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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 토굴집에 살았던 올바른 공직자 토정 이지함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6. 18:45

     
    '다이내믹 코리아'라고는 하지만 작금의 광란의 사태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조용해지고 싶어 TV를 끄고 겨울 강변을 찾아 나섰다. 본래는 한성의 유서 깊은 동네 효자동을 찾아 송강 정철의 집 터와 그 주변을 훑어보고 싶었으나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길을 쉽게 통과할  것 같지 않아 한강변의 토정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잘 알려진 대로 마포구 토정동은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에서 유래됐다.
     
    조선중기 문인인 이지함은 한성 삼개 부근 강변에 흙(土)으로 집(亭)을 짓고, 그로부터 아호를 토정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집이라 하면 흙과 나무로 벽체를 세우고 짚이나 기와로 지붕을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흙으로만 집을 지었다 하니 아마도 토굴을 파고 살았던 모양이다. 그의 집터는 마포구 토정동 한강삼성아파트가 위치한 곳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한강뷰의 비싼 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그저 버려진 강 언덕배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한강삼성아파트 내 토정 이지함 선생 영모비
    토정 터 표석
    토정 터 너머의 한강

     

    토굴은 우리에게 생소한 주거 형태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생면부지의 집은 아니니 50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청계천변·중랑천변에서 토막집을 볼 수 있었다. 토막집은 오로지 흙(土)과 장막(幕)으로만 이루어진 집으로, 강변의 제방을 파 굴을 만들고 입구를 가마니데기 등으로 가리면 나름대로의 주거공간이 확보된다. 물론 그것을 정식 가옥이라고 할 수는 없을 터, 그저 가난한 이들이 비바람을 피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는 추레한 공간에 불과할 뿐이다. 

     

     

    토막집의 전형
    개미굴이라고도 불리던 청계천 토막집 / 청계천변의 제방을 파 공간을 마련하고 가마니와 비닐로 입구를 막았다.

     
    그렇다면 이지함은 그렇듯 비루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처지의 사람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지함은 본디 한산(韓山)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불리던 사대부 목은(牧隱) 이색의 후손으로서 종조부(從祖父) 이파, 외조부 김맹권은 물론 아버지 이치(李穉) 역시 고위 벼슬아치였다.
     
    하지만 외할아버지 김맹권은 1455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할아버지 이파는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파직되고 아버지 이치 역시 갑자사화에 연루돼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어머니 광산김씨가 충격으로 사망하자 이지함은 큰형 이지번에게 의탁해 살아가게 되었다. 형 이지번은 당시 향시에 합격해 진사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는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이지함에게도 과거에 응할 것을 강권했다.
     
    이지함은 어려서부터 권력의 냉혹함을 체득해온지라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살았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주변에 살던 행악(行惡)한 자가 과거에 급제해 잔치를 벌이는 광경을 목격한 후 관직의 뜻을 접었다고도 한다. 다만 학문하기를 좋아해 많은 책을 섭렵했고, 제자백가의 노장(老莊)사상까지 터득하였다. 하지만 형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준비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처가의 식구들이 이른바 '청홍도 사건'이라는 역모사건에 휩쓸려 몰살당하게 된다.
     
    더불어 죽마고우였던 사관(史官) 안명세(1518~1548)가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를 비판하는 시정기(時政記)를 썼다가 결국은 필화(筆禍)를 입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앞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조선시대의 정쟁은 지금은 것과 비교도 되지 않았으니 싸움에서 패한 자는 목숨을 내놓거나 유배를 가야 했다. (요즘은 죽지는 않으나 감방을 가야 하니 그게 그건 지도 모르겠다)
     
    이후 이지함은 관직의 뜻을 아주 접었다. 그런데 그는 이 무렵, 많은 책들을 섭렵한 데서 온 지혜인지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가에 액운이 미칠 것을 예견하였던 바, 형 이지번에게 전주이씨 왕가의 일족인 처가에 닥칠 흉액을 설명한 후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인 보령으로 내려가 숨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그가 보인 많은 예지력이 전하는데,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서울역 근방에 살던 소년 이덕형(1567~1613, 훗날 한성판윤과 영의정을 지냄)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형 이지번의 사위로 천거한 일과, 이지번의 아들인 조카 이산해(1539~1609, 훗날 영의정과 북인의 영수가 됨)가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만을 듣고 집안을 회복시킬 만한 큰 인물이 탄생했음을 예견한 일이다. 
     
     

    이산해(李山海)의 초상 / 국립중앙박물관

     
    한음(漢陰) 이덕형은 오성(鰲城) 이항복과의 소년시절부터의 우정으로 유명한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가 원군을 불러온 외교력을 보인 인재이다. 이덕형만큼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실 이산해는 훨씬 역사적 족적을 남겼던 인물이니, 앞서 말한 기축옥사 때 동인(東人) 정치인 외 관련자 1000여 명의 목숨을 빼앗은 서인(西人)의 거두 송강 정철을 탄핵해 결국은 죽게 만든 무서운 자이다. 
     
    이와 같은 예지력의 일화 때문일까, 흔히들 이지함을 매월당 김시습 · 북창(北窓) 정렴(1506~?)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奇人)으로 여기나 정북창과 이지함은 궤를 달리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정북창은 태생이 신령하여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낮에도 그림자가 없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천재였다'는 불가사의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나,(홍만종의 <해동이적>) 이지함의 경우는 이런 종류의 괴력난신과는 거리가 있다. 
     
    예를 들어, 이지함은 조카 이산해가 태어났을 때 그 울음소리만을 듣고  "이 아이가 기특하니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가문이 이 아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성장 과정에서 느낀 사악함에 가르침을 중단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이적(異跡)은 괴력난신 유(流)의 것이 아니라 다분히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다. 
     
    <연운요감(年運要鑑)>도 그러한 종류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는 자신을 찾아와 물어보는 많은 사람들의 운수에 대해, 흔히 말하는 족집게 무당 같은 신기(神氣)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을 종합한 결과를 도출해 말해주곤 하였다.
     
    이후 자신의 운세와 풍수명당을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을 위해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저술한 책이 운세서 <연운요감>과 도참서 <석중결(石中訣)>이다. 이 <연운요감>에 후세 여러 사람의 첨삭을 거쳐 만들어진 책이 '토정이 지은 비결(秘訣)'로 위장된 <토정비결>인데, 특별히 정본(正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토정비결>의 이본(異本)

     
    따라서 이지함에 대해 주목해야 할 일은 그의 비결서(秘訣書)가 아니라 애민정신이다. 그의 애민정신에 관한 첫 기록은 장가들어 초례를 지낸 다음날 밖에 나갔다가 얼어 죽게 된 거지 아이들에게 자신의 새 도포를 나눠 입혀주고 자신은 벌거벗은 채 돌아왔던 일이다. 이후 마포 강변에 토굴을 지어 살면서 당시의 사람들이 천히 여기는 소금과 어물 장사(魚鹽商賈)로써 마련한 곡식을 자신의 토굴 앞에 쌓아 놓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마포구 용강동 토정로의 이지함 상 / 토정로는 마포구 마포대교 북단부터 신석초등학교까지 이르는 약 750m 구간이다.
    안내문
    이지함 동상 옆의 구휼상
    안내문

     

    또한 바다와 갯벌, 무인도를 개척해 2~3년만에 몇만 섬의 곡식을 마련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당시 사람들이 꺼려한 바다를 택해 산물을 마련한 일도 특이하다. 율곡 이이가 지은 <경연일기(經筵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아산현감 이지함은 어려서부터 욕심이 적어서 외계(外界)의 사물에 인색하지 않았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서 능히 춥고 더운 것은 물론 배고픈 것도 견딜 수 있었다. 겨울에 벌거숭이로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앉아 견딜 수 있었으며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도 병이 나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두터워서 형제간에 있거나 없거나 자기 소유를 따지지 않았다. 재물을 가볍게 여겨서 남에게 주기를 잘했다.
     
    또 세상의 화려함이나 음악, 여색에 담담하여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배 타기를 좋아하여 바다에 떠서 위태로운 파도를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목사가 그를 객관으로 맞아들이고 예쁜 기생을 뽑아 같이 자게 하였다. 목사가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가리키며, “네가 이 분의 사랑을 받으면 상으로 곳간 곡식을 다 주겠노라” 하였다. 기생이 지함의 됨됨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갖은 유혹을 다하였지만 지함이 끝내 그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목사가 더욱 존경하였다.
     
     

    제주 정의현 객사 근민헌
    제주목의 객사 영주관이 있던 곳

     

    이지함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다가 1573년(선조6) 탁행지사(卓行之士, 행실이 아주 뛰어난 선비)로 거듭 추천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다. 당시 포천은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였던 바, 이지함은 당시의 상황을 "어미를 잃은 외로운 거지 아이가 오장(五臟)에 병이 들어 온몸이 파리하게 여위고, 핏기와 기름기라곤 없이 말라빠진 살가죽만 남아서 죽음이 하루를 못 기다릴 지경에 이른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 (포천 부임 후 올린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

     

    그럼에도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구호 방법인, 서울의 비축미를 빌려와 분배하는 손쉬운 방법을 거부하고 개간을 통한 생산과 증미(增米)정책으로써 어려움을 해결해 나갔다. 그가 당시 행한 '3대 창고 개발론'은 애덤 스미스(1723~90)의 <국부론>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그보다도 물경 200여 년이 앞섰다. 요약하자면, 

     

    3대 창고 개발론이 쓰여 있는 <토정유고>

     
    첫째 '도덕창고론'(道德之府庫)은,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모두가 사치와 사욕을 절제하고, 마음의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나누자는 정신개혁론이고, 둘째 '인재창고론'(人材之府庫)은 특성과 특기에 따라 적절한 곳에 인재를 배치하여 효용을 극대화시키자는 용인책(用人策)이며,("매는 꿩을 잡을 때, 닭은 새벽을 알릴 때, 말은 수레를 끌 때, 고양이는 쥐를 잡을 때 쓰인다") 셋째 '백용창고론'(百用之府庫)은 타지역의 필요 없는 땅을 빌려와 생산을 늘리자는 경세론이었다.
     

    <토정유고>의 인재창고론 / 해동청은 고려에서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중국에서 붙인 우리나라 뛰어난 매 이름이고, 한혈구는 땀을 피처럼 흘리며 천리를 달리는 명마를 지칭한다.

     
    이지함은 '백용창고론'의 일환으로써, 광산을 개발해 은과 옥(玉)을 개발할 수 있게 하고 바다가 없는 포천에 전라도 만경현의 작은 섬 양초도(洋草島)와 염전을 개발할 수 있는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를 귀속시켜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굶주리는 백성을 진실로 구하려 한다면 왕실의 창고에 있는 재물도 아끼지 말아야 하는데, 산과 들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 은은 왜 채굴하지 못하게 합니까? 골짜기에 파묻혀 있는 옥은 왜 아껴 캐내지 못하게 합니까? 바다에 무궁무진한 고기는 왜 아끼며 잡지 못하게 합니까?
     
    갯벌에 무진장한 갯물은 왜 아껴 소금도 굽지 못하게 합니까?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도 옳지 않은데, 관청에서 만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런 사업을 시행하는 것을 진실로 금지해서는 안됩니다. 포천은 바다가 없어 해산물을 다른 고을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또 왜 안 됩니까?"
     
    하지만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는데, 토정이 임지를 떠나는 날 고을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남아 있기를 빌었다(邑民攔道留之)는 내용이 <토정유고>에 실려 있다.
     
    또 <토정유고>에는 포천현감에 부임한 후 아전에게 "백성들은 모두 고생인데 어찌 절제 없이 편히 앉아 밥을 먹겠는가. 잡곡밥 한 그릇과 우거짓국 한 그릇만을 삿갓 밥상에 올려라" 명령했다는 애민(愛民)에서 비롯된 검약정신이 쓰여 있다.(我國之民生困苦 皆坐食飮之無節...炊飯一器 黑菜羹一器 盛之笠帽匣進之)
     
    그런데 현대의, 입만 열면 민생을 외치던 어떤 목민관 부부는 뒤로는 국가의 세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용해 사적 욕구를 채웠다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최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라는 책을 읽고 지금도 이와 같이 부패한 공무원이 있는가 정말로 놀랐다) 게다가 그런 자가 지금은 최고 공직자를 꿈꾼다고 하는 바, 혹시라도 성사되면 어쩌나 마음을 졸일 뿐이다.
     
    이후 이지함은 62세인 157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아산현감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부임하자마자 빈민구제시설인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구호에 나섰다. 이 '걸인청'은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사회복지관 '토인비홀(Toynbee Hall)'에 무려 300년을 앞선 구호기관이라고 한다.

     

    하지만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숨지고 말았는데, 그는 유언으로서 "결국은 백성들의 고혈(膏血)로써 세워지는 것들이니 불망비(不忘碑)나 청덕비 따위일랑 만들 생각조차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평소 "재물도 글 못지않게 중요하다. 재물을 업신여기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노라"라는 말을 했는데, 그의 경세론'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것이 당대의 선비들에게는 경박하게 들렸을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그는 일하지 않고 글만 읽는 선비를 '잔인한 자'라 불렀다.  

     

    훗날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지어 관리들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그 요지는 토정 이지함이 보여준 것과 같은 강직한 도덕성과 청렴함이다. 그는 책의 서문에 "오늘날의 목민관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굶어죽은 시체가 구덩이를 메우지만,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라고 적었다.  
     
     

    <목민심서>의 서문
    <목민심서>와는 정반대의 내용이 쓰여 있는 책 / 조명현 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번지 토정 이지함 묘 / 문화유산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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