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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인 명나라 궁녀 굴씨 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1. 5. 18:03

     
    앞서 말한 고양시 덕양군 대자동 산65-2의 야산인 대자산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들 외 명나라 궁녀 굴씨의 무덤도 만날 수 있다. 굴씨의 무덤은 어제 올린 밀풍군 무덤 사진의 숲길을 따라 약 50미터 지점에 있는데 예전에는 찾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그 언저리에 아래와 같은 푯말이 세워져 길 안내가 된다. 푯말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밀풍군 무덤에서 보이는 숲길
    굴씨 묘 안내문

     
    중국 명, 청나라 교체기의 궁녀로 성은 굴씨(屈氏) 이름은 저(姐)로 알려져 있다. 굴씨는 중국 명나라 소주 지방 양인 출신의 딸로 태어나 명나라 숭정황제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 이후 청태종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구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청나라에 잡혀온 소현세자를 모시게 되었다. 청나라 심관에서 소현세자를 모시다가 조선으로 함께 돌아오게 되었다.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셨으며 소현세자를 따라 향교방(鄕校坊)*에 있었으나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자수원(慈壽院)*에 살았다.
     
    굴씨는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는데 비파를 잘 연주하고 새와 짐승을 기르는 신비로운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청나라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청 오랑캐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그럴 기회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오. 허니 내가 죽거든 청나라로 가는 길가 서쪽 교외에 묻어다오"라고 했다.
     
    이렇게 명나라 여인 굴씨는 청나라에 대한 분노와 한을 지닌 채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0세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명나라 예법을 전해주고 청나라와의 외교 마찰을 완화, 공녀의 인원을 줄이는 데도 기여했다고 한다. 묘소는 굴씨의 예언대로 중국과 조선이 연결되는 서쪽 교외 대자동에 묻혔는데 잔디가 잘 자라지 않은 붉은 무덤으로 유명하다. 인근에 소현세자 후손들의 묘소가 향토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 향교방은 종로구 안국동 교동초등학교 부근의 동네다.  

    * 자수원은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에 있던 자수궁을 말한다.  
     
     

    굴씨의 묘 / 묘표에 '소현세자 청국(淸國) 심관(瀋舘) 시녀 굴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심관은 소현세자가 머물던 심양관을 말한다.
    묘표는 근자에 세워졌다. / 원래 굴씨의 묘비가 있었으나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살한 후 묘표도 사라졌다고 한다.

     
    무덤은 초라하지만 관심을 끈다. 우선은 명나라 궁녀가 왜 조선 땅에 묻혔나 하는 궁금증이 드는데,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적힌 안내문의 설명을 따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옳지 않은 부분도 있으니, 먼저 굴씨의 이름이 저(姐)일 리 없다. '저'의 훈은 '누나'로서 조금 나이 먹은 처자를 이르는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저에 '작을 소' 자를 붙여 소저(小姐)라고 하면 처녀나 젊은 여자를 이르는 말이 된다. 
     
    기타 안내문에 적힌 내용은 효종 때의 문인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이 쓴 <한거만록(閒居漫錄)>*과 정조 때 간행된 <존주휘편(尊周彙編)>*을 따른 것이나, 그러면서도 사족도 붙었으니 청 태종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구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거나, 청나라와의 외교 마찰 완화, 공녀의 인원을 줄이는 데도 기여했다는 썰 등은 다분히 소설적이며, 유언은 어쩐지 같은 소주(蘇州) 사람 오자서의 유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역시 <한거만록>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다분히 부풀려진 내용인 듯하며, 훗날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가 쓴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 속의 "나를 서쪽 길에 묻어주길 바랍니다(幸埋我西郊路)"라는 굴저의 애뜻한 유언 또한 <한거만록>에 의거했다. 아울러 <한거만록>에는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 이혼(李焜)이 굴씨를 위해 지은 묘지(墓誌)가 인용되어 있는데, 실제로 굴씨 묘에서 출토된 듯 보이는 백자 묘지석이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에서 발견됐다. 

     

    * <한거만록>은 효종의 사위인 동평위(東平尉) 정재륜이 궁궐에 드나들면서 보고 들은 궁궐의 기이한 내용과 유명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야사집으로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 <존주휘편>은 국왕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된 20권 7책의 책으로 명나라에 대한 존명(尊明)의식과 전통적 화이론(華夷論, 중국의 문화나 민족을 높이고 타민족의 그것을 낮게 평가하던 논리)이 담겨 있다. 여기에 명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오게 된 궁녀들의 이야기도 양념으로 실렸는데, 그중 굴저에 관한 에피소드가 몇 대목 등장한다.
     
     

    임창군 이혼이 지은 백자 굴씨 묘지(墓誌)

     
    이것저것을 종합해 굴저의 이야기를 풀어보면, 굴저는 중국 소주 지방의 양인 출신으로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숭정제)의 부인 주황후(周皇后)의 궁녀였는데, 의종 내외가 자결한 뒤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청에 포로가 됐다. 그녀는 소현세자 내외가 머물던 심양 심관에 궁비(宮婢)로 배속되었다가 소현세자가 청의 인질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인 1645년(인조23)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모시다가 그녀가 사사(賜死)된 후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셨으며, 1688년 장렬왕후 사후 자수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었다. 
     
     

    장렬왕후의 휘릉 / 인조의 두 번째 부인으로 권력 기반과 소생이 없어 이렇다 할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살다 죽었다. 무덤 역시 단릉(單陵)으로 쓸쓸하지만 정자각은 양 옆에 익랑이 붙어 있어 화려하다.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다.
    jtbc '꽃들의 전쟁' 속의 장렬왕후 / 탤런트 고원희가 열연했다.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 앞 자수궁(=자수원) 터 안내문 / 태조 이성계의 아들 무안군(撫安君)의 집으로 이후 후궁들이 궁궐을 나와 머무는 곳으로 이용됐다.
    성종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 중종의 부인이었다가 폐비가 된 단경왕후 신씨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굴저가 살아생전 천주교도였다는 썰이 있다. 앞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소현세자는 천주교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귀국할 때 함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강빈은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현세자는 귀국할 때 심양에서 일가를 보필해온 중국인 환관 이방조,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두문방의 5명과 굴저, 유저를 비롯한 4명의 궁녀와 함께 들어왔다.
     
    이들 모두는 평소 자기 손가락으로 이마와 가슴을 찌르는 해괴한 짓을 하고 십자가에 매단 벌거숭이 남자 상(像)을 경배했다고 하는 바,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고 예수의 십자가를 모셨던 천주교도로 짐작된다. 이에 주변사람들이 그것을 주술적 행위로 여겨 서양잡귀가 붙었다고 경원시했는데, 이들 중국인들은 인조에 의해 소현세자가 독살되고 세자빈 또한 사사되자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 조선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일설에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조선 선교를 위해 청나라 황실에 청원해 소현세자에 딸려보낸 사람들이라고 하나, 어찌 됐든 소현세자와 강빈이 독살, 사사되었던 까닭에 소기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굴저는 이때 다른 사람과 달리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현세자의 혈육으로 유일하게 살아 남은 3남 경안군 이석견(당시 4세)과 그의 아들 임창군 이혼을 돌보는 의리를 보이다 타국에서 고혼(孤魂)이 되었던 것이다. 
     
     

    고양시 대자산의 경원군 묘(위)와 임창군 묘(아래)
    대자산 묘 가는 길의 대자천 북진교 / 북진(北進)이라는 이름이 낯선 시대가 됐다. 최영장군 묘 표지판 쪽으로 가면 대자산 무덤군을 만나게 된다.

     
    굴저는 살아생전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았으니, 일찌기 중국 체류 경험이 있던 효종은 굴저를 우대하여 명나라 황실의 예법을 시범케하고 궁인들에게 본 받게 하였다. 특히 극렬한 화이론자였던 우암 송시열은 굴저가 시범 보인 중국식 상투 묶는 법인 결발법(結髮法)을 '자수원 결발법'이라 부르며 조선의 통일된 예법으로 정립하자고 주청하기도 했다. 그것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굴저는 조선 궁인들에게 명나라 예법과 중국식 자수와 중국어를 가르치며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특히 굴저는 새와 짐승을 부르는 신호와 같은 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재주를 가지고 새와 짐승들을 길렀는데, 이 재주가 궁녀 진춘(進春)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 굴저에 대해서는 당대의 양반들이 대부분 알고 있었던 듯, 여러 문인이 '굴씨사(屈氏辭)', '굴씨과묘시(屈氏過墓詩, 굴씨 묘를 지나며 쓴 시)’ 등을 남겼는데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문인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가 쓴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는 제법 유명하다.   
     
    명나라 숭정제의 궁녀가 비파를 탄다
    왕조가 바뀔 때 청나라 구왕*의 막사에 붙잡혔던 몸
    황망히 수황정*에서 달려 도망쳤도다
    따라 죽지 못한 운명의 장난이 차마 한스럽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소현세자를 만나 다행히 따라 나섰으니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표류하는 꽃 같아라
    장렬왕후 모신 이들 중 가장 뛰어났으며
    만수전* 속 봄 작약꽃과  같았도다
    소리 한번 튕김에 은혜와 원한이 길게 공명하니 
    모래바람이 발을 친 누각을 에워싸는 듯 들리는도다
    신령스런 솜씨가 옛 명인 선재조*를 굴복시키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같이 온 고국 사람 바라보누나
    .....
     
    *구왕은 청의  태조 누르하치의 14남으로 도르곤으로 명나라 정복에 큰 공을 세웠으며, 그에 앞서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 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사로잡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수황청은 명나라 나미작 황제 숭정제(의종)이 목을 메 자살한 곳이라 전한다.
     
    * 만수전은 효종이 장렬왕후를 위해 창덕궁에 건립한 전각으로 숙종 때까지 대비전으로 쓰였으나 1687년(숙종 13)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 선재조는 백거이의 '비파행'에 나오는 인물로, 백거이 시(詩) 속 비파 타는 여인이 비파를 배웠다는 예인들이다. 
     
    崇禎宮女搊琵琶
    鼎革身羇九王幕
    蒼黃步趨壽皇亭
    恨不以殉命之薄
    思歸公子幸相隨
    東流之水花漂泊
    莊烈閤裏第一人
    萬壽殿中春綽約
    破撥聲繁恩怨長
    風沙猶覺繞簾閣
    性靈屢伏善才
    汎瀾相對供奉駱
    .....
     
     

    백거이의 '비파행'을 테마로 한 그림 / 신위의 '비파가'도 백거이의 시에 못지 않다.

     
    그런데 1645년  소현세자 귀국할 때 같이 들아온 묵암(默菴) 이경상(李慶相)이라는 자가 있다. 앞서도 여러번 말했거니와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인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5)의  6대조 할아버지로서 소현세자 사후 고향인 포천 화현리로 들어가 칩거함으로써 목숨을 보존했다. 그는 그곳에서 쥐죽은 듯 살아 횡사를 면했는데, 유언으로서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절대 내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궤(櫃)를 열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되 "궤를 열면 반드시 멸문지화를 당하리라"는 것이었다. 그 궤가 소현세자 귀국 후 약 150년이 지난 1793년 후손 이벽에 의해 열렸다. 집안의 비보(秘寶)처럼 전해지던 그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개봉된 것이었다. 필시 아담 샬이 지은 <성교정도(聖敎正道)>와 같은 천주교 관련 책이었을 것이다. 그는 상자 안에 있던 한문본 서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신자가 되었다.
     
    이벽은 이후 친척인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에게 포교하고, 다시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김범우에게 전도함으로써 조선에 천주교 바람과 박해를 몰고오게 된다. 이렇게 보면 묵암 이경상은 굴저와 더불어 이 땅 최초의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지난 주말 포천 화현리로 향했다. 고양시 대자동의 소현세자 후손 무덤과 굴저 묘를 탐방한 후 내친김에 나섰던 길이다. 그러나 남양시 광릉내에 이르러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너무 늦어서였는데, 다음 주 화현리에 다녀온 후 이 글을 맺을까 한다.   
     
     

    광릉내에서 본 하늘과
    산 (천마산)
    천 (엄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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