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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대문이 흥인지문이 된 때는?
    한양 성문 이야기 2021. 12. 17. 05:30

     

    흥인지문을 동대문이라 부르는 게 일제의 잔재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남대문도 같은 이유로 숭례문으로 고쳐 부른 지가 꽤 됐지만,(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 때부터)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인문과 동대문, 숭례문과 남대문은 혼용돼 쓰이며 비율도 거의 같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실록> 10권) 

     

     

    동대문
    남대문

     

    한양도성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설치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의 책임자 정도전의 지휘 하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각 도의 백성들을 징발해 수축하게 하였다. 이때 동대문 구간은 낮은 지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듯하니 <태조실록>에는 또 다음과 같은 애환이 기록돼 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이나 되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아래의 넓이는 24척, 위의 넓이는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었다. 수구(水口)에는 높은 사다리[雲梯]를 쌓고 양쪽에다 석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6척, 길이가 1천 50척이요, 동대문(東大門)에는 지세가 낮으므로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뒤에 성을 쌓았으므로, 그 힘이 다른 곳보다 배나 되었다. 안동(安東)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그 역사를 맡았으나 마치지 못했으므로, 경상도 도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동대문의 역사는 10여 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청했으나,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가 아뢰기를,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근간에 분부가 계시기를, ‘씨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 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안동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며,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게 하였다.(<태조실록> 9권) 

     

     

    각자성석(刻字城石) / 성돌에 축성 부서와 책임자, 석공(石工)의 이름, 시기, 공사구간 등을 새겨넣었다.
    수구(水口)인 이간수문 / 일제가 경성운동장을 건설하며 매몰시켰던 것이 200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공사 때 발견되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을 설명함에 있어 <다음백과>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자료는 이와 같은 동대문 축조의 어려움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흥인지문의 명칭은 문이 완공되고 500년이 지난 고종 때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중 <다음백과>와 <오마이뉴스>의 글은 다음과 같다. 

     

    역사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다음백과>)

     

    흥인지문이 네 글자인 까닭?

    흥인지문(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은 조선시대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이다. 흥인지문에 대한 서울시 홈페이지 자료를 살펴보자. 원래 '흥인문'이었던 이 문의 이름이 언제부터 '흥인지문'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철종 끝자락까지의 <실록>에 흥인지문이란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 이 문을 고쳐 지으면서 흥인지문으로 바꾼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근데, 사대문과 사소문은 모두 세 글자로 되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 문만 네 글자인 흥인지문이라 이름 지었을까. 이 문을 네 글자로 지은 것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남, 서, 북 모두 지(地)의 기세가 있는데 유독 동쪽만 지(地)의 기세가 부족하단다. 까닭에 지(地)의 음을 따서 '지'(之)자를 덧붙였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결론을 말하자면 이상은 모두 잘못된 설명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소개돼 있는 비슷한 글들, 즉 서쪽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우백호에 해당하는 동쪽의 낙산(타락산)이 너무 약해(낮아) 고종 연간에 동대문을 수축하며 '지'(之)를 넣어 동쪽의 지세를 보강했다는 설명도 말은 그럴듯하나, 실은 누군가 지어낸 말이다. 왜냐하면 <고종실록> 및 <승정원일기>에는 동대문을 고종 6년에 고쳐 지은 사실은 등장하나, 이때 '흥인지문'이라는 4글자 현판으로써 비보(裨補)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흥인문(興仁門) 공사를 지금 마쳤으나 물길이 막혔으니 소통시킬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따로 수문 한 곳을 뚫으소서.’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고종실록> 6권)

     

    어영청이 아뢰기를, “본청의 자내(字內)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의 북쪽 체성(體城)이 무너진 곳을 이달 7일부터 개축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5년)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인지문'이란 말은 <세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중종실록>에도 나온다. (시기적으로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이 맞는 듯하니,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낙산을 비보하지 않다가 고종 때 느닷없이 '흥인지문'으로 현판을 갈아치운다는 게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모든 위(衛)의 절제사(節制使)는 각기 그 작위(爵位)의 순서대로 광화문(光化門) 앞 좌·우(左右)에 서고, 5사(五司)는 광화문 앞 길에 서는데, 많으면 종루(鐘樓)흥인지문(興仁之門)까지 이릅니다.(<세조실록> 2권)

     

    동서 금표(東西禁標) 연산군 때 서울의 서쪽인 사직동(社稷洞)으로부터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인가를 모두 철거하고 표(標)를 세워 인민의 입주를 금지하였다.(<중종실록> 1권)

     

     

    낮다고 일컬어지는 한양도성 낙산 구간
    1422년(세종 4)과 1704년(숙종 30)에 개축된 성벽 / 성돌이 작은 쪽이 오래된 구간이다.
    낙산 성벽의 가장 높은 곳
    인왕산 구간과는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막상 올라가보면 그리 낮지 않다.

     

    그리고 <승정원일기>에는 영조~순종에 걸쳐 총 445회 걸쳐 <흥인지문>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고종 때 동쪽의 허(虛)함을 비보하기 위해 흥인지문의 현판을 걸었다는 말은 매우 허황되다 아니할 수가 없는데, 결정적으로 <승정원일기>영조 17년 4월 11일 기록에는 영조가 흥인지문에 지(之)자가 첨가된 이유를 궁금히 여겨 신하들에게 묻는 내용이 실려 있다. 동쪽 수구(水口)의 허함을 보완하려 했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나 결론인즉 아무 의미없는 첨자(添字)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신하 중의 한 사람이 수구의 허함을 보완하려 곡성(曲城, 옹성)을 쌓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것을 보면 옹성이 만들어지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또한 <승정원일기>고종 6년의 기록에는 기존의 옹성을 점 더 높이 쌓았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영건도감이 아뢰기를, “흥인지문(興仁之門)을 영건하는 일을 지금 다 마쳤는데, 그 높이가 전보다 더 높아져서 옹성(甕城)과 좌우의 체성(體城)의 성가퀴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니, 알맞게 더 쌓아야 되겠습니다. 수도(水道)가 막힌 것은 소통시키는 대책이 없어서는 안 되니, 특별히 수문 한 곳을 뚫어야 되겠습니다. 성문을 쌓는 동안 삼엄하게 파수하라는 뜻으로 해영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6년)

     

    위 승정원일기에서는 '원래 옹성이 있었는데 동대문을 개축하고 보니 높이가 높아져 상대적으로 옹성이 낮아지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아울러 동대문 문루에서는 1958년의 보수공사 때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량문에서는 고종 때 훈련도감에서 공사를 맡았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 터를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 무지개형 아치)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위 <승정원일기>의 내용을 보완해준다.

     

    ~ 옹성은 역할은 수성(守城)의 원할함을 위해서이다. 즉 적의 공성기(攻城機)가 성문을 바로 때리지 못하게 함은 물론 성문을 노리는 적들을 성벽과 옹벽에서 이중으로 공격하려는 요량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전쟁 때의 방어용이 아닌 행정구역 구획용으로 건립되었으므로 옹성은 그저 '폼'이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면 왕은 무조건 성을 버리고 내뺐다) 동대문의 옹성이 낮은 이유도 그 때문인데 전에는 이보다도 더 낮았던 모양이다.  

     

     

    도성 4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이 둘러 있는 흥인지문
    옹성 둘러보기
    문과 옹성 사이로 지나는 전차 선로 / 1900년 사진
    자세히 보면 여기 저기 금이 간 흥인지문
    흥인지문 둘러보기
    옛 이대부속병원 자리에서 바라본 흥인지문
    1963년의 흥인지문 / 그해 10월 단청공사 준공식을 마치고 찍은 사진이라 함. 이 사림들은 당시 방구 좀 뀌던 양반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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