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유정란 갑신정변 비상계엄 & 탄핵-또 다시 격랑의 장소가 된 재동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2. 21. 21:52
서울 종로구 재동이 또다시 격랑의 장소가 되었다. 재론하자면, 피비린내 진동하던 서울 재동의 역사는 조선초 계유정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냈다. 이에 그는 한명회, 권람, 홍윤성, 양정 등의 심복들과 1453년 계유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의 권신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유명한 계유정난이다.
이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왕명을 빙자해 권신들을 입궐시켜 살해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살생부(殺生簿)로 여기 이름이 적힌 자는 다 죽었다. 일환으로써 한명회는 자객을 보내 재동과 그 인근에 살던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허후, 이우직 등의 문무대신을 살해했는데, 재동은 당시 살해된 자들이 흘린 피와 피비린내를 덮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재(灰)를 가지고 나와 뿌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 잿골, 즉 재동이 갑오개혁 이후 재동(齋洞)이라는 한자명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차제에 문종에 대해 몇 마디 부언하자면, 그는 아버지 세종을 빼닮은 영민하고 부지런한 임금으로서 유학·천문·역법·산술 등에 두루 정통했고 뛰어난 문장력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흔히들 문종을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병약한 왕, 그래서 어린 단종을 남기고 일찍 돌아가신 왕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으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세종의 마지막 치세 8년은 문종이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정치를 한 기간으로, 1450년부터 1452년까지의 2년 3개월의 재위기간을 합하면 10년을 통치한 왕이다.
만일 문종이 장수를 했다면 아버지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명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일설에는 별 이론(異論)이 붙지 않으니, 지금도 남아 있는 문종의 치적은 실로 화려하다. 문종에 관해 가장 특기할 점은 한글 창제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로서, 성삼문은 자신의 저서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에서 훈민정음을 세종과 문종의 합작품이라고 명시했다.(我世宗 文宗慨念於此 旣作訓民正音 天下之聲 始無不可盡矣)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세종 28년) 10월 9일(한글날) 그날, 사실 세종대왕은 병석에 있었고 세자가 치세했다.
뿐만 아니라 문종은 세계 최초의 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하였으며, 역시 세계 최초의 로켓화기라는 신기전기(神機箭機) 화차도 문종의 발명품이었다. 까닭에 신기전기 화차는 이후 '문종화차'라고도 불렸는데, 문종은 이 신무기를 4군6진에 배치하여 화력시범을 보임으로써 명군(明軍)과 여진족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총통(銃筒, 요즘의 총과 같은 개인 화기) 제작과 총통군의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던 바, 이에 관한 기록이 1445년의 <세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또 문종은 즉위년인 1450년, 자주국방의 의지를 담은 책 <동국병감(東國兵鑑)>을 편찬케 했는데, 책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일어난 대소(大小) 전쟁의 기록을 자세히 담았다. 아울러 언로(言路)를 열어 소통의 정치에 진력하였으니, 4품 이상의 관료에만 허락되던 윤대(輪對, 임금에게 직접 직무를 고하는 일)를 6품까지 넓혔다. 이를테면 6급 공무원이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데, 아마도 그것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문종은 과거에도 그걸 했다.
단종이 집권했다면 그 역시 아버지 문종에 이어 영주(英主)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단종은 쿠데타 세력에 유배되어 죽고 수양대군은 조선의 7대 왕으로 즉위하니 곧 세조이다. 그러나 왕위 찬탈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지속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누르려는 피의 보복이 뒤따랐던 바,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의인들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유명을 달리해야 했다.훗날 사육신으로 불렸던 6명의 의로운 신하들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결국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이 모의의 주역 성삼문이 살았던 곳도 공교롭게 재동이었다. 사육신은 재동에 무수히 발길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홍현(紅峴) 정독도서관 입구에 성삼문 집터 표석이 있다. 홍현에는 갑신장변의 주역 김옥균과 서재필도 살았다.
세조도 법전인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치적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알려진 세조는 재위 기간 내내 피부병에 시달렸다는 얘기뿐인데, 세조가 평생을 고생한 피부병은 단종의 모(母)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은 자리가 퍼져나간 것이라는 전설이 덧붙어 있다.
그 아들들도 현덕왕후의 망령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맏아들 의경세자나 둘째 아들 해양대군 이황(李晄, 8대 임금 예종)이 단명한 것은 그 때문이라 하며,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 이정(李婷), 잘산 대군 이혈(李娎, 9대 임금 성종)이 단명한 일 역시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는 같은 류의 전설이 전한다.
아울러, 세조의 명에 의해 파헤쳐져 안산 해변에 버려졌던 현덕왕후의 관을 어떤 승려가 바닷가에서 들리는 여자의 통곡 소리를 듣고 찾아낸 일과, 지금 동구릉 현릉 내 현덕왕후 무덤에 묻힌 관이 바로 그때 발견된 관이라는 야사와 정사가 혼재된 이야기들이 전하는데, 진위보다도 올바른 마음으로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요구가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물론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사람은 일부 국회위원을 비롯한 현대의 위정자들이다. 정말이지 그런 악한들을 귀신이 왜 안 잡아가나 싶다.
다시 재동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지금 초미의 관심이 집중된 헌법재판소는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이 살던 집이자 또 다른 주역 박영효의 할아버지 박규수 대감이 살던 곳이었다. 구한말 대표적 개국론자 환재 박규수는 갑신정변의 주역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니, 훗날 박영효는 춘원 이광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큰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에 모이곤 했소." ('박영효씨를 만나다' 이광수 1931년 <동광> 19호)
또 박영효는 갑신혁명은 고균(김옥균)보다도 자신과 홍영식이 사전에 준비를 해 일으킨 일('갑신정변' 박영효 1926년 <신민> 3호)이라고도 주장했다. 당시 29살의 홍영식은 정변을 일으킨 후 좌의정에 올라 혁명정부를 대표하였다. 정변 발발 전 그는 병조참판으로 개혁당 인사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있었으니 좌의정으로서 혁명정부를 대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겠다.
홍영식(1855-1884)은 혁명의 주역 중 김옥균과 함께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스팩도 김옥균과 함께 가장 화려하였으니, 홍영식의 아버지는 당대에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이요, 자신은 18살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던 바, 배경과 실력이 겸비된 인재 중의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온후한 인격이었으니 갑신 개혁파는 물론이요, 수구파 인사들까지도 그를 존경해 친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882년 미국과의 수교 후 답방단인 보빙사의 부사(副使)로 미국에 가 발달된 서구의 문명을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도 그렇듯 부강한 나라가 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좌의정에 올라 혁명 정부를 대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화는 단 하루, 곧 민왕후가 불러들인 청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치자 원세개의 군대를 피해 고종과 함께 흥덕동 숭교방(崇敎坊, 현 명륜동) 북묘(北廟)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까지 쳐들어온 청군에 저항하다 무참히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의정을 지냈던 아버지 홍순목은 며느리, 손자와 함께 자살했으며, 나머지 식솔들도 모두 살해당해 그의 재동 집은 피칠갑을 한 흉악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후 이 집은 갑신정변 때 깊은 자상(刺傷)을 입고 죽을 뻔한 민왕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좌장 민영익을 살려낸 서양의사 알렌에게 하사되었고, 알렌은 이 집의 피를 닦아 내고 기물을 정비한 다음 광혜원(훗날의 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열었다.
홍영식의 시신은 육시를 당해 잘린 머리와 팔다리가 각각 전국에 조리돌려졌다. 그것이 너무도 끔찍해 각국 공사가 연명(連名)하여 시행의 중지를 주청했지만 고종은 가납하지 않았다. 동대문 밖에 버려졌던 몸뚱이는 이복형 홍만식에 의해 경기도 초월면 쌍룡리 야산에 묻혔으나 김옥균이 육시를 당할 때 다시 꺼내어져 부관참시를 당했고, 이후 그의 양자 홍성겸이 멀리 경기도 여주군 문장리 야산에 묻었다.
오늘, '제9회 서울 우수한옥'으로 지정된 가회동 수경재를 찾아가다 홍영식의 재동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집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과거의 전근대적인 형벌을 헌법의 이름으로써 차단하고 있지만, 상대의 머리와 팔다리가 찢어지길 희망하는 듯한 이른바 민주시민들이 이 추위 속에서도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다. 홍영식의 식솔들을 처단하려 몰려든 구한말의 민중들과도 흡사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경왕후와 대자사 & 몽유도원도 (2) 2025.01.13 팔당 두미협과 고안 수위관측소 (1) 2025.01.11 광암 이벽은 정말로 순교했을까? (10) 2024.11.13 이재명 판결이 몰고 올 퇴행 (4) 2024.11.11 소현세자와 아담 샬 (7)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