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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탕춘대성과 창의문
    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6. 04:12
     
    일제시대 엽서 속의 탕춘대성

     

    지금은 창의문 쪽에서 내리 이어지던 성벽 구간이 사라졌지만 탕춘대성(蕩春臺城)은 본래 창의문에서 북한산의 비봉까지 이어지던 성벽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도 방위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조선왕조는 숙종조에 이르러 청나라 몰래 한양의 도성(都城)을 보강하고 북한산성을 새로 수축했다. 그러면서 도성과 산성을 연결하는 성벽인 서성(西城)을 쌓았는데, 그중 서쪽 구간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이 탕춘대성이다. 

     

    ~ 탕춘대성의 이름은 연산군이 놀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비롯됐다. 연산군은 왕명으로 모집한 기녀(妓女)들인 흥청(興淸)을 끼고 흥청망청했는데 북한산 계곡의 홍제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 근방도 주요 놀이터로서, 봄을 탕진한다는 의미의 '탕춘대'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겸제 정선의 부채 그림 '세검정'도 속의 탕춘대 / 세검정 뒤 바위가 탕춘대이다.
    본래의 탕춘대성 구간
    탕춘대성 쉽게 이해하기

    복원된 탕춘대성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 탕춘대성은 창의문에서 인왕산, 홍지문과 오간수문을 거쳐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이곳 비봉 능선까지 계획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거리는 전체 약 4Km이다.

    오간수문과 홍지문
    홍지문 /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숙종 41년(1715) 세워졌다. 이 문은 1921년 홍수로 오간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후 50년간 방치되었다가 복원되었지만(1977년) 반면 성문 오른쪽 성벽은 도로가 건설되며 사라졌다.

     

    탕춘대성을 축조하는 일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찬반양론이 대립하며 시끄러웠다. 찬성론자들의 주장인즉 북한산이 신라 이래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수도 방위를 위해서는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이 필수라는 것이었고, 반대론자들은 이것이 불필요하며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을 위반할뿐더러지킬 병력도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중 우의정 신완(申琬)이 주축이 된 찬성론자가 우세하였던 바, 숙종 44년(1718) 윤 8월 26일부터 축성이 시작되어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 정도가 완성되었다. 

     

    이후 일단 중지하였다가 이듬해 2월부터 축성이 재개되었는데, 앞서 말했듯 청나라 몰래 쉬쉬하며 건설했던지라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축성 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 길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며 과연 완공을 했는지, 중간에 그만뒀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으나,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인 연융대(鍊戎臺, 현 세검정초등학교)와 도성 외곽 방비를 위한 기관인 총융청(摠戎廳)이 연융대에 설치되어 수도 방위를 담당했다. 

     

     

    1753년 권신옹이 그린 '북악십경 총융영' / 가운데 큰 집이 총융청이고 왼쪽 화살표가 탕춘대이다. 총융청 자리에는 현재 세검정초등학교가 위치한다.
    세검정 초등학교 입구의 총융청터 표석

     

    하지만 총융청은 그때 설치된 것이 아니라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생겨났다. 당시 이괄은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거푸 부수고 들어 와 한양을 장악했는데,(한번은 인조반정 때, 또 한번은 반란 때. ☞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 이에 한양 서쪽의 방어망이 허술함을 인지한 인조 임금이 새로이 총융청을 설치해 수도 방비뿐 아니라 경기 일원의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 총융청은 본래 삼청동에 있었으나 규모가 커지며 1750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내에 있던 장의사(藏義寺) 터로 옮겨졌다. 이것이 신영(新營)으로, 지금의 신영동의 유래가 되었다. 신영은 300칸이 넘는 큰 건물이었으나 총융영이 1884년(고종 21) 폐지되며 건물도 소실되었다. 

     

     

    폐지되기 직전의 총융청 사진
    총융청을 방문한 프랑스 무관들
    장의사 당간/ 장의사는 신라 태종 무열왕 6년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북한산 맡에 세운 유서 깊은 절이었으나 연산군 12년 폐사되었다. 서울시내에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이괄과 이귀의 군사 200여 명은 홍제천변에 있는 홍제원에 집결했었는데, 끝내 주모자인 김류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괄은 돌이키지 않고 반정을 밀어붙였으니 그들 군사는 모래내를 넘어 창의문에 이르렀고, 장단부사 이서 등이 이끄는 군사와 합류해 창의문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진격, 창덕궁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 반정의 무리가 칼을 씻었다는 정자가 세검정이다)

     

     

    세검정의 옛 사진
    복원된 세검정 /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77년 복원했다. 본래 위치보다 앞쪽에 규모가 축소되어 지어졌다.
    세검정과 탕춘대 / 뒤로 보이는 직벽이 탕춘대이다.

     

    이괄은 이렇듯 반정에 큰 공을 세웠지만 무인인 탓에 논공행상에서 밀려 영변부사로 가게 되는데, 억울하게도 반란을 도모했다 했다는 누명까지 씌워진다. 분개한 이괄은 자신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 일행을 죽이고 그대로 변방의 군사들을 몰아쳐 도성으로 쳐들어와 점령하니,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변방에서 거병한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한 유일무이한 사례가 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이때 이괄이 들어온 문 역시 창의문이었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도망가고 이괄은 위풍당당하게 입성해(1624년 음력 2월 10일)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李瑅)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나, 바로 그 이튿날 안현(무악재)에서 벌어진 장만과 정춘신이 이끄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이천 쪽으로 도주하다 곤지암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된다. 거병 후 대소 전투를 치르며 18일 만에 한양을 점령해 파천황을 이룬 이괄이었으나 그 최후는 너무도 허망하였다.  

     

    창의문의 안쪽
    창의문 안내문 /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창의문의 옛 사진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창의문(화살표) / 창의문에서 시작된 북쪽 성벽은 백악산을 넘어 숙정문에 이른다.
    잘 설명된 또 하나의 안내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에 다시 세운 것으로,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들어온 곳을 기념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이 문 부근의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보물 제1881호)

     

    위 안내문을 읽고 "웬 개경 자하동?"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는 타당한 설명이다. 고려시대에 이 고개를 넘으면 고려 숙종 때 설치된 남경(南京)의 행궁이 있었다.(지금의 경복궁 근방) 까닭에 고려 개경과 남경 사이의 통행이 제법 빈번했던 것이니 자하문(창의문) 고갯길은 한양 정도(定都) 이전부터 존재하던, 아마도 한양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었으리라 여겨진다. 태조 5년(1396년) 도성을 쌓을 때 이 고갯마루에 개경으로 통하는 소문을 만든 것이 곧 창의문이다.   

     

    하지만 이 문은 얼마 못 가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폐쇄되었다. 풍수가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는 지맥을 방해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옳다고 받아들여진 까닭이다. 그래서 창의문은 조선조에는 거의 닫혀 있게 되는데, 그 문이 1623년 인조반정군에 의해 갑작스럽게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는 다시 닫혔고, 그 쓰지도 않는 문을 영조 14년(1741)에 개수했다. 

     

    아무튼 그 덕에 창의문은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었고, 2008년 숭례문이 불탄 이후로는 한양 성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된 문이 되었다. 그래서 창의문은 다른 문루를 복원하는데 최고의 고증자료로써 활용된다고 하는 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6년 문을 보수할 때, 1741년 6월 16일에 상량(上樑) 하였다는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립연대를 더욱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겸제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의 '창의문'도
    일제시대 엽서 속의 인왕산 구간 성벽
    서울시의 인왕산 구간 성벽 사진 / 창의문에서 시작된 남쪽 성벽은 인왕산을 넘어 돈의문에 이른다.
    인왕산 성벽에서 본 백악산
    창의문의 옛 사진
    지금과 별반 다름없다.

     

    현대에 이르러 창의문은 또 하나의 극적인 역사와 조우하게 되는 바, 그 유명한 1.21사태이다.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해 남파된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의 목전까지 이르렀으나 창의문 근처에서 경찰의 불시검문에 걸리게 된다. 이에 무장공비 31명과 경찰과의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이때 종로경찰서 최규식 총경을 비롯한 경찰과 민간인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는다.

     

     

    창의문 부근 최규식 총경의 동상

     

    공비들은 군경합동 소탕작전에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 1명은 생포되었으며 1명은 북으로 도주하였다. 생포된 김신조는 방송 인터뷰에서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말해 대한민국을 놀라게 했는데, 그의 증언에 따라 군에는 유격훈련이 생겨났고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3사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향토예비군과 전투경찰대가 신설되었고 학교에는 교련 과목이 생겨났다.

     

     

    사살된 공비와 붙잡힌 김신조
    1.21사태의 흔적 청와대 뒤 한양성벽 구간의 총알 맞은 소나무 / 나들이 나선 가족이 안내문을 읽고 있다.

     

    1.21사태는 이렇듯 우리나라의 군·사회·교육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왔는데, 한편으로는 북한에 보복을 가할 목적으로서 북파 공작부대인 684부대가 창설되었다. 1968년 4월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설된 이 특수부대는 1971년 8월까지 존속하며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가혹한 훈련을 받았으나 1970년 남북한 적십자회담 등 해빙무드가 조성되며 방치되었다. 이후 목적 없는 가혹한 훈련과 질 떨어진 급식이 지속되자 684부대원 31명은 1771년 8월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한다.

     

    인천에 도착한 684부대원들은 시내버스를 탈취해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며 청와대로 향했으나 서울 영등포 대방동 유한양행 앞 도로에서 가로막히게 되고, 이에 결국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다. 그중 27명이 죽고 4명이 살아남았으나 그들 역시 비밀리에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죽는다. 우리에게 영화 '실미도'로 익숙한 이 이야기는 금고털이로 복역하던 백동호가 옥중에서 만난 684부대원 강인찬에게 들은 내용을 1999년 소설로 썼고, 이를 토대로 강우석 감독이 2003년 '실미도'를 제작·상영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실제 684부대원
    그들의 최후
    자폭한 버스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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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