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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락산 내원암 괘불도와 은류·금류폭포
    미학(美學) 2024. 5. 14. 23:02
     

    경기도 남양주시 내원암에 소장되어 있는 19세기 괘불도는 흥미롭다. 여기서 괘(掛)는 '건다'는 뜻이고 불도(佛圖)는 부처님 그림이란 뜻이니 전체적으로는 '부처님 걸게그림'이란  소리다. 그런데 그 그림을 평소에는 걸지 않고 법회나 석탄일 같은 행사 때나 거므로 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내원암 대웅보전 삼존불 후불탱과 영산전 후불탱이 이 괘불도를 모본으로 하고 있어 유추해 살펴볼 수 있다. (이 후불탱들은 근자에 제작된 것이다)      
     
    다른 괘불도와 마찬가지로 내원암 괘불도도 세로 548㎝, 가로 353.5㎝로서 규모가 크며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한 형태인데, 화기(畵記)에 1885년 11월 6일에 시작하여 15일 제작을 마치고 점안(點眼)한 사실이 기록돼 있어 명확한 제작연도를 알 수 있다. 불화 조성에는 만파 정탁(萬波 定濯), 동호 진철(東昊 震徹), 학허 석운(鶴虛 石雲), 석암 두열(石庵 斗烈), 비구 봉안(奉安), 인형(仁亨), 현조(玄照), 종현(宗現), 묘흡(竗洽), 혜조(慧照), 운제(運齊) 등 다수의 화승(畵僧)이 참여하였다.
     
    이중 수화승 만파 정탁은 19세기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1877년 파주 보광사 십육나한도, 1878년 강화 정수사 아미타불회도 조성에도 참여한 바 있다. 동호 진철 역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화승으로서, 1883년 남양주 흥국사 신중도, 1886년 서울 봉은사 북극락전 칠성도 등에 보조화승으로, 1892년 경북 의성 고운사 칠성도에 주화승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밖에도 해인사, 통도사, 은해사, 동화사 등의 불화 제작에 관여하였다.   
     
    내원암 괘불의 구도는 대담, 간결한데, 석가삼존도의 마름모꼴 구성을 기본으로써 본존을 석가모니불이 아닌 여래형 노사나불(盧舍那佛)로 그렸다는 점과 하단에 관음보살을 도해한 도상이 채용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가모니불 옆에 아난과 가섭, 두 불제자가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을 그린 점도 특이하다. 인터넷 상에는 내원암 괘불이 아닌 다른 사진이 다수 올라와 있어 교정하는 의미로써 포스팅했다. 
     
     

    대웅보전 삼존불과 후불탱
    영산전 삼존불과 후불탱
    내원암 괘불도 / 200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수락산 내원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봉선사 사적기에 전한다. 가장 오래된 사적(寺跡)은 1794년(정조 18) 칠성각을 세웠다는 내용인데, 전설로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생육신 김시습이 수락산 내원암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시습하면 경주 금오산과 부여 무량사가 떠오르지만 수락산에서 지은 아래 시 '수락잔조'( 水落殘照/  수락산의 낙조)가 전하는 것을 보면 김시습과 수락산 내원암과의 관계에는 전설 이상의 것이 존재함이 분명해 보인다. 학자들은 김시습의 내원암 칩거 시기를 1470~1480년 간의 약 10년으로 보고 있다.  

    한 점 두 점 떨어지는 노을 밖으로
    서너 마리 외로운 고니 돌아오네.
    봉우리 높아 산허리 그림자를 충분히 볼 수 있으니   
    수락이 파란 이끼 낀 바위를 아낌없이 드러내는데,
    가을 기러기는 너무 낮게 뜬 까닭에 넘지 못하고
    겨울 까마귀가 깃들려다 너무 추워 놀라 돌아간다.
    저 드넓은 하늘은 과연 끝이 있느뇨?
    붉은 빛 저녁 노을 그림자가 마지막 광휘에 흔들린다. 
     
    一點二點落霞外(일점이점낙하외) 
    三个四个孤騖歸(삼개사개고무기)  
    峰高剩見半山影(봉고잉견반산영)  
    水落欲露靑苔磯(수락욕노청태기)  
    去雁低回不能度(거안저회불능도)  
    寒鴉欲樓還警飛(한아욕루환경비)  
    天涯極目意何限(천애극목의하한)  
    斂紅倒景搖晴暉(염홍도경요청휘) 


     

    내원암 석탑과 수락산 미륵봉 / 내원(內院)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입적 후 56억 7000만년 뒤 이땅에 내려와 중상을 구원할 미륵불이 있는 곳이다. 미륵봉과 내원암은 이와 같은 관계로 붙여진 이름 같다.
    이 깊은 산사에 어떤 일이 있었나? 신라 삼층석탑이 지금은 지붕돌만 남았다.
    내원암 석조와 병풍바위
    내원암 대웅보전
    조선초 건립했다고 추측되는 경내의 석불
    삼성보전 오르는 길
    싱크로율 99%의 삼성보전 앞 다보탑
    김시습이 머물렀을 것 같은 분위기의 삼성보전
    내원암 안내문

     
    내원암 입구에서 만난 과객(過客) 왈(曰), "수락산의 주봉은 미륵봉으로 63빌딩의 8층과 같다"고 했다. 무슨 선문답이 아니라 높이가 638미터라는 말이다. 그리고 "내원암은 아래서부터 중간이요 위로부터 중간"이라고 했는데, 그 분의 말대로라면 해발 319미터 지점에 내원암이 있는 셈이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산 아래의 옥류폭포와 산 위의 금류폭포를 거쳐야 하니 본의 아닌 안복(眼福)을 누리게 된다. 
     
     

    수락산 계곡이 시작됨
    첫 절경인 옥류폭포
    깊어지는 계곡
    돌다리를 건너
    금류폭포 가는 길
    금류폭포 가는 길에 숨어 있는 폭포들
    가는 길에 서 있는 비구니성민사공덕비(比丘尼性敏師功德碑) / 한국전쟁 이후 폐사된 내원암을 중창한 스님이라고 한다.
    숲속으로 금류폭포가 보인다.
    금류폭포

     
    그런데 금류폭포 가는 길에 문제가 좀 있다. 아래의 은류폭포 표지판이 금류폭포 가는 길에 세워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위의 금류폭포를 은류폭포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옥류폭포·금류폭포와 더불어 수락산의 또 다른 절경인 은류폭포는 훨씬 아랫지점에서 진입구가 갈라진다.
     
    하지만 그곳 분기점에는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금류폭포 가까이 등산로안내도와 은류폭포 표지판이 서 있는 까닭에 금류폭포를 은류폭포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본인 또한 잘 몰라 금류폭포 앞에서 등산객에게 폭포 이름을 물어보았으나 역시 대답이 각각 달랐다. 
     
     

    은류폭포 표지판
    왼쪽 주황색 막대표시가 은류폭포, 노란색 표시가 내원암, 빨간색 표시가 금류폭포다.

     
    위에서 말한 과객의 도움으로 은류폭포를 찾았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첫 돌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좌측 계곡으로 접어드는 것이 첩경이다.(아래 사진) 그러면 은류폭포에 이르기까지 여러 승경이 펼쳐지는데, 1825년(순조 25) 내탕금으로 지었다는 지족루(知足樓)가 혹시 은류폭포 분기점에 건립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마치 선암사 강선루처럼.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는 이 절에서 치성을 올린 후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출산하였는데, 이후 1794년 칠성각이 건립됐고 내탕금으로 사정전(四聖殿)이 건립됐다. 이상의 건물들은 지금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절은 수수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데, 길가에서 우연찮게 과거 은성했던 시절의 흔적을 발견했다. 아래 기와 조각은  은류폭포 분기점 돌다리 부근에서 발견한 것으로 내가 지족루의 위치를 그곳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 / 은류폭포를 보시려거든 이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 계곡으로 진입하시길. 왼쪽 남양주 경찰서의 경고판을 표지 삼아도 되겠지만 언제 없어질 지 모르는 일이라....
    먼저 반겨주는 계곡의 폭포수들
    멀리 은류폭포가 보인다.
    은류폭포
    발견한 조선시대 기와
    지족루로 추정되는 입구의 또 다른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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