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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악주산론과 숭례문
    한양 성문 이야기 2022. 2. 6. 06:04

     

    조선이 한양에 정도(定都)할 때 주산(主山)을 어느 산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격론이 있었던 듯싶다. 살펴보자면 크게 3가지 안(案)이 부딪혔다. 

     

    1.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 ㅡ 안산(신촌 봉원사, 연세대, 이화여대 등을 품고 있는 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것으로 하륜이 주장함.  

     

    2.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 ㅡ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것으로 무학대사가 주장함.  

     

    3.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 ㅡ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과 타락산(낙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것으로 정도전이 주장함. 

     

    하륜은 계룡산 신도안(新都案)이 도성의 입지로는 좁고 궁벽한 위치라 하여 반대하고 한양 정도를 이룬 사람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주장한 모악주산론 역시 같은 이유로써 배제되었다. 이후 인왕주산론과 백악주산론이 갑론을박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사대론(事大論)인 백악주산론이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모든 궁궐들이 남향(南向)이고, 임금의 덕목이 남면(南面)해야 하는 것이 유학의 기본이라는 주장을 이성계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 이에 한양 궁궐의 입지가 동향(東向)이 되기를 원해 주청했던 무학대사의 인왕주산론은 폐기됐다. 오랫동안 입지 선정에 공을 들였던 무학 대사는 그것을 개탄하여 왕사(王師) 직을 사직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야사(夜史)가 전하는데, 이때 "나의 말을 좇지 않았으니 200년 내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며 왕업은 500년을 이어가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비슷하게 된 까닭이다. 

     

    백악주산론을 관철시킨 정도전은 백악산을 등지고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조영했다. 그 결과 백악-궁궐-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주작대로가 만들어졌고, 내사산(內四山)인 백악,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이 서울 바깥을 둘러싸는 외사산(外四山)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한가지 문제점이 생겼다. 한양의 주산이 된 백악과, 조산(朝山)이 된 관악이 모두 화산(火山)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서 화산, 즉 '불의 산'이라는 것은 음양오행설과는 무관한, 굳이 따지자면 풍수론에 가까운 생각으로서 그 모양이 마치 불이 타오르는 형상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찌 됐든 도성의 모든 것들을 한방에 피폐시킬 수 있는 화재의 기운과 가깝다는 것은 마음 쓰이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게다가 도성의 남산인 목멱산(木覓山)에도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 있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목생화(木生火)'로서, 나무는 불을 살리는 역할이니 그 또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의 내사산과 경복궁의 위치
    관악산 촛불바위
    뾰족한 연봉 위에 세운 관악산 연주암
    불꽃 이미지의 관악산 원경
    겸재 정선의 '백악부화암(白岳負火岩)도' / '불꽃바위를 지고 있는 백악산' 그림이다.
    심전 안중식(1861~1919) '백악춘효(白岳春曉)도'
    백악산과 경복궁 / 문화재청 사진
    광화문과 백악산 / 세종로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2021년 1월 1일에 찍은 사진이다.

     

    전래되는 문서나 이야기들을 보면 굳이 풍수가가 아니라도 관악산은 그 형상으로 인해 누구나 화산(불의 산)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산에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보았던 바,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방책이 강구되었다. 그 방책으로서 나온 것이 다음의 3가지였다.

     

    1. 광화문 앞에 해치를 설치.

    2.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 조영.

    3.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걸음.

     

    해치를 만든 이유는 해치가 방화신수(防火神獸)인로서 불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요, 연못 남지를 조영함은 음양오행설의 수극화(水剋火, 물은 불을 이김)를 따랐기 때문인데,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건 이유는 조금 우습다. 불이 타오르는 모양새인 세로 방향으로 현판을 검으로써 이열치열(以熱治熱)과 같은 방식의 이화치화(以火治火)로 불을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다.

     

    ~ 혹자는 숭례문의 례(禮) 자는 오행으로 볼 때 불(火)에 해당되므로 높을 숭(崇) 자의 글자와 함께 세로로 걸면 이화치화(以火治火)가 되므로 그리 했다고 설명하는데, 례(禮) 자가 오행으로 그렇게 해석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불로 불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은 틀림없었으나 옳은 방법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광화문과 해치 상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광화문과 해치 상
    남지 표석
    남지 표석과 숭례문
    세로로 걸린 숭례문 현판
    아직도 풋내 가시지 않은 숭례문 누각과 단청
    안쪽에서 본 숭례문
    천장의 쌍룡도
    2021년 수문장이 있을 때 찍은 사진
    복원된 숭례문의 야경
    복원된 숭례문과 남산 성벽 / 반면 힐튼호텔은 헐린다고 하니 안타깝다. 일리노이대학 건축학 교수였던 김종성의 1983년 작품으로, 대한민국의 성장과 건축예술을 함께 대변할 수 있는 많지 않은 20세기의 유물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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