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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인리화력발전소와 부군당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4. 23:49

     
    서울 영등포구 당인동 동명은 '당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당말'은 당나라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이여송 군대가 서울발전소(옛 당인리 발전소) 일대에 진을 친 데서 유래되었다. 주둔한 군대는 명나라 군대지만 중국을 상징하여 부르는 당(唐)이 명(明)을 대신한 것이다.
     
    위 이야기의 업그레이드 버전도 있다. 이때 온 명나라 군사 중의 한 명이 이곳에 살던 조선 처녀에게 반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 처녀는 그 중국인을 마땅치 않아 했으니, 오히려 한양에 과거를 보러 왔던 어떤 부유한 경상도 선비에 넘어가 경상도로 이사 가고 말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비는 유부남이었던 바, 처녀는 별 수 없이 후실이 되어야 했는데, 여기에 본처의 심한 구박까지 얹혀졌다. 견디다 못한 처녀는 결국 3년 만에 보따리 싸 쪽팔림을 무릅쓰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헌데 이게 웬 감격! 그때까지 중국인 청년이 자신을 못 잊고 눌러앉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당연히 그 중국 청년과 재혼했다. 그리고 남편이 지닌 염색기술로써 부부는 곧 부자가 되었고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잘 살았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이 이야기는 해피엔드가 아니다. 중국에 계신 부모가 그립다며 잠시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떠난 남편이 2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차후 들려온 소식은 남편이 여행길에서 역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 이후 자식들이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의 염색 일을 이어받아 살았다는 야그이다.
     
    이상의 이야기가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인리의 지명이 임진왜란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고,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한성부 서강방(西江房) 당인리(唐人里)로 등록된 것을 보면 야그에 꽤 힘이 실린다. 당(唐)나라 사람(人)이 살았으므로 '당인리'가 되었다는 말에도 제법 설득력이 따른다. 아울러 이와 같은 국제결혼 스토리는 고려말 원나라 통치기에도 등장하는 바, 아주 터무니없다고 하기 힘들다. 
     
     

    제주시 북성로 원나라 총관부 터 표석
    제주도 남원면 한남리 자치회관 앞 열녀 정씨 비석 / 원나라의 제주 통치 기간 몽골인 합적(哈赤, 군마 관리인) 석아보리개(石阿甫里介)의 부인이었던 고려 여인 정씨의 열녀 수절비이다.
    당인동의 위치

     
    우리에게 당인리는 당인리발전소로 친숙하다. 지금은 서울화력발전소로 이름을 바꾼 이곳 발전소는 과거 은방울자매의 노래 '마포종점'에도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이라는 가사로 등장한다. 노래의 제목이 된 마포종점은 1941년 완공된 서울 전차 돈암동~마포 노선의 종점으로, 돈암동 정류장은 성신여대 앞 올리브영 건물 자리에, 마포 정류장은 마포대로  20길 불교방송국 부근에 있었다. 현재 인근 어린이 공원에 노래비가 서 있다. 
     
     

    마포종점 노래비

     
    마포종점에서 강변을 따라 합정동 절두산 성당 쪽으로 가다 보면 옛 당인리발전소 만날 수 있다. 앞서 '개화기 전기 산업에 관한 복잡다난한 일들과 을지로 한국전력 서울본부'에서 말한 대로, 옛 당인리발전소는 일본인 회사 경성전기가 1930년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화력발전소로서, 1970년대에는 서울지역 전력의 75%를 공급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선도한 대표적 산업 유산이다.

     

     

    당인리발전소 자리에 세워진 (주)한국중부발전 사옥
    사옥 앞의 '광혜시원' 표석 / '은혜로운 빛의 시발지'라는 뜻의 글을 새겼다.


    당인리발전소는 경성전기가 1930년 11월 1만kW급의 1호기를 가동한 이래  줄곧 서울의 전기 공급을 담당해 온 발전소였다. 이어 1936년에 2호기, 1956년에는 3호기가 준공되었고, 이후 1969년과 1971년 연달아 4, 5호기를 준공하며  20세기 중반까지 수도권에 전력을 공급해 왔다. 그리고 1969년에는 연료를 중유로 바꾸며 서울화력발전소로 이름을 변경했다.
     
     

    서울화력발전소

     
    하지만 서울화력발전소는 이후 지역 주민들의 안전과 환경문제 등이 제기되며 이듬해인 1970년 발전설비 1, 2호기가 폐쇄됐고, 1982년에는 3호기마저 철거되었다. 이후 연간 약 34억kwh의 전기를 생산하며 경인지구 및 남서울지역에 전기와 난방 에너지를 공급하4, 5호기도 최근 작동을 멈추었다. 이로써  당인리발전소의 영광은 사라지고, 오직 노래가사 속에서만 이름이 남게 되었다. 
     
     

    1982년 1월 서울화력발전소

     

    그렇다면 서울화력발전소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난 것일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2020년 같은 장소의 지하에 새로운 LNG 복합화력발전소 1, 2기가 세워지며 발전소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달라진 것은 중유 연료의 시대가 마감되고 액화천연가스를 이용한 LNG 복합화력발전소로 운영되고 있는 사실이다. 더불어 이름도 '서울복합화력발전소'로 바뀌었다.


     

    지난날의 영광은 저물고....
    지하에 시설된 1호기 스팀 터빈 / KBS 사진
    1호기 가스 터빈 발전기 / KBS 사진

     
    들리는 말로는 지금의 LNG 복합화력발전소는 지하 35m에 위치한 세계 최초의 땅속 발전소이며 발전량은 80만kW급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발전소가 땅 속으로 들어갔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한 지역 주민들의 안전과 환경문제 때문인데, 원래는 마포구 재개발 계획을 세우며 이전을 추진했으나 안전과 환경문제로 쫓겨온 시설을 타 지역에서  받아줄 리 만무할 터, 어쩔 수 없이 지하에 설립을 하게 된 것이다.  
     
     

    당인리 발전소 화재 / 2014년 5월 19일 오후 4시 30분경 커다란 폭발이 두 차례 일어나며 화재가 발생한 적도 있다. 폭발 원인은 지금도 불명이다.

     
    외형만 남아있는 4, 5호기는 현재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4호기는 외부 골조만 살려 복합문화센터로, 5호기는 내부 설비까지 보존해 학습 공간으로서 시민들에게 개방할 계획이라는데, 이름은 '문화창작발전소'이다. 2025년 개관 예정인 '문화창작발전소'는 부지면적 8만1천650㎡, 건물 연면적 2만5천532㎡(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건립된다.
     
    구체적으로 2015년 폐지된 발전소 4호기는 2개 전시실(1천743㎡), 터빈홀 공간을 활용한 블랙박스 형태의 공연장(2천273㎡), 창작 공간인 프로젝트실(915㎡) 등 문화시설로 리모델링되며, 2019년 폐지된 5호기는 근대산업유산으로 원형을 보존해 대한민국 최초 화력발전소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교육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한다.
     
    또한 18m(5층) 높이의 4, 5호기 옥상을 일렬로 연결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상광장('당인리 포디움')으로 만들어 마로니에공원 같은 열린 공간이 꾸며지며, 이곳에는 이동식 화단을 활용한 친환경적인 도시농업, 버스킹 공연, 야외패션쇼 등이 이뤄지는 문화공간 및 청년 푸드트럭 등 소상공인 중심 시설이 자리 잡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문화창작발전소가 들어설 4, 5호기 전경 / 옥상이 하나로 연결돼 '당인리 포디움'이라는 광장이 마련될 예정이다.
    조감도

     

    연료가 바뀌며 풍경도 바뀌어 과거 하얀 연기를 뿜어내던 발전소 굴뚝은 지금은 볼 수 없다. LNG 연료가 사용되는 지금은 굴뚝에서 거의 수증기만 배출된다. 중유로 연료가 바뀌기 전인 1980년대까지는 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기 위해 깐 당인리선 선로도 볼 수 있었지만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당인동 12-20에 위치한 상수 어린이집에 당인리역이 있었는데, 1970년대 말까지 석탄을 훔치기 위해 울타리를 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면 믿을까? 
     
    사람들이 석탄을 훔친 이유는 단순하니, 아래는 그에 대해 보도한 1960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과거 60년대 중앙선의 종착역인 청량리역에는 이른바 도탄배(盜炭輩, 석탄도둑)이 들끓었다. 강원도에서 수송된 석탄을 훔치기 위한 자들이 밤에 몰래 몰려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생계형 도탄배들인데, 이렇게 먹고사는 자들이 약 400 가구로 추산된다는 것이 경찰의 발표였다.  
     
    이에 당국은 철로 변에 장벽을 쌓아 도탄배를 원천 차단했다. 그러자 그 도둑들이 생계가 끊겼다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를 가졌다나  어쨌다나? 이에 석탄공사 청량리출장소장, 청량리경찰서장, 청량리역장 등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나  어쨌다나?  
     
     

    '필요악? 석탄 훔치기', '도둑질하게 해 주?'라는 동정적 타이틀을 단 <경향신문> 기사
    당인리선이 표시된 1939년 철도지도 / 경의선에서 갈려나간 선 하나가 용산-서강-당인리로 이어진다.
    옛 당인리역의 기동차
    마포구 독막록 12길에서 보이는 이 건물 너머에 옛 당인리역이 있었다.
    미포구 독막로 12-38 상수어린이집 주변이 당인리역이었다.

     
    하지만 당인리역의 도둑은 청량리역 도탄배처럼 직업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반(半)은 재미 삼아 벌인 행동이었다. 도둑들은 훔쳐 온 석탄을 구멍 숭숭 낸 깡통에 넣고 서리태 같은 것을 구워 먹곤 했는데, 지금 그곳에는 향락의 메카 '홍대 예술의 거리'가 형성돼 있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이야기임에도 금석지감이 하늘과 땅만큼이다.
     
    '홍대 예술의 거리'가 시작되는 '어울마당로'는 옛 당인선 선로가 놓였던 길이며, 한때는 석탄 수송용 열차뿐 아니라 여객용(旅客用) 기동차도 운행되었던 길인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것이라 여긴 장소에서 놀랍게도 옛 간이역의 흔적을 발견해 놀라웠다.  
     
     

    1957년의 당인리발전소 / 합정동 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초가집들이 인상적이다.
    당인선 선로 위로 기동차가 달렸던 어울마당로
    이 길 오른쪽에 '(연희)방송서 역'이라는 간이역이 있었다.
    부근 옷가게 앞에서 찾은 '방송서 역' 개찰구 흔적
    어울마당로에 서 있는 종합 안내판 / '홍대 관광특구 보행 혼잡도 매우 혼합'이라는 문자가 떴다.

     
    상수 어린이집에서 어울마당로 2길로 접어들면 곧 당인리 부근당이 나타난다. 당인동 부군당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당인동 15-3번지에 있는 마을당집으로 면적 100여 ㎡에 건평 14㎡의 작은 집이다. 지금은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예전 수리 때 대들보에서 "단기 4287년 갑오 9월 29일 미시 상량(檀紀四二八七年甲午 九月二十九日未時 上樑)"라고 기록된 상량문이 발견된 적이 있다. 1954년에 지어진 집인 것이다. 
     
    이곳 부군당은 원래 당인리발전소 자리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었던 바, 뱃일로 삶을 영위하는 마을 주민들이 안녕을 기원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두어 번의 이전을 거쳐 1954년에 현재의 장소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당에 모셔진 신령 그림들은 1912년 무렵 백년사라는 절에서 조성된 그림을 모본으로 당이 이전된 1954년경에 새로 제작한 것이다. 좌제장군(左諸將軍), 용궁부인, 삼불제석・산신・부군・부군부인, 우제장군(右諸將軍) 등 총 여덟 분이 그려졌다.

     

     

     

    당인리 부근당 가는 길 / 이 골목 끝에 부근당이 위치한다.
    당인리 부근당 / 최근 격자창호를 정비하고 개량 한옥지붕을 얹었다.
    '우리문화유산'에서 빌려온 당인리 부근당 무신도
    부근의 오래된 마을우물이 이채롭다. 물론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당인리 부군당은 과거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왼쪽 4호기 자리에 위치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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