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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I)-윤택영의 재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 31. 05:49
대한제국의 2대 황제가 되는 순종은 왕세자 시절인 1882년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의 딸 민씨(순명효황후)와 혼인하였으나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아내와 사별했다. 이에 1907년 계비를 맞이하니 이 분이 윤택영의 딸 윤씨(순정효황후)이다. 이때 윤씨의 나이 12살이었고 순종은 33살이었으며 장인인 윤택영은 31살로, 사위보다 2살이 적었다.
하지만 황실과의 혼인인데 이것이 무슨 대수랴? 윤택영은 제 딸이 계후가 될 수 있도록 엄청난 재물을 뿌리며 로비를 했고, 당시 궁궐 내명부의 최고 어른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1854-1911)는 윤택영의 청을 까탈 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잖아도 윤씨 집안에 신세 진 것이 많았던 엄씨였던 바, 이 기회에 그것을 다 갚고자 한 듯싶었다. 그가 진 신세에 대해서는 앞서 '윤동주의 '참회록'과 영휘원'에서 언급한 내용을 옮겨 적도록 하겠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8세(1861년 1월)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후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고종을 모시다 사랑을 받아 1897년 영왕(영친왕) 이은을 낳고 1903년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에 책봉된 순헌황귀비에게는 맞지 않는 칭호다.(희빈 장씨에 질린 숙종이 장희빈 사후 후궁은 왕비가 되지 못한다고 국법으로 못박았다)
그의 아버지는 평민인 엄진삼으로 종로 육의전에서 장사를 했으나 빈한했고, 집안의 가난에 쫓긴 엄씨는 궁녀로 입궐해 경복궁의 나인이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의 몸종 격인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1884년 서른한 살 늦은 나이에 고종의 승은을 입는다. 그는 미인도 아닌데다(까놓고 말하면 못 생긴 축이다) 뚱뚱하고 과년했던 까닭에 엄상궁이 승은을 입었다는 소식은 궐내를 경악시켰는데, 명성황후의 경우는 아예 믿으려 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로 밝혀지자 명성황후는 '자존심 스크래치 + 배신감 폭발'로 분노의 매를 들어 다스린 후 궐 밖으로 내쳤다.
나아가 명성황후는 그를 폐서인시켜려까지 했으나 탁지부대신 윤용선이 말려 서인만은 면하였고,(그가 아니었다면 생계가 막연할 뻔했던 엄씨는 훗날 이 은혜를 크게 갚는다) 이듬해 188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죽자 고종의 부름에 다시 입궐하여 임금을 모셨다. 말한 대로 이때 그와 고종 사이에서 생긴 자식이 영친왕 이은이나, 이은은 1907년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된다.(조금 복잡하다) 개인적으로는 신데렐라의 꿈을 이루었지만 시대의 세파(世波)는 비껴갈 수 없었을 터, 구한말의 풍상을 온몸으로 겪던 순헌황귀비는 나라가 병탄된 이듬해인 1911년 서거해 청량리 영휘원에 묻혔다.
엄귀비에게는 윤용선이 큰 은인이었다. 이에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그의 손녀를 계비로 간택했던 것이었다.(순정효황후 윤씨) 이에 윤택영은 졸지에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덩달아 그의 형 윤덕영도 떴다. 윤덕영은 대해서는 바로 전편인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에서 충분히 설명해 더 이상 덧붙일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칭찬받을 구석이 있다. 제 동생 윤택영이 무분별한 경제관념으로서 평생을 빚쟁이로 산 것에 비하면 그는 적어도 부동산 재벌로서는 자리매김한다.윤택영 또한 제 형과 마찬가지로 친일과 한일합병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1910년 10월 16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50만 4천원의 은사금을 받았다.(100억 8천만원) 이후 조선임업조합 간사, 시정5년기념공진회(성공적 조선 합병과 통치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박람회) 발기인, 한일불교통합모임의 고문 등을 역임하며 친일에 앞장섰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가용 승용차을 타고 다녔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부자였다. 그리고 일제로부터 거액의 은사금까지 받았던 바, 평생 그 돈을 다 쓰기도 힘들듯 보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낭비벽이 커진 그와 가족들은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 하였으니 그 많던 돈을 유흥과 사치로 탕진하고 결국은 빚까지 지게 되었는데, 종국에는 빚쟁이가 110명에 이르렀다.(이중 20명은 일본인) 윤택영이 돈을 갚지 못하자 채권자들은 마침내 소송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선 최고의 빚쟁이',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借金大王)' 등의 불명예스런 별명도 획득했다.
급기야 윤택영은 사돈인 순종에게 빚을 갚아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으나 그 또한 잦아지자 순종마저 이것을 거절했다.(고종과 순종이 1~2회씩은 변제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장남 윤홍섭과 함께 중국 상해로 출국해 7년 동안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순종이 승하한 1926년 5월 비밀리에 귀국했으나 그마저 언론에 알려지며 다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부자인 자신의 형 윤덕영에게 매달렸으나 매몰찬 거절에 주먹다툼을 벌였다는 기사가 <개벽>에 실리면서 또 한번의 공개 망신을 자초했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형 ‘대갈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
그 사정이 얼마나 딱했던지 조선총독부가 특별예산을 편성해 도와준 적도 있다고 하는데, 윤택영은 결국 재차 중국으로 도망갔고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채 1935년 10월 24일 북경에서 죽었다. 앞서 말한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제기동에 있던 그의 집 재실(齋室)이 복원돼 있다. 이 재실은 1900년대 초 그의 딸이 동궁 계비로 책봉될 즈음에 지어진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등을 지고 있는 특이한 형태에, 뒤로는 사당을 배치한 元자형의 구조를 이룬다. 앞서 말한 민영휘 저택, 윤덕영 소실댁과 더불어 친일파 3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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