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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뜨거운 밀회가 이루어지던 숙정문밖과 선잠단(先蠶壇)
    한양 성문 이야기 2022. 2. 3. 23:52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은 다른 성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세워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본래 한양의 방위는 유교의 이념을 좇아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신(信)에 충실하였으니 각각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의 이름이 되었고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두었다. 하지만 북대문에 의당 들어가야 할 지(智)자는 생략되었는데, 앞서 숙정문 개요에서 말했듯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설명을 찾을 길 없다. 

     

     

    보신각 /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2층 종루가 1979년 재현됐다.
    과거 쭈그리하던 보신각 / 내가 어릴 때는 이런 모습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보신각 종 / 원래 종로 원각사의 것이나 임진왜란 후 보신각에 걸렸다가 노후화로 198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한양도성 성문을 여닫는 신호로써 타종됐다.

     

    혹자는 이르기를, 원래는 지(智)자를 삽입해 홍지문(弘智門)이었다가 이름이 변했다고도 하는데, 왜 숙청문이 됐고, 그것이 왜 다시 숙정문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에는 궁색하다. <실록>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다만 <승정원일기>에  일대의 소나무의 채벌을 금한 명령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중형을 청하는 한성부의 계(啓)가 눈에 띄는 바,(숙종 18년 3월 9일) 숙청문의 이름이 주변의 풍광과 무관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러한 관리 때문인지 일대는 지금도 맑고 녹음이 짙다. 

     

     

    북정문(北靖門) 혹은 북청문(北淸門)으로 더 많이 불린 숙정문
    숙정문 성곽 주변의 솔숲

     

    아무튼 그래서 숙청문이 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이름이 숙정문으로 바뀐 이유는 여전히 모호하다. <실록>에는 중종 4년(1509) 6월 3일 기사에서 숙정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나 개명에 대한 마땅한 설명은 따르지 않는다. 결국 이번에도 그 이름자에서 무엇인가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을 듯한데, 그 과정에서 뜻밖의 흥미로운 사실이 도출되었다. 

     

    '숙정(肅靖)'의 뜻은 '정숙함을 단속한다'는 뜻이다. 정숙하지 않게 단속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닐지니 '정숙하도록 단속한다'는 뜻이렸다. 여기서 단속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음기(陰氣)이다. 음양설에 있어서 우연찮게도 숙정문은 음(陰)의 상징이니 <명종실록>에는 그 음양설이 어떻게 응용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날씨가 가물면 남문은 닫고 북문을 열며 피고(皮鼓, 북) 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음(陰)을 부지(扶持)시키고 양(陽)을 억제하는 뜻입니다. 지금 한재(旱災, 가뭄) 끝에 장마가 개지 않아서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으니, 전례에 따라 숙정문을 닫고 숭례문을 여소서" 하고 예조가 청하니 명종이 그대로 윤허하였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숙정문은 풍수쟁이 최양선의 풍수설에 따라 닫힌 이후, 가뭄이 심해 음기가 필요할 때만 열렸다. 

     

    그외에도 실록에는 가뭄으로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음기를 불러들였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종실록> 59권, 중종 22년 5월 9일 기사에는 【비가 안 올 때에 항상 하는 일이다 (不雨時亘規)】라는 부언까지 해놓았다. 더 이상 자세하게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종 때의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숙정문을 폐쇄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한다. 부녀자를 비롯한 남녀의 음기를 단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니, 그 설명 중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라는 말이 나온다.

     

    뜻인즉 '뽕나무 밭에 부녀자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바람이 분다'는 의미로서 '고대 주나라 선혜왕 때 귀족들이 매우 음란하여 뽕나무밭에서 남녀가 밀회하였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계고(戒告)의 문구로 쓰였다. 실제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니, 숙정문 밖에 위치한 성북동 선잠단(先蠶壇) 및 숙정문 부근의 뽕나무밭과 솔숲은 조선시대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외간 남자와 은밀한 애정을 통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누구누구가 어디어디에서 놀다 왔다는 소문이 '아니면 말고'식으로 돌아다녔고, 나아가 한양 세시풍속 가운데는 정월대보름 전에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세 차례 다녀오면 그 해에 일어날 재난의 운수가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도성 안 많은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결론인즉 숙정문을 찾는 부녀자와 함께 그 짝이 되려는 남정네들이 몰려들어 풍기가 문란해지자 성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선잠단은 조선시대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가 서릉씨(西陵氏)라는 잠신(蠶神, 누에치기 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고 친잠례(親蠶禮)를 행했던 곳으로, 주변에는 양잠을 위한 뽕나무밭이 무성했다고 한다. 선잠단은 그 터만 전해지다가 2016년 발굴조사와 함께 유적이 정비되었으나 이미 도로에 점유된 부분은 복원 범위에 포함되지 못했다고 안내문은 전한다. 예전에는 그 면적이 지금보다 훨씬 컸다는 얘기이니, 밀회를 즐기기 위해 숙정문과 선잠단 부근에서 어슬렁거렸을 선남선녀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난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숙정문 밖과 선잠단은 조선시대의 '성(性) 해방구'로서, 성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정숙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증명할 수도 없고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조선조 때처럼 닫혔던 숙정문은 이제 개방되었고, 선잠단은 정비되어 과거를 거닐 수 있다. 선잠단은 과거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지만 깔끔하며, 주변에는 '성북선잠박물관'이 세워져 옛 선잠단과 당대의 풍습, 제례(선잠제)의 모습 또한 살펴볼 수 있다.

     

     

    선잠단 터의 옛 사진 / 왼쪽의 공터처럼 보이는 곳이 선잠단이다.
    2017년 선잠단 터 발굴 현장 / 조선일보 사진
    복원된 선잠단 / 정종 2년(1400)에 최초로 설치됐다.
    복원된 선잠단 / 왼쪽으로 성북초등학교가 보인다.
    선잠단 터 표석
    선잠단 터 안내문
    선잠단 터 부근의 한양도성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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