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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의 속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불이선란도
    미학(美學) 2024. 8. 17. 21:07

     
    과천 추사박물관에서는 지금 '추사 김정희의 난(蘭)'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2024. 6.12~8.31) 다른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폐회에 임박해 다녀왔는데, 소감을 말하자면 "놓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김정희의 대표적 난(蘭) 그림인 <불이선란도>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추사 김정희의 난(蘭)' 전시회 포스터 / 불이선란도 속의 난을 넣었다.


    우리는 흔히 김정희를 뛰어난 서예가로만 알고 있지만 실은 시·서·화에 모두 달통하였니 그가 남긴 한시는 377수나 된다. 아울러 역사학자이자 고증학자이기도 했는데, 금석학에 있어서는 조선 최고 경지에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본업은 정치가로서, 정치가답게 다난하고 파란만장한 길을 걸었다.
     
     

    <해동비고> / 진감선사비, 지증대사비, 무장사비 등 7편의 조선 금석문에 대한 추사의 연구서 필사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김정희가 제주도로 정배 된 이유는 이른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윤상도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 등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탄핵했다가 역공을 받아 국문 중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前)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인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뒤늦게 잡혀갔는데,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 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 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김정희도 6차례의 고문을 당했다) 따라서 요즘 기준으로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야 정상이었겠으나 그때는 통하지 않았으니, 다만 사형만이 면제되어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제주 대정읍 김정희 유배지에 지어진 추사관 / 건축가 승효상이 세한도에 나오는 집에 착상해 지었다.
    제주 추사관의 세한도(歲寒圖)
    추사는 9년간(1840~1848년)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이때 제자 이상적이 북경을 오가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세한도를 그려준다. 김정희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歲寒) 뒤 가장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해 표현하였다. 세한도는 2018년 손창근 선생이 기증했고 국보로 지정되었다.
    추사가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
    추사 유배지 부근의 대정현 성벽
    추사 유배지에 복원된 강도순의 집 / 추사는 마을 부자 강도순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 집은 추사의 편지에 나오는 송계순의 집을 바탕으로 재현했다.
    추사가 생활하던 모거리(별채)
    제주 추사관의 '유제'(留齊) 현판 탁본 / 유제는 제자 남병길의 아호이다. 추사는 제주도에 와 5년간 가르침을 받은 남병길에게 당호 현판을 써주며 "기교를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글을 덧붙였다.
    완당선생해천일렵상 /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기 모습이다. 아모레퍼시픽박물관 소장 작

     
    추사는 9년간의 제주 유배 후 풀려나 다시 한성으로 복귀를 했지만, 헌종의 묘천(廟遷)에 관한 문제에 친구이자 영의정인 권돈인을 편들다 안동김문에 밉보여 권돈인과 더불어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유배는 그리 길지 않아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 풀려나게 되나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무르다 1856년 생을 마감한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참외밭의 초가집'이라 뜻으로, 추사의 생부 김노경이 한성판윤(현재의 서울시장)을 지내던 1824년 과천에 마련한 별서(別墅)였다. 1837년(현종 3) 김노경이 별세하자 추사는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에 모셨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말년에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던 그는 서울 봉은사와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소일하며 지냈다.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 불경 경판을 모아놓은 전각) 현판은 그가 죽기 3일 전에 쓴 작품이다.
     
     

    서울 봉은사 판전 / 판전 현판에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쓴 작품'이란 첨구가 붙어 있다.

     
    2007년 과천시는 김정희가 살던 과지초당을 복원하고 그 곁에 추사박물관을 세웠다. 과지초당은 두 동으로 복원했는데, 정약용의 유배지에 세워진 다산초당처럼 멋들어진 기와집을 지었다. 그들은 분명 초당을 지었건만 후세 공무원들은 큰 기와집을 지음으로써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위인들의 초라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으로써 이해되지만 역사 왜곡임은 분명하다. 
     
     

    과지초당

     
    다만 바로 옆의 추사박물관은 잘 지어졌으며, 2층 외부 벽에 재현된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는 꽤 인상적이다. '세한도'와 더불어 추사의 대표적 그림인 '불이선란도'는 당연히 이번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난초 그림으로 '부작란도'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에는 작품의 제목이 유래한 '不作蘭'(부작란), '不二禪'(불이선) 등의 발제 글씨와 함께 15개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이중 추사(秋史), 고연재(古硯齋), 김정희인(金正喜印), 묵장(墨莊), 낙문유사(樂文儒士) 등은 추사의 낙관이며, 나머지는 소장자의 소장인 및 감식가들의 감상인(鑑賞印)이다. (그들 또한 모두 유명인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불이선란도' 속의 낙관을 포함한 추사의 도장과 작품 속의 낙관이 거의 전시된 듯하다. 
     
     

    과천 추사박물관 외관 / 깃발 뒤로 불이선란도 벽화가 보인다.
    2층 휴게실에서 바라본 불이선란도 벽화
    불이선란도 / 추사가 말년에 종이에 먹으로 그린 수묵화로 크기는 54.9x30.6㎝이다. 2018년 손창근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보물로 지정예고되었다.
    추사의 도장

     
    추사는 이 그림에서 난 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마음을 화제에 담았는데 내용이 사뭇 재미있다. 한문의 필순과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 것도 특이하다. 그림 속의 난은 거칠고 간결하게 표현돼 있으며 농담(濃淡)의 표현도 별로 없고 그저  화심(花心)만 짙게 강조했다. 왼쪽 여백은 글씨를 쓰기 위해 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작정했던 것인데, 아래의 일화가 발제가 되어버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인데, 우연히 본연의 참모습을 그려냈구나.
    문을 닫아걸고 깊이 찿고 또 찾은 것, 이것이 유마거사의 불이선일세.
     
    不作蘭畵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유마불이선(維摩不二禪)이란 불경인 <유마경/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 등장하는 이야기로서, 부처의 제자들인 여러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장황히 설명하였으나, 유마거사만이 침묵했다고 한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말과 글이 없는 진정한 경지를 이루었다. 이것이 실로 법문에 드는 것"이라며 감탄했다는 내용이다. '불이선'의 '불이'는 삶과 죽음, 선과 악, 옳고 그름 등 대립적 · 상대적으로 여기는 것들의 본질은 실상인즉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로써 통한다. 
     
    아울러 추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강조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 강요한다면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거사의 침묵으로 사절하련다.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만향'은 추사의 별호다)
     
    이어 못다한 말이 생각났는지 그 아래, 잎이 꺾이면서 만들어진 여백에 다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쓰는 초서와 예서의 이상한 필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겠으며, 또 어찌 좋아할 수 있으리오. (전에도 그랬듯) 아마도 이해 못 할 것이다.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又題. ('구경'이 또 발제를 썼도다) 
     
    이렇듯 추사가 지극히 만족해 한 이 그림은 실은 그의 시종인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었다. 평소 노구의 자신을 보살펴주고 심부름을 해주고 먹을 갈아주던 시종이 고마워서 난을 그려 선물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수작(秀作)이 탄생했던 것이다. 추사가 이 작품에 얼마나 만족했는지,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나오지 두 번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나오지 두 번은 불가하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선객노인' 역시 추사의 별호다)
     
    그런데 얼마 뒤 반전이 있었다. 추사의 제자 오규일(吳圭一)이 ('소산'의 그의 호) 이를 보고 얼른 낚아채가버린 것이다. 추사는 이것이 재미있다며, 이 일을 작은 글씨로 덧붙여 적었다.
     
    오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아가니 우습도다.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오규일은 심미안이 뛰어난 자로서, 전각 실력도 뛰어나 추사 도장의 대부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추사가 북청으로 정배되었을 때 추사의 부하로 간주돼 마찬가지로 귀양살이를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 바, 그림을 빼앗기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불이선란도>는 이만큼 뛰어나기도 하거니와, 또 이만큼 흥미롭기도 하다. 아마도 3차례 이상에 걸쳐 발제를 썼을 것이다. 그 밖에도 김정희의 난 그림은 <김정희 필 난맹첩> 속 그림과 <소봉래 난>이 유명한데 아쉽게도 이번 전시회에서는 볼 수 없었다.
     
    <김정희 필 난맹첩>은 추사의 묵란화(墨蘭畵) 16점과 글씨 7점을 수록한 서화첩으로, 김정희의 전담 장황사(粧䌙師, '장황'은 우리말이며 일본어로는 '표구'다) 유명훈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소봉래 난>의 소봉래(小蓬萊)는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자신의 고향인 예산 오석산의 난을 그린 듯하다. 아래의 작품들은 인터넷에서 찾은 그림들 중에서 발췌해 실은 것이다.   
     
     

    난맹첩 속의 여러 묵란
    소봉래산

     
    글씨로는 이번 전시회에 사진과 함께 전시된 조기복의 예서 묘표와, 그가 71세 때 쓴 '촌로상락'(村老上樂, 시골 늙은이의 가장 큰 즐거움)의 제목이 붙은 예서 대련이 인상적이었다. 조기복은 추사의 조카이자 제자인 조면호의 큰 아버지로, 추사 집안과 임천 조씨 집안과는 선대로부터 대대로 교분을 맺어온 사이인지라 특별히 묘표 글씨를 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기복의 묘는 경기는 파주군 광탄면에 있다고 한다. 
     
    대련은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이라는 글씨를 추사체의 예서로 썼다.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시골 늙은이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가히 허리춤에 말(斗)만한 큰 황금 인장을 차고, 몇 장(丈) 길이의 밥상에다 시중드는 첩이 몇 백이라도 능히 이 맛을 누리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고농(古農)이 쓰다'라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다.
     
    '촌로상락은' 추사가 1856년(철종 7년)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쯤 쓴 만년작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여기서 고농, 즉 '오래된 농부'는 호(號)가 아닌 늙은 김정희 스스로를 지칭함일 게다. 
     
     

    조기복의 묘표 탁본 / 묘표는 116.6x48.9x19.5cm
    예서 대련 / 각 129.5x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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