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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혹은 숙청문에는 문루가 존재했을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2. 23:59
가끔 백악산(북악산)을 올라 숙정문(肅靖門) 앞을 지날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하다. 이 일대는 그 전에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앞서 말한 1968년의 1.21사태 이후 청와대 뒤쪽 북악산 도성 구간은 군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접근조차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무려 38년 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던 곳이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삼청터널 인근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로 이어지는 약 1.1㎞ 구간이 개방되었다.(2006년 4월) 이후 점진적으로 개방 구간이 확장되었는데, 올해 2022년에는 50여년간 폐쇄됐던 성곽 남측면도 개방돼 전체 구간이 뚫린다하니 기대가 된다.
* 백악일까, 북악일까?
문화재청은 2007년 북악산 일대를 사적 및 명승지 제10호로 지정하였다가 2009년 명승 제67호로 지정하였다. 명승 지정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內四山 : 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 및 문헌 등 사료에 전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서울 백악산 일원”으로 정하였다. 즉 일제 강점기 이후 불린 북악산이란 이름 대신에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불린 백악산으로 회복시키기로 한 것이다. (Daum 백과)
기분이 묘하다 함은 이 구간과 관련된, 자살한 두 명의 정치인이 떠오르기 때문인데, 2020년 7월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한 곳은 한양도성 백악산 구간 중 최초로 개방되었던 와룡공원 ~ 숙정문 구간으로, 와룡공원 CCTV에 마지막 보습이 잡혔고 이후 숙정문 가까운 숲길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괜히 그 길을 피해 걷게 되는데, 논평을 떠나 그저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숙정문 장(章)의 문을 연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은 내내 닫혀 있었다. 이유는 알려진 그대로다. 즉 숙정문은 1936년(태조 5) 9월 숙청문(肅淸門)이라는 이름으로서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폐쇄하였다. 내용인즉 창의문과 숙청문은 백악산의 양팔에 해당하니 이를 닫아서 한양의 지맥(地脈)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유일하게 없어진 서대문(돈의문)'에서 말한 대로 같은 해, 비슷한 상소로써 통행량 지대한 서대문을 폐쇄시키기도 한 최양선이었으니 통행이 드물던 북문은 쉽게 닫혔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적으로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問)은 통행량이 많지 않은 문이었고, 경복궁에서 숙청문을 나와 원산이나 함흥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함흥차사 외에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북대문의 폐쇄에는 별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을 터, "이에 문을 닫고 가는 길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그 나무들은 지금껏 무성하다. 다만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10년(1504) "숙청문(肅淸門)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라"는 지시가 보이는데, 실제로 이 공사가 행해졌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실록>에서 '가뭄이 심하여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중종 4년, 선조 9년)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숙정문은 닫혀 있었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가뭄에 숙정문을 연 이유는 음양오행설을 따른 까닭이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관계로 양기를 누르고 음기를 들여 비를 부르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또 남은 화(火)에 해당하고, 북은 수(水)에 해당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종조에 이르러서는 문의 명칭이 숙정문으로써 등장하는데, 문의 명칭이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실록>에서도 말이 없고 <승정원 일기> 같은 데서도 따로 언급된 바 없다. 또한 본래 도성 4대문의 이름은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에 좇아 각각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이 되었다는데 북대문만 별종이 된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설명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세간에 이르는 설득력 없는 말, 즉 '북대문 주변의 지형이 험난해 사람이 오갈 수 없었고,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늘 닫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지(智)자를 넣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믿기도 좀 찜찜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이 말에는 제법 설득력이 실린다. 조금 과장을 섞자면 숙정문에 오르기는 설악산 권금성 오르기 만큼이나 힘들다. 이 험난한 길로 사람들이 오르내리지 않았을 것 같다는 얘기다.
풍광 또한 빼어나니 적어도 숙청문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이 간다. 당연히 맑고 푸른 주변의 풍광 때문이니 문루에 서면 안이고 밖이고 간에 그저 넋놓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작 문루는 눈에 거슬린다. 역사 왜곡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반적 생각과 달리 숙정문은 본래부터 문루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즉, <실록>을 비롯한 어떤 기록에서도 문루나 현판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여러 '도성도'(都城圖)에는 소문(小門)들도 문루가 엄연한 반면 숙정문에는 문루가 보이지 않다.
그리고 '숙청문 자리'(肅淸門址)라고만 돼 있고 문루는 물론 문조차 없는 17세기 '도성도'도 존재하는데, 이것을 보면 영조 시대 이전에는 아예 성문을 막아버린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성 문은 그만큼 효용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다. 앞서 말한 대로 실제로 가보면 그 이유를 몸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숙정문은 이처럼 접근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까닭에 일제시대 도로을 넓히기 위해 헐려나간, 혹은 헐릴 뻔한 다른 성문들에 비해 무탈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또한 그러한 연유로써 현존하는 도성 성문 중 유일하게 양쪽 성벽이 붙어 있게 되었으니, 그리하여 서쪽으로는 인왕산, 동쪽으로는 낙산구간과 오롯이 연결되어진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 동서쪽 성벽 구간이 가히 절경인데, 머잖아 청와대 남쪽 방면도 개방된다 하니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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