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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와 대자사 & 몽유도원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13. 17:29
tvN에서 방영 중인 인기 드라마 '원경'은 태종 이방원의 아내 원경왕후에 대해 조명한 사극이다. 지금껏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 서울 거주 부인) 신덕왕후 강씨에 대해서는 드라마에서 자주 다뤄졌으나 원경왕후 민씨를 주인공으로써 극화한 것은 '원경'이 최초인 듯하다. 원경왕후 민씨는 이방원과 함께 권력을 쟁취했던 철의 여인이지만,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태종에 의해 아버지 민제와 남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원경왕후는 양녕·효녕·충녕대군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양녕·효녕·충녕대군에 얽힌 일화들이 워낙에 잘 알려져 묻어 유명세를 탄 경우인데, 그중 셋째 충녕은 조선 역사상의 가장 훌륭한 왕으로 칭송받는 군주가 되었으니 2004년 세종시라는 비합리적인 도시가 비정상적으로 태어날 때도 세종시의 이름만큼은 국민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원경왕후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바, 충녕대군의 여덟 살 터울 동생 성녕대군을 14살의 나이로 떠나보내야 했다. 특히 성녕은 원경왕후의 나이 마흔에 얻는 늦둥이로, 그에 대한 애정으로써 혈육(아버지와 남동생들)을 잃은 슬픔과 남편(태종)에게 버림받은 원통함을 상쇄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나 창병(瘡病)이 깊어지며 결국 이별을 맞아야 했다. <태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는 아래와 같다.
성녕대군 이종(李褈)이 졸(卒)하였다. 종(褈)은 임금의 넷째 아들로서 어리지만 총명하며 지혜로웠고, 용모는 단정하고 깨끗하였으며, 행동거지는 공손하고 온순하였으므로, 임금(태종)과 정비(靜妃, 원경왕후)가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 12세에 총제(摠制)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이 궁위(宮闈, 궁궐)를 나가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진(瘡胗)에 걸렸고 병이 심해져 졸하게 되었다.
성녕대군은 고양시 대자동에 장사 지내졌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는 아들 성녕이 그리울 때마다 대자동을 찾았다. 그러나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았던 바, 원경왕후는 아예 성녕대군의 무덤 곁에 명복을 빌기 위한 암자를 세워 머물렀다. 그 암자를 후세 사람들은 '부모님의 큰 사랑이 베풀어지 곳'이라고 하여 대자암(大慈庵)이라 불렀고 사세(寺勢)가 커지며 대자사(大慈寺)라 불려졌다. 지금 대자동은 그로부터 연유됐다.
대자사는 작은 암자로 출발했지만, 흥천사, 흥덕사, 진관사 등과 함께 왕실 원찰로 조성되어 번성했다. 그리하여 국가로부터 노비와 사전(寺田)을 부여받는 등 당시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사세를 이어갔으나, 임진왜란과 함께 운이 다하고 말았다.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라는 왜장을 만난 것이 불운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인물이나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조선측 기록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놈이다. 그만큼 조선측에 끼친 피해가 많다는 뜻인데, 특히 대자사에서 <몽유도원도>를 훔쳐간 놈으로 알려져 있다.
놈은 조선 출정에 용운화상이라는 다이지지(大慈寺) 주지승을 대동하였고 그 자의 눈썰미를 앞세워 조선 절들의 유물을 약탈했다. 그중에서도 고양시에 있는 대자사를 탈탈 털어갔는데, 용운화상이 주지로 있던 가고시마 다이지지와 사찰명이 같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놈들은 그곳에서 안평대군이 계유년의 난리를 피해 숨겨놓은 <몽유도원도>를 비롯한 빛나는 유물들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은 요절한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돼 묘를 돌보고 제사를 모셨다. <몽유도원도>가 고양 대자사에 있던 이유도 그 때문인데, 명필 안평대군은 대자사의 현판 글씨를 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물론 시마즈 요시히로가 <몽유도원도>를 훔쳐간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추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평대군 묘법연화경 사경문=감지금자묘법연화경·紺紙金字妙法蓮華經>과 도쿄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의 목록에 있는 <안평대군 행서칠언율시축>(34.1×56.5cm의 1폭 종이묵서), 그리고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의 <몽유도원도>를 들 수 있다.
안평대군 묘법연화경 사경문은 <세종실록>에 "승도(僧徒)들을 크게 모아 불경(묘법연화경)을 대자암으로 이전하였다. 금을 녹이어 경(經)을 쓰고, 수양, 안평 두 대군이 내왕하며 감독하여 수십 일이 넘어 완성되었는데, 이때 대군, 제군이 모두 참여하였다"고 쓰여 있고, <문종실록>에는"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을 만들어 대자암에 봉안하였다"고 쓰여 있다. 대자암에 있던 이 금자(金字) 사경문은 임진왜란 때 약탈된 후 1946년 일본 GHQ(미군정)문화재담당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에 의해 하버드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몽유도원도>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로 건너간 후 시마즈 요시히로의 문중에서 보관되었다. 근래 이 그림을 가장 오랜 기간 소장했던 사람은 시마즈 요시히의 후손인 시마즈 히사요시였으나 이후 여러 사람을 거쳐 덴리대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 그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3번이나 있었다는 것이니, 첫 번째는 1931년 3월 22일 도쿄미술관에서 '조선미술명화전'이 개최됐을 때였다.
이때 <몽유도원도>가 매물로 나왔다. 당시 소유자는 소노다 사이지라는 실업가였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 국내에는 이 그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격으로 제시된 3만 원도 큰 부담이었으니 3만 원은 당시 서울의 기와집 30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결국 <몽유도원도>는 팔리지 않았으나 그림의 가치를 주목한 일본정부에 의해 일본국보로 가(假)지정되었다.
두 번째는 1948년 12월, 초대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가 일본에 갔을 때였다. 당시 <몽유도원도>는 사업이 궁핍해진 소노다 사이지의 아들 소노다 준(薗田淳)에 의해 고미술상 류센도(龍泉堂)에 팔린 상태였는데, 류센도에서 김재원에게 은밀히 접촉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격이 문제였으니 제시된 5000달러는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세 번째는 1949년, 고미술품 애호가보다는 장물아비로 이름 높았던 장석구라는 골동품상이 자신이 구입한 <몽유도원도>를 국내로 들여왔을 때였다. 이것을 이광수, 장택상, 최남선 등에게 보여줬고, 전형필, 최순우 등에게도 구입을 권했으나 그가 제시한 1만 달러에 가로막혔다. 장석구는 다시 그림을 들고나가 1950년 일본 천리교(天理敎, 덴리교) 2대 교주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에게 팔았다.
<몽유도원도>는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사용할 때와, 1996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으며, 2009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가 있었다. 그 9일간의 전시에 하루 평균 만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고, 박물관 측은 관람시간을 1분으로 제한했다. 1분 관람을 위해 서너 시간 줄을 서야 했지만 이들은 마지막 안복(眼福)을 누린 분들이다. 이후 덴리대학이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더 이상 진본 전시를 안 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품을 볼 기회마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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