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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 두미협과 고안 수위관측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11. 18:47
한강은 금강산 단발령(斷髮嶺)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팔당 두물머리에서 합쳐져 서해로 흐르는 물줄기다. 그 물줄기는 약 500km(남한강 기준)를 흐르는 동안 유·무명의 승경을 창출하는데, 일찍이 겸재 정선은 한강이 만들어내는 풍광에 반해 서울의 명승들과 한강 주변의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그것이 유명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경교명승첩>은 '서울과 그 주변의 명승을 담은 그림집'이라는 뜻이다. 그 그림집은 옛날과 지금의 모습을 견주어 비교할 수 있어 금석지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도 하고, 그곳에 그려진 정자와 같은 옛 집들은 문화유산을 복원 또는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한강 그림에는 정수영이 1795~1797년에 걸쳐 한강과 임진강 일대의 승경을 담은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이라는 15.75m의 두루마리 회화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그림첩에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모두 담은 것은 당연히 아니니, 나름대로 첨삭한 사진으로써 <신 경교명승첩>, 혹은 <신 한임강유람도권>을 만들까 궁리 중이다. 세월은 멈추지 않고 저 강물처럼 흐르니 언제가는 이것도 방금 말한 <경교명승첩>과 같은 역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인데, 결과가 어쩔는지는 모르겠다. 세월은 흐르고 그 무렵의 나는 분명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이니..... 그런데 내가 죽으면 이 블로그도 자연 소멸되는 거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 속에 팔당 두미협과 고안수위관측소로 첫 발길을 떼 보았다.
두미협은 지금은 팔당역에서 팔당댐 방면 약 500m 지점에 있는 장소로 강물 위로 바윗돌들이 돌출돼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협(峽)은 협곡을 의미하나 협곡과 같은 골짜기는 아니다. 다만 남양주 쪽 예봉산과 하남 쪽 검단산 줄기가 밀려내려와 있는 바, 근방에서 가장 강폭이 좁다. 이 두미협을 지목한 이유는 이곳이 나름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약용 형제의 고향마을인 마재가 있다. 1784년 4월,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마재에서 큰형수(큰형 정약현의 처)의 상을 치르고 돌아가다 두미협 배 위에서 사돈인 이벽(큰형수의 동생)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처음 듣는다. 앞서도 몇 차례 말한 바 있거니와 이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향후 조선에 천주교 바람과 그들을 처단하는 피바람을 함께 몰고온 사람이다.
훗날 정약용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783년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대과 시험을 준비하던 23세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 형제는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당시의 경이로움은 마치 깜깜한 밤하늘에서 끝없는 은하수를 보는 듯하였다." (惝怳驚疑 若河漢之無極)
이후 정약용의 동복(同腹) 3형제(약전·약종·약용) 역시 천주교인이 되나, 박해가 닥쳐오자 종형인 정약전과 함께 배교해 참형을 면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하지만 둘째인 정약종은 배교를 거부하고 아들 정하상을 비롯한 가족과 함께 순교한다. 천만 다행히도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 땅 18년 귀양살이 끝에 풀려나게 되지만 정약전은 풀려나지 못한 채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이벽은 어찌 됐을까? 유배 갔을까, 순교했을까? 그는 배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교하고자 하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1785년 여름 붙잡힌 그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서 옥에 갇혀 있다 부친 이부만의 빽으로 풀려났다. 대신 그는 부친에 의해 집안에 감금되었는데, 그러던 중 역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순교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21년 시복(諡福)되어 겨우 순교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고안 수위관측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던 시설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17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남양주시 현 위치에 한강의 물 높이를 재는 목재 가옥형 관측소를 설치했다가 1930년 현재의 콘크리트 관측소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29년 발간한 <조선 하천조사서>에 따르면, 1917년 설치 때에는 조수의 흐름에 따른 수면 높이와 홍수 때의 물 높이를 눈대중으로 관측하였으나 1930년대 부자식(浮子式) 자기수위계를 설치하여 정확한 물높이를 관측했다고 한다.
작동원리를 보면, 정통(井筒: 밖에서 기둥처럼 보이는 시설) 속 수면 위에 띄운 부자(플로트)가 수위 변동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면 수위측정계의 도르레가 돌면서 수위를 표시하는 형식으로, 측정 기록은 <조선 하천조사서>와 <한국 수문조사 연보>에서 찾을 수 있다. 관측소의 구성은 정통과 관측소, 강안(江岸)에서 관측소를 연결하는 교각 등이 하나의 세트였으나 현재 교각은 1개만 남았다.
고안 수위관측소는 해방 이후 내무부, 건설부, 국토교통부 한강홍수통제소 등 관리기관에서 운영해 왔으며 1994년 관측이 종료되었고 1998년에 폐쇄하였다. 이 관측소는 우리나라 근대 물길 관측의 역사 및 관측소가 세워질 당시의 토목 기술과 수위 측정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어 2014년 7월 1일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수위관측소는 이곳 외에 고양시 행주 수위관측소, 서울시 구용산 수위관측가 남아 있으나 고안 수위관측소가 가장 온전한 편이다.
주변에는 또 다산성곽이라는 특이한 구조물이 있다. 흡사 성곽처럼 보이는 이곳은 돌로 쌓은 진짜 성곽이긴 하나 옛 것은 아니다. 안내문을 보니, 거중기를 사용해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데 큰 공을 세운 다산 정약용의 실용과학과 실학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건립했다고 한다.
남양주박물관, 두미협, 다산성곽, 고안 수위관측소가 모두 1.5km 내외의 직선 거리상에 있어 팔당역으로부터 도보 유람이 가능하다. 욕심을 내면 팔당댐까지도 걸을 수 있다. 여기서 남양주 실학박물관과 정약용의 고향 마재도 멀지 않으나 걸어서 가기는 힘들다. 가실 양이면 63번 버스나 자차로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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