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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사찰 용광사가 있던 용리단길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5. 21:08

     
    개항기에 들어서며 한강변 둔지미 땅은 개시장(開市場, 다른 나라와의 통상을 허가했던 시장)으로 지정되었다. 원래 조선 정부는 개시장으로 삼개(마포) 땅을 제안했다. 그곳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재정고문 독일인 뭴렌도로프가 옛 안평대군의 정자 담담정(淡淡亭)에 경강 세관을 설치했던 곳이기에 미미하나마 외국 통상에 대한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을 개항시킨 일본은 도성과 좀 더 가까운 둔지미 땅을 원했다. 지금의 용산 땅으로, 용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이 일대에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면서 바꿔 부른 지명이 굳어진 것인데, 반면 둔지미라는 우리의 고유지명은 상실되었다. 둔지미는 한성부 남부 둔지방(屯芝坊) 내 지역으로서 이곳에 있던 나지막한 산의 이름인 둔지산(屯芝山)에서 비롯됐다. '미'는 '메'나 '뫼'와 마찬가지로 산을 뜻한다. 둔지산은 재 용산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해발 77m이다. 
     
     

    용산성당 입구 / 본래 대로라면 둔지미성당이 되어야 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 문서 속의 용산과 둔지미
    2023년 3월 개발 중인 둔지미 땅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일제가 둔지미 땅에 눈독을 들인 이후 용산은 급속도로 변모했다.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도 들어와 상업활동을 했으며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며 프랑스 신부들도 들어와 활동했다. 가장 큰 변화는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와 철도역을 세우면서부터였다. 당시 건설된 용산역은 경의선으로부터 이어지는 남만주 철도의 시발점이 되었으니, 지금도 가용되는 용산 일대의 제과공장들은 만주 주둔 일본군에게 지급할 주전부리를 만들던 곳이다.  
     
     

    최초의 용산역
    두 번째 용산역
    문배동의 오리온제과 공장

     
    해방 후 용산에는 일본군이 쓰던 군사기지를 물려받은 캠프 서빙고라 명명된 미군기지가 들어섰고,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 전쟁기념관 등이 건립되며 문화의 장소로 탈바꿈 중이다. 그리고 옛 일본 기업과 적산가옥이 들어섰던 한강대로 뒷길은 지금은 용리단길로 불리는 핫플(hot place)이 되어 각양각색의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용산 캠프 서빙고 사진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캠프 서빙고 내 장교숙소 .

     
    용리단길은 4호선 삼각지역에서부터 신용산역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골목길을 통틀어 지칭하는데, 지난 일요일은 주말이라 그런지 젊은 커플들이 바글대며 핫플레이스로서의 명성을 입증해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그 핫플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가 한 곳 있었다. 한강대로 40가길 24에 있는 원불교 서울교당이다. 
     
    반대로 나는 그 건물의 주변을 기웃대며 용광사의 흔적을 찾았다. 우선 지하주차장 입구 축대돌에 끼어 있는 옛 화강암 부재가 눈에 들어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이곳에는 용광사(龍光寺)라는 일본 절이 있었다. 용광사는 일본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사찰로서 1907년 한국에 상륙해 원효로24길 서울남정초등학교 부근에서 용산사(龍山寺)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원불교 서울교당·하이원빌리지 앞 거리
    옛 적산가옥을 개조한 고기집 뒤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보인다.
    용광사 이전부터 있었을 오래된 은행나무 3그루가 서 있다.
    여기에 2그루, 오른쪽으로 1그루가 있다.
    원불교 서울교당 / 뒤 하이원빌리지는 원불교 소유의 주거시설인 듯.
    마당의 표석 / 'Since 1924년'은 이해 불가이다. 당시는 일본 절 용광사가 있던 때인지라.... 원불교 창시일은 1916년 4월 28일이며, 이곳을 원불교가 인수한 것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이다.

     
    이후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지금의 원불교 서울교당 자리로 이사를 오며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동시에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 포교사찰로서 허가를 받았다. 이후 사세를 확장하며 1929년 5월 일제가 조선총독 관사를 짓기 위해 매각한 경복궁 신무문 밖의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을 각각 용광사의 본당과 부속 전각으로 삼아 이축했다. 
     
     

    일제시대 찍은 경복궁 뒤편 사진 / 왼쪽 건물이 융문당이고 오른쪽이 융무당이다.
    융문당 / 문관들이 모여 시문을 지으며 연회를 하던 곳으로 월대가 갖춰진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융무당 / 군사들의 훈련과 사열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이 앞에서 무과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용광사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

     
    융문당과 융무당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시(1865~1868) 신무문 밖 후원에 건립한 건물이었다. 그밖에도 오운각·수궁·경농재 등이 세워졌으나 지금은 오운각만 청와대 내에 존재한다. 기타 건물은 융문당·융무당과 함께 매각되었는데, 이때 융문당·융무당이 팔려 나가는 모습이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상세히 실려 있다.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의 오기)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갔다. 그리하여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 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리다. 
     
     

    1998년 청와대 내에 복원된 오운각
    기사와 함께 철거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

     
    이후 이 절에서는 1931년 사망한 일본수상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의 추도식이 거행됐고,(하마구치는 제27대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일본 우익 청년의 총기 저격에 부상을 입고 1년 가까이 치료를 받다 1931년 8월 26일 사망했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숨진 '전몰황군장병(戰歿皇軍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가 되는 등 용산에서도 왜색 짙은 곳으로서 명맥을 이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본 사찰로 쓰였다 하여 귀속재산(=적산)으로 분류됐고 이를 1946년 원불교에서 인수했다. 이때 원불교는 용광사 전체를 매입하여 원불교 서울교당으로 삼았는데,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유전되었다. 
     
     

    원불교 서울교당 시절의 사진

     
    이 두 건물은 2006년까지 이렇게 용산에 남아 있었으나 2007년 '용산 재개발사업'으로 해체된 후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의 고향인 전남 영광군으로 이전됐다. 이후 융문당은 영광군에 소재하고 있는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에 '원불교창립관'이라는 이름으로, 융무당은 원불교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의 전각으로 쓰이고 있는데, 지역 신문인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에서는 이 두 건물이 본래 위치인 청와대 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재청(현 문화유산청)에서는 2006년 6월 19일 <대한민국관보>의 공고(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를 통해 문화재보호법과 시행규칙에 의거, 이 두 건물을 '문화재 등록 예고'했다. 그러면서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소유자인 원불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었다. 
     
     

    '우리문화옥당박물관'이 된 융무당 / 남도일보 사진
    원불교창립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융문당 / 문화제로 고시되지는 못했지만 남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부근에는 또, 훗날 전범기업으로 지목된 하자마구미(間組, 일명 간조주식회사·間組株式會社)라는 유명 건설·토목회사의 본사 건물이 남아 있다. 하자마구미는 경부선, 한강인도교, 압록강철교, 대전 유성비행장, 원산 석유정제공장, 수풍 수력발전소, 수색 경성조차장 건설 등의 건설에 참여한 바 있는 유수의 회사로서 일제강점기 대표적 기업 중의 하나이다.

     

     

    하자마구미가 세운 화전 공동묘지 내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 / 수색 경성조차장 건설 때 강제 징용되어 희생당한 한국인의 합장묘 표석이다.


    하자마구미는 1889년 일본 도쿄에서 창립된 후 1903년 경부철도공사를 위해 한반도로 진출하였고, 1906년 용산출장소를 설치했다.(이후 경성지점으로 개칭) 그리고 1926년 현 장소인 한강대로42길 13에 목조 단층건물을 지었으나 1925년 을축년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후 이듬해인 1926년 현재의 철근 콘크리트조 2층 건물로 개축했다. 그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이후 하자마구미는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있던 용산기지 내의 건축과 토목을 거의 독점하는 등 호황을 누리다 일본 패망 후 본국으로 철수했다. 해방 후에는 군국이 사용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일시 북한군의 지휘소로 쓰이기도 한 역사성을 품고 있는 이 건물은 현재 식자재 기업 (주)광일의 사옥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광일 사옥
    당시에 유행하던 서양식과 일본식을 섞은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자마구미의 옆면
    모서리에 낸 정문 출입구 / 절충주의 양식의 전형적인 모양새다.
    위 건물은 1923년 지어진 인천우체국과 비견된다.
    모서리에 만든 정문 출입구
    인천우체국 옆면
    인천우체국은 1923~2019년까지 사용되었다.
    당시의 시대감이 읽히는 엽서 사진 / 왼쪽 뒤로 보이는 첨탑건물이 인천세관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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