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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화가 도상봉미학(美學) 2024. 11. 15. 21:40
도천(陶泉) 도상봉(1902~1977)은 1902년 함경남도 홍원군 신익면 남당리(현 홍원군 남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홍원군은 우리에게는 낯선 지명이지만 산과 평야와 바다가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런 환경이 도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그는 1916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으로부터 따로 그림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도천은 학생시절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일어난 독립선언 행사에 참가했고 이어 계속 만세시위에 참가하다 3월 5일에는 남대문 역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 일본에 건너간 그는 메이지대학 법과에 진학했는데, 부모님의 바람도 있었지만 피식민지인의 처지에 비분강개해 힘을 기르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의 열망이 좀 더 강했던 듯 2년 반 후 메이지대를 중퇴하고 1923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후 4년 뒤인 1927년 졸업하며 전문학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졸업 후에도 연수과에 남아 연구를 지속하다 1928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도쿄미술학교 출신들이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지 않는 등 기존 화단과 거리감을 두는 행보를 이어갔던 바, 아마도 일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의 거부감에서 비롯된 일인 듯하다.
대신 그는 경신고등보통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후학을 지도했다. 그가 경신, 배화 등의 학교를 택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이른바 미션스쿨이라 총독부 통제가 상대적으로 덜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대 저항적 사고를 견지한 사실은 당시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그에게 그림을 배웠던 나의 어머니의 기억이기도 한데, 아울러 무척 미남이었다는 기억도 함께 끄집어냈다. 그렇다고 그가 교사직에만 매진한 것은 아니니 아틀리에 겸 유화교실인 '숭삼화실'을 열어 개인 작업과 유화 화법의 가르침을 병행했다.
도천은 탄탄한 데생과 엄격한 구상을 기반으로 한 사실주의 화법을 고수한 아카데믹한 화가로 유명하다. 아울러 수화(樹話) 김환기와 더불어 백자(白瓷)를 사랑한 화가로도 유명한데, 백자에 담긴 꽃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도천(陶泉)이라는 그의 호도 바로 백자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니, 백자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에너지를 화폭에 담은 듯 백자와 꽃을 그린 일련의 정물화는 모두 강렬하다.
더불어 도천은 가을 고궁을 배경으로 한 사실주의적 풍경화로도 유명한데, 내가 그를 떠올린 것도 성균관대학 내의 서울문묘 노란 은행나무를 보러 갔을 때이다. 부드러운 터치로 그려진 그의 풍경화는 주로 가을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쓸쓸하기보다는 따뜻하다. 아래의 성균관 은행나무는 아마도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하는데, 그가 성균관과 고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은 바로 그의 집이 성균관과 지척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이번에 알았다.
도천은 1948년 숙명여자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지내며 대한미술협회 창립에 관여했고, 제1회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과 국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로는 화단 일에서 손을 떼고 오직 작품에만 몰두하다 1977년 명륜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대한민국 문화 훈장도 여러 개 받았지만 정부는 그가 3.1 운동에 가담한 일을 근거로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같은 연고로써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성균관 실사
▼ 도상봉의 집 '도천 라일락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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