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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의 큰도둑과 작은도둑 / 연희동 오장경 사당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7. 01:31
1882년 구식 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막을 힘이 없었다. 이에 고종의 별다른 고민 없이 다급히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청국은 이에 응하여 그해 7월 광동수사제독 오장경이 인솔하는 4,50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소공동의 남별궁(지금의 조선호텔 자리)·동묘·용산 등지에 주둔하고 곧 폭동을 진압했다. (이때 오장경이 청군의 보급책으로 데려온 65명의 중국 민간인이 우리나라 화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오장경은 1884년 5월,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에게 일부 병력을 맡긴 뒤 귀국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만주 금주(金州) 사령으로 부임하였으나 심한 여독 때문이었는지 금주 도착 후 곧 사망했다. 오장경의 사망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조선에서는 사대주의자들이 사당 건립을 주청했고 고종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1885년 봄, 훈련원이 있던 동대문 부근에 '정무사'(靖武祠)라는 사당이 세워졌다.*
* 이후 '정무사'는 1909년 청국 총영사 마정량이 오장경의 시호 무장공(武壯公)을 따 '오무장공사'(吳祠)라고 변경했으며, 화교들에 의해 제사가 모셔졌다. 해방 후 '오무장공사'는 '국치의 유적'이라 하여 철거될 뻔했으나 1979년 주중대사관(주한대만대사관)에 의해 연희동 한성화교학교 뒤편으로 옮겨진 후 지금껏 중국인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오무장공사'는 제사 때 외는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보기도 힘들다.
앞서도 여러번 말했지만, 이로써 구식 군인들의 쿠데타는 3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고종은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자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일에, 그것도 국가 간의 일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신이 동급으로 취급됐고,(500년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청국 상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통상 특권이 주어졌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조규를 통해서였다.
발음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들다면 양국이 합의한 '식민지 예속 증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은 1882년(고종 19) 음력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 조영하와 청나라 직례총독 이홍장 사이에 체결된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으로, 그 첫머리에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봉(藩封, 제후국)이었다(朝鮮久列藩封)"고 명시돼 있다. 이어 개항장을 비롯한 조선 각 지역에서의 상행위에 대한 청국인의 특수 권익을 보장한다고 규정하였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중국상인은 조선 땅에서 아무런 간섭 없이 멋대로 장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라고 축소될 수 있다. 이에 곧 청나라 상인들이 마구마구 밀려들였던 바, 1883년 말 서울과 각 개항장에서 청나라 상인은 210명 정도가 개업을 했고, 이듬해에는 서울 353명, 인천 235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는 집계도 되지 않을 만큼의 많은 중국인들이 밀려들었으니 청국 조계지 부근의 인천항, 서울의 마포 나루와 남대문 칠패 등 물산의 주요 집산지는 화교들에게 상권을 장악당했다.
이들 청국상인의 기세는 1884년 12월 원세개가 갑신정변을 진압하면서 더욱 등등해졌다. 이후 조선은 중국의 실질적인 '근대 식민지'가 되었으니,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해 중국으로 도망갈 때까지 원세개는 감국대신(監國代臣)이라는 이름으로 고종 위에 군림하며 조선을 사실상 통치했다. (감국대신은 '조선을 감시·감독하는 대신'이라는 뜻으로 사실상의 총독이었다)
그 23살의 어린 놈은 가마를 타고 궁궐을 출입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조선 대신들의 뺨을 후려쳤으며, 조선의 처녀들을 마음대로 겁탈하였던 바, 조선에 있는 동안 공식적으로 집계된 자식들만도 15명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원세개의 비위를 맞추려 대갓집 규수를 첩으로 상납했는데, 이때 원세개는 그녀의 몸종까지 첩으로 삼으며 조정을 농락했다. 그런데 그들이 중국으로 가서는 나이 많은 몸종이 오히려 언니가 되어 행세를 한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학자들은 이때 청국이 조선을 사실상의 '근대 식민지'로 삼았다고 말한다. 중국은 당시 조공국이었던 유구국(오키나와)과 안남(베트남)이 각각 일본과 프랑스에 점령되었던 바, 마지막 조공국이자 명목상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며 서구 열강의 흉내를 내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주둔 청국 군인들은 균율도 질서도 없었으니, 그저 마구 때리고 빼앗기 일쑤였다. 현재 명동의 중국 대사관은 원세개의 부하들이 조선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를 집단 구타한 후 낙동(명동) 집을 빼앗아 주둔지로 삼은 곳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야 오죽했으랴. (이경하는 '조선의 마지막 포도대장'으로도 유명한 인물로, 많은 천주교인을 형장으로 보내 '낙동 염라대왕'으로도 불렸으나 청국군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실 청국의 조선 점령은 망해가는 대국의 애처로운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로 인한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청국 군사들에게 능욕당한 여자들이 부지기수인 가운데 자살자도 속출했고, 이로 인해 동묘(東廟) 일대의 굿당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원청굿이 행해지는 날이 허다했다.
청국 군인들에게 당하기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일례로 1884년 1월 청병(淸兵)들은 광통교에 있는 한약방에서 홍삼을 다량구입한 후 대금을 오랫동안 갚지 않았다. 이에 외상값을 독촉당하자 청병들은 주인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아들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한성순보>에 의해 '화병(華兵) 범죄'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일본 상인들 또한 당하기는 매한가지여서, 1893년 조선에 건너와 전국을 돌며 견문하고 정탐했던 간첩 혼마 규스케(本間九介)의 기록은 이러했다.
팔도 가는 곳마다 있는 시장에서, 지나인(중국인)을 보지 않는 지역이 없다. 삼삼오오 열을 지어서 시내를 누비는 자가 기백명일 것이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하나 같이 바늘, 못, 당지(중국 종이), 당실(중국 실), 부싯돌, 성냥, 담뱃대 등이고, 적은 자본을 가진 자는 금건(金巾, 옥양목) 등을 파는 자도 있다....
지금 경성에서 일본인과 지나인의 세력 강약을 싸움을 예로 들어 말하면, 우리 일본인은 늘 패할 것이다. 이는 지나인이 쪽수가 많은 데다 일본인을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성에서 우리나라는 도저히 지나인에게 이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남대문 근처에 노점을 펴고 잡화를 팔려고 하면, 근방에 있는 지나 잡화상들은 바로 장사 원수로 생각하고 사소한 일에도 싸움을 걸고 우르르 몰려와 방해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후 힘없는 나라 조선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맞붙었고, 청나라의 식민통치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종식된다. 일본은 1894~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을 통해 그간 10년 동안 조선 땅에서 청국에 밀렸던 설움을 일시에 씻어냈을 뿐 아니라 청나라 세력을 아예 한반도 밖으로 일소했다.
덕분에 조선은 5000년 간의 대륙 간섭에서 벗어났고 아울러 청국의 횡포에서도 벗어난 독립국이 되었으니, 전후 청국이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명문화되었다. 그 조약문의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고 향후 조선을 들어먹기 위한 일본의 포석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찌 됐든 조선은 10년간의 중국 식민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1882년부터 1895년까지 13년 간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하여 청국인은 조선에서 철수하고 일본인의 세상이 도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적어도 한일합방까지는 중국처럼 무식하지는 않았으니, 이를 말하여주는 것이 마포나루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도강료(渡江料)를 받던 우에다(上田)이라는 일본인의 이야기다.
조선말 한강 마포나루는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1902년부터 나루에 관원을 파견하여 도진세(渡津稅)를 받았다. 왕실의 낭비로써 바닥이 난 내탕금을 채우기 위해 '강 건너는 세'라는 또 다른 부가세를 만들어 과세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먹고살기 위한 상행위를 멈출 수는 없었을 터, 울며 겨자 먹기로 도진세를 물어야 했는데, 이것이 한일한방이 이루어질 무렵 도강료(渡江料)로 바뀌었다.
1910년 번화한 마포나루를 본 일본인 우에다는 짱구를 굴려 마포나루에서 건너편 잉화도(仍火島, 여의도)까지 주교(舟橋, 배다리)를 설치했다. 그리고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 요금을 받았으니 잉화도에서는 마누라가, 마포나루 쪽에서는 우에다가 거적을 깔고 앉아 도강료를 받았다. 그것이 현금으로는 8전, 현물로는 쌀 반되였다고 하는 바, 매우 비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행위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들에 의해 생업을 잃은 나룻사람들과 폭리에 분노한 백성들에게 의해 쫓겨나고 주교는 불태워졌다고 하는데, 이후 총독부에서 폭동을 일으킨 자들을 징벌했다거나 주교가 다시 만들어졌다거나 하는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혹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거니와, 이것이 친일하자거나 친미하자거나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친중하지 말자는 취지임은 맞다.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리고 친중 쪽으로 기울여는 인사들이 있는데,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앞서 말한 베트남이 제국주의 프랑스와 싸움을 벌일 때 호찌민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주위 사람들의 제안을 다음과 같이 일축시켰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 프랑스는 우리가 5년이면 몰아낼 수 있지만 중국이 들어오면 50년이 지나도 몰아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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