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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과 비례했던 조선시대 무덤 규모 - 신빈신씨와 선빈안씨의 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18. 21:38

     
    당연한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유택들을 살펴보면 무덤의 규모가 살아생전 누린 권력의 정도에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한확(韓確, 1400~1456)으로, 그는 명나라 황제 2명(영락제·선덕제)에게 차례로 조선 제일 미녀 소리를 듣던 두 여동생을 공녀로 보내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한확의 권력 비리에 대한 상소가 빗발칠 때, 세종이 "이제 그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발언한 것을 보면 그의  살아생전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 '삼한갑족 가문 한확의 낯뜨거운 출세기')  
     
    한확이 죽자 당대 최고 권신(權臣)이었던 한명회가 제 묏자리를 내주었다.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69-5에 있는 묘가 그것인데, 세조가 자신의 능침으로 쓰려던 곳을 내주었다는 말도 있다. 이후 동네의 이름이 능내리(陵內里)로 바뀌었다. 이 동네에 능(陵)이 없음에도 능에 버금가는 큰 무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한확 무덤 앞에 있는 신도비는 명나라에서 보내준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그 돌을 코끼리가 싣고 왔다고 한다. 한마디로 차원이 다른 무덤이다.

     

    한확의 묘
    한확 묘와 신도비각
    한확 신도비


    서울 태릉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던 문정왕후(1501~1565)가 홀로 묻힌 단릉이다. 이 왕비 무덤은 세조의 능침인 광릉보다 장대하다. 석물들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웅대하다. 세조 이후 사라졌던  병풍석도 재등장했다. 세조는 자신을 포함해 향후 왕과 왕비의 능침을 간소하게 꾸미라는 어명을 내렸고 그것이 백 년 동안 지켜졌으나 문정왕후의 능침에서는 이행되지 않았다. 당연히 살아생전의 위세 때문이다. 그가 절대권력을 쥐게 된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반정 세력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그들 반정 세력의 요구에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를 버려야 했다. 단경왕후가 연산군 때 권신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폐출된 왕비를 대신해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로 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동생이다.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아들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윤원형의 누나 파평윤씨가 새 왕비(문정왕후)가 되어 아들 경원대군을 낳았다. 
     
    비록 왕비가 되었고 아들을 보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권력의 밖에 있었다. 인종이 무탈하게 살아 있으니 다음 왕은 그의 아들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1545년 인종이 즉위 7개월만에 후사 없이 급사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문정왕후의 열두 살 난 아들 경원대군(명종)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었다. 문정왕후는 관례 대로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해 8년간을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수렴청정 기간이 끝난 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자를 익혔고 기억력이 비상했으며 왕조실록에 '강랑'(剛狠, 사나운 늑대)로 표현될 만큼 천성이 표독스러운 여자였다. 문정왕후는 임금인 명종의 종아리에 회초리를 댈 만큼 무서웠고 어려부터부터 어미에 짓눌려 큰 명종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1565년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잡았는데, 그것이 장장 20년이었고, 동생인 윤원형은 이른바 소윤(小尹)의 거두로써 국정을 농단하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무리도 나타났으나 을사사화를 일으켜 이른바 대윤(대尹)이라고 하는 윤임 일파를 제거했다. 이어 1547년  9월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벽서가 붙는,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기화로 대윤의 잔당들을 쓸어버리고,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사직케 했던 송인수 일파까지 모두 척결했다. 
     
     

    지하철 양재역 3번 출구 앞의 양재역 터 표석
    양재역참, 혹은 말죽거리로도 불렸던 곳이다.

     
    그러는 동안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임꺽정과 같은 도둑들이 발호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며 서울 동쪽에 커다란 무덤과 묘비를 남겼다. 이것이 바로 태릉(泰陵)인데, 얼마나 컸으면 이름마저 태릉일까? 멀리서라도 그 위용을 보노라면, 20세기 시인 김광규가 절규한 '묘비명'의 문구가 오히려 무색해진다. 
     
    "한 줄의 시는 커녕 /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 많은 돈을 벌었고 / 높은 자리에 올라 /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세조의 광릉
    태릉 / 위 광릉이 급 초라해질 정도로 장대하다.
    태릉 병풍석과 난간석
    사실감과 위용 넘치는 무인석 / 우리문화신문 사진
    절대권력을 보여줬던 드라마 속의 문정왕후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와 선빈 안씨의 묘는 태종의 애정 깊이에 따라 규모가 달라진 예다. 후궁들은 당연히 왕의 애정도에 따라 권력의 정도가 결정되었을 터, 앞서도 소개한 바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13번지에 있는 신빈 신씨의 무덤은 사랑을 많이 받았던 후궁의 냄새가 물씬 난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태종과의 사이에서 함녕군 이인(李裀)을 비롯해 모두 3남7녀를 보았다. (※ 태종의 후궁은 19명으로 조선 왕 중 1위)
     
    그는 본래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를 모시는 여종이었으나 태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인터넷 백과 등에서는 검교 공조참의(檢校工曹參議) 신영귀의 딸로 소개돼 있어 반가(班家) 출신인 듯 오해되나, 공조참의는 요즘 말하자면 국토교통부장관 보좌역 정도로서 훗날 아비가 딸 덕을 본 경우라고 하겠다. 아무튼 신빈 신씨는 천민 출신 아버지를 공무원으로 올릴 수 정도로 힘이 있었던 바,  신효창이란 자가 노비 50명을 신씨에게 상납하며 죄의 경감을 구하였고, 오마지라는 자가 북경 가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고자 뇌물을 쓴 일도 있다. 성사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신빈 신씨의 무덤 표석에는 '신녕궁주 신씨지묘'(信寧宮主辛氏之墓)라고 쓰여 있어 그의 살아생전 작위가 '궁주'(宮主)임을 알 수 있으며, '궁주'는 장명등에도 각자됐다.(다만 장명등 각자는 당대가 아닌 훗날에 새겨진 듯하다) 봉분은 군(君)이나 옹주 급 정도로 크며 8각의 호석이 2단으로 둘러져 있어 보통 이상의 공력이 들어간 무덤으로 보인다. 규모보다 눈에 띄는 것은 무덤의 위치로서 누가 봐도 명당이라는 느낌을 주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빈 신씨의 무덤
    무덤 앞 전경
    묘표와 봉분
    정통(正統) 6년 신유년(1441년) 3월에 건립되었다고 쓰여 있는 뒷면
    눈꼬리가 처진 순한 인상의 문인석
    주변 풍경
    '궁주'의 글씨가 뚜렷한 장명등
    8각 형태의 호석
    안내문

     
    선빈 안씨의 묘는 서울 중랑구 묵동 산37-1에 소재한다. 봉분 외 묘표,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봉분의 규모와 석물 등이 위 신빈 신씨의 묘에 비해 떨어진다. 태종의 사랑이 신빈에 못 미친 듯하니, 묘표도 '숙선옹주 안씨지묘'(淑善翁主安氏之墓)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옹주라 함은 후궁의 딸을 지칭하지만 조선 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왕의 서녀,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의 딸 등을 두루 옹주로 칭하였다. 
     
    옹주의 명칭은 1485년 <경국대전> 반포 후에는 오직 왕의 서녀에게만 국한되었던 바, '숙선옹주 안씨지묘'가 각자된 묘표는 후궁에게도 '옹주’라는 명칭이 사용된 사실을 알려주는 실물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숙선옹주는 순흥 안씨 안의의 딸로, 궁녀로 입궁해 태종과의 사이에 익령군 이치(李袳)를 비롯한 1남2녀를 두었다. <성종실록>에는 선빈 안씨(숙선옹주)가 딸인 경신옹주와 재산을 두고 송사를 벌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이채롭다. 그가 빈으로 봉해진 것은 고종 9년(1872)으로, 정1품 선빈에 추층되었다.  
     
     

    선빈안씨 묘 / 봉분 지름 430cm의 원형분으로, 신빈신씨의 묘보다 작고 정성도 덜 들어가 보인다.
    석등과 봉분
    묘표
    눈을 동그랗게 뜬 문인석
    얘는 눈을 네모지게 떴다. (정말 그러함. 깜놀!)
    무덤 입구의 묘표
    묘원 가는 길
    길에서 본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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