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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업의 건축과 주한 프랑스 대사관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18. 23:24

     

    건축가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건축에 눈을 뜬 것은 1939년 요코하마(橫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하면서부터로서, 그의 지도교수가 에콜 데 보자르(cole des Beaux-Arts, 파리미술학교)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라는 사실은 주목할 부분이다.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중업은 마츠다 히라다(松田平田)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건축실무를 익혔는데, 그가 최초로 참여한 조선 건축은 1944년 노동자들의 합숙소 및 집단 서민 주택단지로 조성된 인천과 서울 등지의 조선영단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나카무라가 1919년 설계한 죠스이 회관
    나카무라가 1925년 설계한 일본학생회관 (수리 중인 사진)
    나카무라가 1950년 설계한 주택단지
    2016년 드론으로 촬영한 부평 영단주택 모습 (부평역사박물관)
    영단주택 골목 (부평역사박물관)

     

    김중업은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쳤는데, 특이한 것은 당시 그가 시 쓰기를 즐겼다는 점이다. 훗날 그가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집을 설계한 것도 이때의 인연 때문이다. 성북동 168-34, 높다른 언덕배기 끝  60평 대지에 김중업이 다시 3미터의 축대를 쌓고 필로티 구조의 양옥을 앉혔던 이 집은,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 기법을 최초로 적용해본 주택일는지도 모른다. 

     

    1962년 건축된 이 집은 1990년대 후반 철거되고 지금은 원익 스카이빌이라는 빌라가 들어서 있다. 그래서 옛 모습은 아래 사진으로밖에 유추해 볼 수 없지만 김중업이 교류한 김광섭 같은 문인, 혹은 김환기 같은 화가를 미루어볼 때 그는 확실히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해보이며 나아가 소년 시절의 꿈과 판타지를 건축에 구현한 영원한 젊음의 심벌로도 여겨진다. 

     

     

    김중업의 도장 (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 대가(大家)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김광섭의 옛 집이 소개된 거의 유일한 사진
    김중업이 1964년 설계한 서울 광희동 서산부인과 의원
    르 코르뷔지의 건축 기법과 판타지 세계가 묻어나는 건물로, 20세기에 지어진 21세기의 건축물로 불린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대 본관
    제주대 본관 /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로 불릴 정도로 찬사를 받은 건물이었으나 바닷모래를 사용해 지은 탓에 건물의 조기 부식이 발생해 결국 1995년 철거되었다. 현재 재건이 논의 중이다
    본관 측면 사진
    김중업이 1964년 설계한 한남동 주택과 내부 계단

     

    김중업이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은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 건축가 대표로 참석했을 때였다. 당시 서울대학교에 이어 한양공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과 부산공업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그는 유네스코 대회를 계기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 1952년 10월부터 3년 6개월간 건축 및 도시계획을 수업하고 보다 넓은 세계관을 터득하게 된다. 

     

     

    르 코르뷔지가 설계한 성 피에르 성당
    르 코르뷔지가 설계한 프랑스 피르미니 문화센터
    르 코르뷔지가 설계한 도쿄 서양미술관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 시절의 김중업

     

    1956년 3월 르 코르뷔지에의 만류에도 귀국한 김중업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창작 활동을 하며 한국의 고전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에 대한 첫 결과물이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었다. 김중업은 1959년 프랑스 정부가 주관한 주한프랑스대사관 설계 공모에서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누르고 1위 차지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그는 대사관 건물을 스승 르 코르뷔지에가 창시한 돔이노(Dom-Ino) 구조로 지으면서도 한국의 고전을 표현했다. 업무동의 지붕이 한옥 처마처럼 휘어져 있는 게 대표적 예이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업무동
    1962년 완공 당시의 충정로 주한프랑스대사관

     

    한국 건축사의 뛰어난 걸작으로 꼽히는 충정로 주한프랑스대사관은 지난 2018년 확장 필요성에 따라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초기 모습이 훼손되었으나 업무동만큼은 김중업 작품의 원형을 살리려 노력하였던 바, 다시 곡선형의 처마 선과 1층을 비운 필로티 공간을 그대로 만나 수 있게 되었다. 주변으로는 길쭉한 갤러리 동, 뒤쪽에는 신축한 11층짜리 타워형 업무동이 들어섰다. 철거된 건축물의 잔재는 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주변에 일부를 옮겨놨다. 

     

     

    복원된 업무동의 공식명칭도 '파빌리온 김중업'으로 지었다고 한다. 과거 김중업은 이 건물을 두고 "한국의 얼이 담긴 것을 꾸미려고 애썼고 프랑스다운 엘레강스를 나타내려고 한 피눈물 나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안양박물관 내 주한프랑스대사관 철거 부재
    주한프랑스대사관 대사집무실 코너 기둥
    주한프랑스대사관 대사집무실 외부 기둥
    코너 기둥 부재
    기타 부재

     

    귀국 후 김중업은 명보극장(1956), 서강대학교 본관(1958), 서울 장위동 '人'자 집(1958),  '드라마센터,(1959) 등을 설계했고, 주한프랑스대사관 이후로는 설씨 청평산장(1962),  제주대학교 본관(1964), 서산부인과의원(1965), 부산 UN묘지의 정문(1966), 3·1빌딩(1969) 등의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획일적 밀어붙이기식 개발정책에 반대해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으니, 서울이 직면한 도시계획·재건축 등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양심적 건축가의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개진했다. 그는 특히 1970년 4월, 대단지 서민아파트로 지어진 와우 아파트가 준공 4개월만에  붕괴하자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여 김현옥 서울시장을 강하게 질타하였고, 이후 1970년 8월 서울시 철거민 이주를 위해 졸속으로 추진되다 대규모 시민 봉기를 야기했던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에서도 이를 무리하게 추진한 양택식 시장을  격렬히 비판했다.

     

     

    그 무렵의 김중업 (金重業, 1922~1988)

     

    당시 정부 시책에 협조적이던 김수근과 달리 줄곧 정부 정책에도 비판적이었던 김중업은 결국 1971년 11월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서 체류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성북동  자택도 경매로 날아가고, 3·1빌딩 등의 건축 잔금도 받지 못하게 되며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디자인 스쿨 중에 최고라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과 하버드대 건축과 교수직을 역임하다 1978년 11월 귀국해 KBS국제방송센터(1988),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1988) 등의 걸작을 남겼다.  

     

     

    김중업의 대표 건축물
    서강대학교 본관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
    지금은 안양박물관이 된 유유산업 안양공장 건물 / 김중업의 설계로 1959년~1960년대 초에 지어졌다.
    안양박물관 미니어처 / 김중업건축박물관 내
    유유산업 연구동 건물은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되었다.
    김중업의 글 "건축은 인간에의 찬가입니다"라고 시작되는 김중업건축박물관 앞의 모뉴먼트
    본관의 직선과 대비되는 원형의 경비실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
    익랑과 같은 곳에 사신도를 새겼다.
    1970년 작 안국빌딩
    1970년대 작 성북동 미국제일은행지점장 주택
    1979년 작 한남동 주택
    1983년 작 사직동 주택
    1987년 작 연희동 주택
    복원된 주한프랑스대사관 업무동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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