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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후궁 명빈김씨·신빈신씨·효순궁주·의정궁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15. 17:30
두물머리 풍광으로 유명한 남양주 수종사 대웅전 옆에는 2013년 보물(제1808호)로 지정된 팔각오층석탑이 있다. 조선시대 유일한 팔각다층탑인 이 탑은 본래 사찰 입구 동쪽 능선에 있었다. 그러다 1970년 정혜옹주 사리탑과 함께 대웅전 옆으로 옮겨졌는데, 이건(移建) 과정에서 금동석가모니불좌상, 금동지장보살좌상, 금동반가사유보살상 등의 장엄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금동석가모니불좌상에는 '시주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라는 명문이 있었다.
시주자인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는 조선 2대 임금 태종의 후궁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무덤인 명빈 묘는 구리시 참피온스 파크 부근의 고즈넉한 장소에 위치한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곳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 자주 산책로로 이용하는데, 농장을 운영하는 분들 외에는 행인을 거의 만난 적이 없음에도 명빈 묘는 철문이 굳게 잠겨져 들어가 볼 수 없다. 어쩌면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더욱 출입을 금할 수도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열려 있는 문을 보게 되었는데, 그날 찍은 사진을 앞서 포스팅한 적이 있다. 무덤 외 다른 것은 없으나 무덤까지 올라가는 높은 계단과 주변의 한강뷰가 인상적인 장소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명빈묘는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의 묘이다. 명빈은 김구덕의 딸로 태종 11년(1411)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명빈에 봉해졌다.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성종 10년(1479)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에는 문석인(文石人), 석상(石牀), 묘표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명빈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명가(明家)로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후기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창군 김승택, 할아버지는 고려후기 문신인 상락군 김묘이고, 아버지는 돈녕부 판사를 지낸 안정공 김구덕이다. 그 후광이었는지 태종 재위 기간 후궁 중 유일하게 빈(嬪)의 지위에 있었다. 또한 남동생 김오문의 딸은 문종의 첫 번째 부인인 휘빈 김씨가 된다. (하지만 곧 폐출되었으니 그녀가 문종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해괴한 짓을 하다 쫓겨난 일을 앞서 말한 바 있다. ☞ '문종 부인 레즈비언 썰은 사실일까?')
후사가 없었던 명빈 김씨는 깊은 불심으로써 외로운 한세상을 견디며 살다 간 것 같다. 반면 신빈 신씨(信嬪辛氏, 1377~1435)는 명빈과는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이다. 신빈은 본래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를 모시는 여종이었으나 태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이후 태종과의 사이에서 총 3남7녀를 낳았을 만큼 태종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바, 자연히 원경왕후에게는 미움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몸종이 후궁이 되었기에 분노가 더 컸을 것이다. 지금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의 드라마 '원경'에서 채령(이이담 분)이 그 역할인 듯하다.
신씨는 태종의 후광이 오래 미쳤는 듯, 1414년(태종 14) 1월 아들 함녕군을 낳은 후 신녕옹주(信寧翁主)에 봉작되었고, 1420년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내명부의 수장이 되어 궁중 여인들을 다스렸다. 1422년(세종 4년) 태종이 병으로 누웠을 때는 간병을 극진히 하여 신녕궁주로 봉해졌는데, 태종이 승하한 후에는 비구니가 되어 불가에 귀의했다. 그는 내불당인 문소전(文昭殿)에서 태종의 명복을 빌었으며 1433년 궁궐 내 내불당이 철거된 후에는 청량리 정업원에 머물다 1435년(세종 17) 사망했다.
그는 통칭 신빈 신씨로 불리나 태종 때는 빈이 아니었고 앞서 말한 대로 옹주 또는 궁주였다. 그가 빈으로 봉해진 것은 이후 450년이 지난 1872년(고종 9)으로 이때 정1품 신빈(信嬪)으로 추증되었다. 묘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13번지에 있으며 묘표와 장명등에서 '궁주'(宮主)라는 글씨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 '원경'에서 엊그제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칼을 맞은 효순궁주(이시아 분)의 묘 역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쉽게 다녀와 사진을 올릴 수 있었는데, 정작 그의 묘표에는 '궁주'라는 글씨가 없고 효빈묘로 되어 있다. 역시 태종의 후궁이었던 효순궁주는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모시는 여종이었다는 설과, 원경왕후가 사가(私家) 시절부터 데리고 있던 가비(家婢, 집안 노비)였다는 설이 겹친다.
<태종실록>에는 '원경왕후의 가비로서 궁에 들어온 자'라고 되어 있어 후자에 신빙성이 실린다. 하지만 신덕왕후 강씨가 궁에 들어올 때 데려온 몸종으로 워낙에 미모가 뛰어나 신덕왕후가 태조 앞에 내놓기를 꺼렸다고 하는 썰에도 귀가 쏠린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는 효순궁주인데 왜 무덤에는 빈(嬪)으로 되어 있을까? 그도 훗날 추증됐을까? 정답은 없다. 그가 빈, 혹은 옹주, 궁주와 같은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는 작가 편의대로 구성되었으며, 무덤 묘표에는 세운 이의 편의대로 표기된 듯하다. 다만 그는 태종의 아들 경녕군을 낳은 생모인 바, 빈으로 대접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역사적 기록은 '궁인 김씨'이다. 궁인 김씨는 1454년(단종 2년) 사망해 구리 백교(한다리)마을 아차산 남쪽 기슭에 묻혔는데, 훗날 손자 오성군이 할머니 곁으로 왔다.
우리에게 생소한 '궁주'라는 문자는 서울 방학동 연산군 묘역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묘역 한가운데 있는 방형분의 묘표에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義貞宮主趙氏之墓)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무덤의 주인공 역시 태종의 후궁이다. 하지만 그는 태종과 하룻밤도 치르지 못한 채 청상과부로서 생을 다한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건국 개국공신 한산군 조인옥의 손녀이자 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뇌(趙賚)의 딸로, 1422년(세종 4년) 2월 태종의 비로 간택되었다. 하지만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내가 늙었으니 더 이상 후궁을 보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고, 석 달 후인 5월에 죽었다. 그 바람에 16세 조씨는 혼례도 아니 올린 몸으로서 과부가 돼 버리고 말았다. 말하자면, 누군가의 욕심으로 후궁으로 밀어 넣어졌다 얄궂은 운명을 맞이한, 시대의 희생양과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은 조씨가 빈(嬪)의 자격으로 입궁하였지만 예를 올리지 아니하였으므로 빈보다 아래인 잉첩으로 간주하여 궁주의 작위를 내렸다. 의정궁주 조씨의 운명은 죽어서도 얄궂었으니, 1454년 사후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땅에 마련된 그의 무덤 곁에는 훗날 폐주(廢主) 연산군이 묻히게 된다.
그가 임영대군의 땅에 장사 지내진 이유는 후사가 없는 의정궁주 조씨의 제사를 임영대군이 맡으라는 어명이 있어서이다. (어찌 됐든 조씨가 태종의 후궁이었으니 임영대군에게는 촌수로 할머니뻘이 된다) 그런데 강화 교동도에서 죽은 연산군이 부인인 폐비 신씨의 무덤 곁으로 이장되며 이웃이 된 것이다. (폐비 신씨의 아버지 신승선은 임영대군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폐비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되므로 그 연고로써 연산군 부부의 묘가 이곳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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