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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소문(소의문)을 찾아서
    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15. 02:27

     

    안쪽에서 본 서소문

     

    소서문이란 명칭은 한양 도성의 다른 소문들(동소문, 남소문, 북소문)과 달리 귀에 짝 달라붙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이라는 뜻이니 지금도 서소문동, 서소문아파트, 서소문역사공원, 서울시청 소서문청사 등의 이름을 쉬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서문은 다른 소문들과 달리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앞서 말한 서대문(돈의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주변 성곽과 함께 철거된 것인데,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서대문과 달리 소서문은 정확한 위치마저 불분명하다.

     

    소서문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 도성을 축성할 때 다른 문들과 함께 완공되었는데,(태조 5년) 그때도 서소문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린 듯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는 기록이 보인다.(<태조실록>) 그리고 이에 의해 그 본래 명칭이 소덕문임을 알 수 있는데,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 2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이름을 소의문(昭義門)로 바꾸었다. 즉 소의문의 명칭은 1744년, 문루의 건설과 함께 생긴 것이며, 그 전에는 문만 있고 문루가 없었음 또한 알 수 있다. 

     

    ~ 아직도 일부 백과사전에는 소덕문의 명칭 변경이 '예종 비(妃)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의 시호(휘인소덕장순왕후, 徽仁昭德章順王后)에 들어가는 글자를 피휘하기 위해서'라는 일설(一說)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성종실록>에서는 이에 관한 일언반구도 없으며, 또한 위 <영조실록>의 기록이 명확한 바, 장순왕후에 관련된 썰은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되겠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10년의 서소문
    위와 비슷한 시기의 사진
    17세기 도성도 / 서대문 문루가 없음(화살표)

     

    앞서 말한 광희문처럼 서소문도 성 내에서 죽은 자의 운구 통로로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도성의 동쪽에서 죽은 자는 광희문으로, 서쪽에서 죽은 자는 소의문으로 나온 것이었으니 1886년 7월 5일 육영학원의 교사로 조선에 온 호머 헐버트는 비망록에, '아침에 숙소 가까이에 있는 소의문이 열리면 매일 300~400명의 시체들이 들려 나왔다'며 당시 창궐하던 콜레라의 무시무시한 현황을 적었다.

     

    그렇다고 죽은 자의 통로로만 이용되지는 않았으니 이 문을 드나드는 자는 당연히 산 자가 많았고, 주요 궁궐로의 첩경인지라 남대문보다 더 많은 통행량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 중앙일보 사옥 인근 AIA 타워 앞에 있는 순청 터 표석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순라꾼들의 본부가 있어 야간순찰을 하며 도둑과 월장(越牆)하는 자 등을 살폈다. '월야밀회(月夜密會)'라고 이름 붙여진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순라꾼들은 야밤에 다닐 수 있는 특권을 이용해 딴짓을 한 것도 같다. 

     

     

    순청 터 표석
    '월야밀회' / 남자는 전립과 철릭을 갖추고 철편을 들고 있어 순청의 포교임을 알 수 있으며 여자 역시 복장으로 보아 유부녀임을 알 수 있다. 야밤에 몰래 다니던 장옷을 입은 기생 하나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기생의 양쪽으로 180도 벌어진 발은 벽에 착 달라붙었음을 의미하는데,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숨어 보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어색하고, 남자의 불가능해 보이는 발의 자세는 그들이 곧 목적지로 갈 것임을 암시한다.(*^^*)
    성문 폐문 시간 이후 소의문 근처 성벽을 넘는 외국인과 안내인 소년: 한양도성박물관 내 모형 촬영 / '나무위키'의 사진과 설명

     

    서소문은 1914년 일제의 도로 확장 계획에 따라 주변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물론 표석은 중앙일보 사옥 주차장 아래  설치돼 있으나 이것으로는 도무지 서소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다행히도 대한상공회의소 옆 도로변으로 남대문 쪽 성벽이 복원되어 과거의 서소문 자리를 더듬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즉 정동 이화여고 교정에 남아 있는 서대문 남쪽 성벽 흔적과 상공회의소 빌딩 옆 도로변에 복원된 남대문 북쪽 성벽을 구글 스카이맵에 대입시켜 연결하여 소서문로와 교차하는 지점을 찾으면 그곳이 곧 서소문이 될 터이다. 그렇게 찾은 곳이 아래 장소인데, 그중 맨 밑에 있는 택시 사진의 장소가 가장 정확한 서소문 위치로 여겨진다.

     

     

    대한상공회의소 옆 한양도성 복원 표석 / 성벽의 시작점에 "이 성벽은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축성된 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으로서 옛 성벽의 흔적을 재현하고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복원 정비한 것이다(2005.10.25)"라는 글을 새겼다.
    복원된 구간
    서소문의 위치
    중앙일보 사옥 주차장 아래의 서소문 터 표석
    서소문 고가 앞 삼거리 / 오른쪽에 보이는 표석 앞쪽 흰색 승용차 전면으로 성문이 가로질러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운데 택시 있는 곳이 서소문 자리로 생각되어진다.
    '나무위키'에서 추정하는 서소문 위치는 틀렸다고 볼 수밖에....

     

    이 서소문을 나서면 용산강 백사장 새남터와 더불어 구한말 서학쟁이 ·천주쟁이들을 참살하는 장소로 쓰인 '서소문 밖 형장'이 나온다. 그래서 그 현장 앞 고개인 중림동 약현에는 한양 최초의 예배당인 약현성당이 세워졌고,(1892년) 근자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를 기리는 서소문역사공원과 성지 역사박물관이 조성됐다. 하지만 그로 인한 민원이 만만치 않으니, 요지인즉 이 장소가 어찌 특정 종교의 전유 공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011년 시작된 서소문역사공원과 성지 역사박물관 조성에는 국비 시비 구비를 망라하는 총 596억 원이라는 엄청난 사업비가 투여되었으나 결과는 오로지 천주교 순교성지가 된 까닭이었다. 이에 다른 단체에서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으니, 서소문역사공원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란 단체에서는 현양탑의 철거와 그것을 세우며 철거된 윤관 장군 동상을 되돌려 놓을 것을 요구했다. 윤관 장군은 여진정벌의 공로 외에도 남경(현 서울) 조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 이곳에 동상을 세웠거늘 그와 같은 역사성을 무시하고 왜 네 멋대로 철거했냐는 것이다.

     

     

    약현성당
    서소문역사공원의 순교자 현양탑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과 모뉴먼트
    순교자 현양탑 자리에 있던 윤관장군 동상/나무위키

     

    동학농민혁명 단체협의회는 이보다 더 성토했으니, 이곳은 김개남 성재식 이필제 안교선 최재호 안승관 김내현 등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참형을 당하거나 효수된 곳인데 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고 오직 천주교 관련 시설과 기념물 일색인즉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도 그러하니, 이곳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학교도 역시 상당수 이곳을 거쳐갔고, 전주감영에서 잘려 올라온 김개남의 목은 서소문 네거리에서 사흘 동안이나 효수되었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찍은 김개남의 목 / 전봉준의 목으로 잘못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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