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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의 명암, 청량리 588과 부흥주택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0. 30. 00:51
지금 청량리 588과 부흥주택을 기억하는 분은 몇이나 될까? 스스로 답을 하자면, 청량리 588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기억하는 분이 많을 듯하고 부흥주택은 현존하지만 주민들 외에는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을 듯하다. 제목에서 말한 대로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이 두 곳은 현대화의 명암이 짙게 드리워진 곳으로, 청량리 588은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이었고, 부흥주택은 서울의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1950년대 중반, 정부와 서울시가 조성한 최초의 대규모 공영주택단지이다.
청량리 588은 사라졌지만 미아리 텍사스와 더불어 지금도 집창촌의 대명사처럼 불려진다. (종암동의 미아리 텍사스촌은 지금도 잔존한다) 그런데 고유지명처럼 불린 청량리 588에 숫자가 붙은 내력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실제로 서울의 도시 공간을 연구해 온 학계도 이름의 유래는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데, 2010년 동대문구청에서 발간한 <동대문구의 오늘, 과거 그리고 미래와 만나다>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시내 대표적인 유곽지역의 하나로 손꼽힌 곳이 청량리 588이다. 588은 번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청량리동 588번지이어야 하지만 실제 행정구역은 전농동 588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청량리역과 가까워 청량리 588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도 정확치는 않다. 청량리 588의 실제 번지수는 동대문구 전농2동 620번지와 622~624번지이기 때문이다. 역시 확실치는 않지만 이 지역 앞을 지나는 588번 시내버스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유력한(?) 설 중의 하나다. 아무튼 청량리 588은 유명 설렁탕집 청량리옥으로 접어드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량리역과 근접해 있었던 관계로 역세권 특수를 누리며 1970년대부터 2014년까지 번성했다.
이렇듯 명성(?)을 떨친 청량리 588이었지만 본래 청량리는 유서 깊은 비구니 절 청량사가 있던 공간이었고(청량리 동명이 여기서 유래됐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울려 사는 서울 동부의 대표적 주택가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종삼'(종로 3가) 집창촌과 동대문 밖 창신동, 서울역 앞 양동, 중구 묵동 일대의 윤락가가 1984년 서울시의 4대 문 집창촌 철거계획에 따라 사라지며 밀려 밀려온 곳이 이곳 청량리역 일대였다.(용산역, 영등포역, 천호동, 미아리 등과 더불어)
청량리 588은 주변의 유흥업소와 어울리며 단시간 내에 메이저급으로 급 부상했다. 그 배경에는 전국 윤락가 중 청량리 588이 최고라는 입소문이 한몫했는데, 필시 가장 미인이 많다는 뜻일 터였다. 더불어 호객행위 또한 극성이어서 당시 서울 동부의 대표적 약속 장소인 청량리역 시계탑 앞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면 끊임없이 들러붙는 아주머니들 때문에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얼마 전까지도 존재했던 그 시계탑이 지난 주말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는 새로운 현대적 디자인의 시계탑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며 미리 옛 시계탑 사진을 한 두 장 찍어두는 건데....)청량리 정비 사업은 1994년부터 있었다. 그러나 업소의 반발과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며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다 2012년 서울시가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서울시는 청량리역 일대를 일괄 정비하려는 정부 계획에서 벗어나 사업에 반대하는 지역은 빼고 원하는 지역만을 분리해 정비사업을 추진키로 했는데, 청량리 588은 '청량리4구역 재정비촉진지역'으로 분류되며 급속한 개발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2014년 일대의 집창촌이 마침내 철거되었고 수년간의 공사 끝에 5개 동의 초고층 주상복합단지가 완공되었다. 옛 대왕코너 자리에도 65층의 주상복합 마천루가 건립됐다.
청량리 부흥주택은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 후 사회적 문제가 된 서울의 심각한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정부와 서울시가 조성한 공영주택단지다.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는 언뜻 일제강점기 군수물자 보급공장 노동자들의 합숙소인 인천시 부평구의 영단주택을 연상케 한다. 영단주택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에서 만들어 보급한 줄(line) 사택으로 일본식 개량 주택에 온돌을 깐 형태의 임대주택이다.
청량리 부흥주택이 영단주택 단지 형태와 비슷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이곳 전체가 1956년 미국의 원조와 일본식 건축기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공동주택이기 때문이다. 동대문구 청량리2동 203번지와 205번지 일대에 들어선 주택단지는 이른바 입식(立式) 구조로서 부엌과 화장실을 집 내부에 설치했다. 하지만 실내 화장실에 거부감을 느낀 당대의 사람들로 인해 일부 주택은 바깥으로 옮겨졌던 바, 지금도 화장실이 옥외에 있는 집이 눈에 띈다.
화장실이 내부에 있으면서도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이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수세식 화장실이 일반화되며 대부분의 가정에서 다시 화장실을 실내로 들여놓았다. 부흥주택은 건축 자금의 형태 및 출처 그리고 목적별로 부흥주택, 국민주택, 재건주택, 희망주택, 외인주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건설되었으나 형태는 모두 비슷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입식 생활을 하며 거실 문화를 향유하였으며, 1층은 주인집, 2층은 세입자가 사는 주거형태가 오랫동안 고착화되었다.
부흥주택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데는 근방에 청량리역과 성동역이 위치한 이른바 역세권 주거지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지금은 잊혀진 성동역은 옛 미도파 백화점 자리에 있던 역으로(현 제기동 한솔동의보감 건물) 청평-가평-강촌을 지나 춘천까지 이어지는 총 93.5㎞ 경춘선의 시종착역이었다.1939년 7월 25일 개통된 경춘선은 서울동부의 관문으로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견인, 지금의 경동시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1970년 서울 도심철도정비사업으로 인해 성동역 ~ 성북역 구간이 폐지되고 1971년 역사도 폐지되었다. (이때부터 경춘선 시종착역이 청량리역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홍릉근린공원과 한신아파트 사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직선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지난 50~60년대로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길과 집들은 오래되었음에도 부평 영단주택과 달리 전혀 슬럼화되지 않았으며 별로 낡지도 않았다.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는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가 근대 주거지 개념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시점에 건설된 초기 집합주택으로서 우리 주거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건축물들이 상태면에서 매우 잘 보존되어 있는 근대 대규모 주거단지로서 기록 · 보존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라며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네의 역동적 느낌은 그냥 놔두어도 영원할 것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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