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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포에 있던 나생보(Rosenbaum) 씨의 유리공장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0. 20:47

     

    1882년 겨울, 아직 임오군란이 남긴 불안과 어수선함이 가시지 않은 한성 땅에 말을 탄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가 조선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는 조선 땅에 합법적으로 입국한 첫 서양인으로서,(임진왜란 때 침입자로서 온 세스페데스 신부, 표류해 온 벨테브레이와 하멜, 몰래 들어온 선교사 등을 제외한다는 뜻) 한성은 서양인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로 난리가 났다.

     

    하지만 묄렌도르프는 불쾌히 여기거나 거만을 떨거나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조선이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오히려 그 사람들과 말을 나누고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애써 호기심을 자제하며 최대한 의젓하게 행동했다. 그는 1882년 12월 26일 고종황제를 알현한 후, 종 2품 품계의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됐다. 지금으로 말하면 외교부와 통상산업자원부를 합친 부처의 차관 격이었다.

     


    푸른 눈의 대감마님 파울 묄렌도르프(P.G. von Mὃllendorff, 1848~1901)


    그가 조선 땅에 오게 된 계기는 그해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었다.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알선한 청나라 이홍장은 이후 바깥세상에 깜깜인 조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추천했다. 당시 톈진 주재 독일영사관 통역관으로 있던 묄렌도르프는 조선에서 파견된 관리 조영하와 해관은화(Tael) 300량(당시 미국 달러로 400달러의 고액)의 월봉 계약을 맺은 후 곧바로 한성으로 출발했다.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목인덕(穆麟德, 묄렌도르프의 한자 이름)은 조선정부 외교 사무의 자문역을 맡는다. 

    2. 조선 해관(관세청) 설립 및 관리를 총괄하며, 외국 해관원을 고용할 시에는 사전에 알리고 근무기간을 명시한다.

    3. 조선 해관은 조선정부의 산하기관으로서 그 지시를 받으며, 목인덕은 해관 업무에 관한 사항을 보고할 의무를 진다.  

    4. 월봉은 해관은화 300량으로 하고, 출장비와 주거비를 따로 제공한다.

    5. 이 계약 조건을 위배할 시 3개월 전 미리 통지하고 해고할 수 있다.

     

     

    묄렌도르프의 고용계약서

     

    그런데 이홍장이 괜히 조선을 위해 애써줄 이유가 없었을 터, 이홍장과 묄렌도르프 사이에는 이미 스파이 계약이 체결된 상태였다. 아울러 묄렌도르프의 모국인 독일도 은밀히 그에게 손을 뻗쳐 조선의 사정을 보고하게 만들었던 바, 말하자면 그는 청국과 독일의 이중스파이로서 조선 땅에 상륙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계약은 차지하고 우선은 조선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묄렌도르프의 사인이 있는 해관문서

     

    당시 그의 활약을 추려보면, 우선 구주(歐洲) 5국이라 불리던 영국 · 독일 · 이탈리아 · 러시아 ·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과 조인 과정에서의 협상 실무를 담당했고, 일본과의 지지부진했던 관세 협정을 체결했으며 더불어 조선해관을 창설하였다. 1883년 4월, 편의대로 자신이 살던 박동(현 종로구 수송동) 집에 조선해관본부를 설립한 묄렌도르프는 스스로 총세무사(Inspector General of Customs)가 되었다. (이후 해관본부는 곧 정동 공사관 거리로 옮겨졌다)

     

     

    묄렌도르프의 수송동 집 / 임오군란 때 살해당한 민겸호 집으로 묄렌도르프는 내부를 서양식으로 수리해 사용했다.
    수송공원 내 묄렌도르프 집터 / 이후 숙명여학교가 들어섰다.
    묄렌도르프의 수송동 집이 있던 곳(오른쪽 위)과 정동 해관본부
    묄렌도르프의 집무실이 있었던 정동 해관본부 신관 자리 / 이후 미국기업 싱어 미싱회사 사옥이 들어섰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묄렌도르프는 이때 마포에도 해관을 설치했다. 강화도 해협을 타고 한강으로 들어와 마포 등지에서 상행위를 하는 중국과 일본 상인에게도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경강세관이라 불려진 묄렌도르프의 해관이 있던 곳은 조선초 안평대군이 지은 옛 정자 담담정(淡淡亭)이었다. 현재 그곳에는 벽산빌라가 들어서 있는데, 근방에서 오래 사신 토박이 분들은 지금도 그곳을 해관 터라고 부른다.

     

     

    조선후기 화가 김석신이 그린 '담담정'
    옛 담당정이 있던 벽산빌라
    담당정 자리인 벽산빌라에 해관이 있었다.
    벽산빌라 입구의 담담정 터 표석

     

    묄렌도르프의 노력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전환국 총판으로서 화폐의 발행 및 유통에 관여했다. 말하자면 관세청장 · 한국은행장 · 조폐청장을 겸한 셈이었다. 아울러 한강의 많은 모래에 착안한 유리공장 건립을 추진하였으니, 중국 상하이에서 화순양행(和順洋行)이라는 담배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독일계 미국인 친구 요셉 로젠바움(Jeseph Rosenbaum, 한자명 나생보·羅生寶)을 불러들였다.

     

    그는 향후 조선에 창호지를 대신할 유리의 수요가 급증할 것을 예상했다. 그리하여 주원료인 모래가 한강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유럽에서 설비를 들여와 공장을 지으면 틀림없이 대박이 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상하이에 있는 로젠바움을 불러들이고, 중국  톈진 주재 외교관(駐箚天津從事官)이던 박제순을 방판(幇判)으로 임명해 유리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1883년 9월 3일, 드디어 마포 용진(龍津)에 유리 제조를 관장할 '파리국(玻璃局)'이 들어섰다.(파리=유리) 그러자 로젠바움은 묄렌도르프의 전폭 지원 속에 마포 일원에 국유지 50묘(畝, 약 1,500평)를 공장부지로 불하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리공장의 성공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로젠바움은 자신의 화순양행이 있는 상하이 광동거리에 '조선유리공장 광동 사무소'를 열어 새로운 사업의 개시를 알렸다.

     

     

    로젠바움 명함 속의 사인 / 직함은 매니저였다.

     

    고종 이하 조정의 고위관료들도 조선에서 처음 시도되는 서양식 공장 설립에 한껏 들떴고, 이 비전 있는 사업 추진에 고무된 조선해관 소속 외국인 해관원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투자금이 답지했다. 하지만 이들의 부푼 꿈은 곧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유리 원료의 70~80%가 모래로부터 채취되는 규사(硅砂)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강 모래는 규사로써 부적합하다는 것이 내한한 독일인 전문가의 판단이었다.

     

    꿈에 부풀어 입국해 사업을 추진했던 로젠바움으로서는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게다가 이미 많은 돈이 낭비된 상태였던 바, 멘붕에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에 로젠바움은 묄렌도르프와 다시금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짜내었고, 이번에는 인천에 성냥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유럽에 직접 가서 오스트리아산 설비를 들여와 공장을 설립한 후 20여 명의 조선인 직공을 채용했다.

     

     

    미국공사 포크에게보낸 로젠바움의 친필 편지

     

    그의 새로운 사업은 이번에는 성공을 보는 듯하였으니, 당시 미국공사 포크에게 "현재 20명인 조선인을  곧 120~150명 선까지 고용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의 일당을 상향시킬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사업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던 바, 즈음하여 밀어닥친 일본산 성냥의 저가 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파산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무렵 묄렌도르프 역시 운이 다하였으니, 청나라 이홍장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조선을 위해 일하던 그는 결국 청국으로 소환되었다. 그가 1884년 조선 정부를 위해 추진한 조·러(러시아) 1차 밀약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묄렌도르프는 저장성 닝보(寧波)시 통계국 국장 등으로 일하다 1901년 4월 20일 위경련으로 사망했다.  

     

     

    파리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포대교 북단
    현재는 불교방송국 앞에 3.1독립운동기념터와 마포 전차종점이 표기된 표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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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