈의문(서대문)에 관한 설명은 괜스레 복잡하다.  아래는 <다음백과>의 설명인데 일단 한번 읽어보자.  

     

    1413년 6월 19일,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은 지리로 보면 도성의 장의동문(藏義洞門)과 관광방(觀光坊) 동쪽 고갯길은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니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닫았다. 대신 새로 문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문이 바로 도성 서쪽에 있는 서전문(西箭門)이다.

     

    이 서전문은 돈의문과는 다르다. 서전문의 위치는 아마도 사직터널 부근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1418년 8월 1일 《태종실록》에는 서전문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내가 인덕궁에 가려는데, 성녕대군의 집이 길가에 있으니, 이를 보면 반드시 애통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를 피하고자 서전문으로 돌아 숭례문으로 나가려 한다."

     

    야사에는 안성군 이숙번의 집이 인덕궁 소동 앞에 있었는데 돈의문 길이 자신의 집 앞을 지나자 문을 옮겼다고 하는 말도 돌았다.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가 싫었던 이숙번이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서전문을 만들어 그리로 통행하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숙번의 집을 '색문가(塞門家)', 즉 성문을 막은 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새문안은 새문에서 발전된 말이고 새문은 또 색문가에서 출발했으니, 지명을 따져보면 풍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상 <다음백과>)

     

    이숙번에 관한 이야기는 <더위키>에도 실려 있다. 

     

    '새문'이란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사람이 통행하고 마소가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이라 부르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이상 <더위키>)

     

    하지만 문을 막았다는 이숙번의 이야기는 어폐가 다분하다. 우선은 문을 막아 통행을 제한했음에도 새문안, 혹은 색문동이라는 동네가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문을 막아 길을 없어지면 있는 동네도 사라질 법하거늘, 없던 동네가 생겼났다고 하니 말이 안 된다 생각되지는 것이다.

     

    다만 태종조 당시의 권신인 이숙번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음을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는 한데,* 그는 1416년 태종의 양위 파동 때 이방원의 눈밖에 나 실각하고 1417년에는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 가므로 그즈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새문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 이숙번은 이방원의 숙적인 정도전을 참살하였고, 2차 왕자의 난 때도 큰 공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인 바, 권세가 하늘을 찔러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위와 같은 이야기가 생겨날 정도로 갑질도 짱이었던 듯.

     

    일제에 의해 철거된 돈의문은 1422년(세종 4년) 2월, 세종대왕이 도성을 수축하며 옛 돈의문 자리에 새로 만든 문이다. 까닭에 그 문은 돈의문, 혹은 서대문이라는 명칭 대신 '새문'이라 불렸으니 '새문'에서 이어지는 그 길은 여태껏 새문 길, 즉 신문로(新門路)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고, 새문안이라는 호칭도 부활했다.(신문로가 새문안로로 바뀌었다)  

     

    내 생각으로 신문로는 개성, 해주, 평양, 의주, 나아가 북경까지 가는 서북대로(의주로)와 이어지는 길이므로 '새문'은 한양 4대문 중 가장 통행량이 많았을 법하다. 따라서 사건 사고도 가장 많았을 법한데 그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86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일본 공사관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가 이끄는 무리가 이 문을 통과해 경복궁 건천궁으로 난입한 일일 것이다. 뒤이어 오카모도 류노스케(岡本柳之助)가 이끄는 무리가 마포 아소당(我笑堂)에 칩거 중인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이 문을 통과했다.*

     

    *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를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은 조선 훈련대의 소행으로 덮어 씌우려는 계획으로써 그를 데리고 왔으나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리가 아현(阿峴, 애오개)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날이 밝아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미국 공사관 장교 윌리엄 다이 등의 목격자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 - 그날의 진실')

     

    '새문'은 새문안로가 끝나는 정동 사거리 고개 마루에서 정동길 초입까지 걸쳐 있었으며 북으로는 인왕산 성벽 구간을 거쳐 창의문과 숙정문으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지금의 창덕여중과 이화여고 교정을 거쳐 소의문과 남대문으로 연결되었다. 말한 대로 지금 서대문은 사라졌고, 부근 성벽의 흔적은 창덕여중과 이화여교 교정에서 눈을 씻고 보면 조금 보인다. 

     

    서대문의 철거가 결정된 날, 주무부서였던 조선총독부 토목국에서는 돈의문 부재에 입찰 공고를 내 매입자를 찾았는데, 10명이 경합한 경매 입찰에서 경성 사는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누각의 목재가 낙찰되고, 육축부의 석재는 총독부에서 도로 개보수용 등의 용도로 보관했다 한다.(<매일신보> 1915년 3월 7일자) 서대문은 그 최후까지 슬프기 한량없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돈의문 현판
    1904년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가 찍은 서대문과 프랑스 공사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본 서대문 방향
    창덕여중 교정의 서울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校跡碑) / 프랑스공사관과 서대문 성곽 자리에 지어졌던 서대문국민학교의 흔적은 성곽 만큼이나 사연 있어 보인다.
    정동 사거리의 돈의문 터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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