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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현세자의 후손 경선군·임창군·밀풍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1. 3. 22:15

     

    조선의 16번째 임금 인조(재위 1623∼1649)의 맏아들 소현세자(1612∼1645)가 독살된 이야기는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범인은 아버지 인조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9년간 고초를 겪었던 왕자의 귀국과, 이에 자신이 왕위에서 떨려날까 염려한 인조에 의해 소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스토리의 영화 '올빼미'가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했다.

     

    록에도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임을 깊게 암시하고 있으니 <인조실록> 1645년(인조 23)  6월 27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고운 빨간 빛깔의 흙)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임금)의 행희(幸姬) 조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 염습  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헝겊)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영화 '올빼미'의 포스터
    소현세자가 승하한 창경궁 환경전
    인조의 침전이던 창경궁 양화당

     

    현세자가 승하한 후 부인인 강빈(姜賓)은 인조를 저주하고 임금 수라에 독약을 넣었다는 모함을 받아 폐빈되었고 1645년(인조 24) 3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울러 강빈의 노모와 4형제도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폐빈되었기에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하고 가문 묘인 광명시 선영에 장사 지내졌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마저 연좌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아비가 아닌 어미의 죄에 연좌된 드문 사례였다.

     

    소현세자가 장자였으므로 법도 대로라면 그의 장자인 이석철(경선군)은 원손(元孫)이 되어 왕위를 이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원손이 되기는커녕 동생인 석린·석견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648년 11월 풍토병으로 죽었다. 당시 겨우 12살이었다. 이어 동생인 이석린(경완군)이 12월에 죽었다. 할아버지 인조가 어미의 죄에 연좌해 손자를 둘이나 죽인 셈이었다. 소현세자와 그의 가족들의 생애는 너무도 기구하여 드라마로서도 여러 차례 제작된 바 있다.

     

     

    jtbc '꽃들의 전쟁'

     

    당시 6세였던 막냇동생 이석견(경안군)은 그나마 형들과 달리 17년 더 살았지만 22살로 요절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경선군과 동생 경완군의 무덤은 현세자의 무덤인 고양시 소경원(昭慶園) 가까이 있으나 군부내 내에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안군 이회(초명 이석견을 이회로 개명함)의 유택은 고양시 덕양군 대자동 산65-2에서 만날 수 있다. 경안군은 임창군과 임성군 두 아들을 두었는데, 경안군의 무덤은 아들 임창군과 함께 한다. 그 두 기가 고양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돼 있다.  

     

    오래 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KBS의 '추노'라는 퓨전 사극은 도망간 노비를 쫓는 추노꾼의 이야기에다 경안군 이회의 비극적 삶을 얹었다. 조선 최고의 무사이자 소현세자의 충복이었던 송태하(오지호)는 제주도에 유배 중인 어린 석견(당시 그는 겨우 4살이었다)을 탈출시켜 새 임금의 새 나라 건립을 꿈꿨던 듯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나 도망 간 관노비를 잡는 기관인 추쇄도감(推刷都監)은 소공동 남별궁 안에 있었다. 

     

     

    남별궁 정문 자리에 지어진 서울 시청 앞 환구단 삼문
    드라마 '추노' 속의 이석견
    드라마 '추노' 홍보 포스터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이고, 석견은 7살 때인 1650년 작은아버지인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강화도로 이배되었다가 교동도로 옮겨졌고, 13살인 1656년에는 귀양에서 풀려난 후 경안군에 봉해지며 복권되었다. 다만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앞서 말한 대로 1665년에 22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경안군은 허확의 딸과 혼인해 이혼(임창군)과 이엽(임선군) 두 아들을 두었다.

     

     

    경안군의 묘(위)와 아들 임창군의 묘(아래)
    경안군의 묘
    경안군 묘의 묘표 / 총 높이 196cm, 폭 60cm, 두께 26cm이다.
    경안군 묘의 석물
    경안군 묘에서 내려본 임창군의 묘 / 맨앞에 있는 작은 무덤은 임창군의 손자 웅천군의 묘이다.
    임창군의 묘
    임창군의 묘표 / 총 높이 215cm, 폭 82cm, 두께 34cm다. 묘비의 글씨는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 이감(李堪)이 썼다.

     

    임창군의 동생 임성군 이엽(1665~1690)큰아버지 경선군의 계자로 입적되어 소현세자의 적통을 이으려 했지만 후사없이 26살에 병으로 죽었다. 임성군의 묘는 경선군의 묘 오른쪽 숲속에 부인 남양홍씨와 함께 합장묘로 꾸며졌으나 후손이 없어서인지 손이 안 간 묘처럼 투박하고 을씨년스럽다.

     

     

    임성군의 묘
    초탈한 듯, 혹은 체념한 듯 보이는 임성군 묘의 문인석

     

    임창군의 아들 밀풍군 이탄(1698~1729)의  삶 역시 기구했다.  결정적으로는 1728년(영조 4) 소론의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일이 생과 사를 갈랐다. 앞서도 여러 번 거론되었지만 영조는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왕이 된 봉림대군의 후손인 데다 어미는 미천한 무수리였다. 반면 밀풍군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직계이니 정통성에 있어 영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쨉이 되지 않는 몸이었다.  

     

    그럼에도 반란이 제압된 후 밀풍군은 반역 괴수로 압송되었고 자결을 명 받았다. 붙잡혀 온 이인좌 등을 문초했을 때 반란의 무리들은 밀풍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이실직고하였다. 그러나 밀풍군은 대답하지 않았다(密豊不答云)고 또한 사실을 말했음에도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비운의 왕재(王才) 밀풍군은 서른 둘의 나이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26년 후인 1755년(영조 31)에 무신란(이인좌의 난은 1728년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이라고도 불린다)이 다시 재론되며 가족들이 노륙(孥戮, 죄인의 처자를 죽음에 처함)됐고, 그의 막내동생 밀운군 또한 심내복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때도 밀운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나 오로지 이씨 왕가의 정통성을 지닌 소현세자의 직계라는 사실만으로 유명을 달리해야 했다. 

     

     

    밀풍군의 묘
    봉분 앞에 놓인 무엇 / 석함처럼 보이나 처음보는 것이라 설명할 재간이 없다.
    밀풍군 묘의 석물
    밀풍군의 묘 아래로는 장남 관석(觀錫)의 묘가 자리한다.
    밀풍군 묘에서 본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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